101화
보석 산맥의 평균 해발은 3,000미터다.
대륙의 이름 높은 산맥에 비하면 좀 낮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고산高山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없다.
애초에 산의 높이가 1,000미터만 돼도 등산이 쉽지는 않다.
…산을 정직하게 오를 때의 이야기다.
콰가가가각!
가령 10,000미터 규모의 산이라고 해도, 일직선으로 쭉 내려가면 1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의 나라면 10킬로미터를 주파하는 데에 몇 분 걸리지도 않을 터.
영산의 표면 경사가 여타 산과 달리 극단적으로 치우친 점도 지금은 플러스 요소다.
물론 이 기이한 산의 높이는 10,000미터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높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10일 내로는 반드시 주파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어쩐지 넷째 사형은 한숨을 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산을 평범한 산처럼 여기면 안 돼.]
“물론이죠.”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사형은 어쩐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직접 겪어 보는 게 낫겠지.]
“……?”
이 말의 진의를 깨달은 건 얼마 안 있어서, 그러니까 이튿날이었다.
삐빗-.
[현재 진행도: 50.0%.]
마침내 절반이 지난 순간…….
휘오오오오오!
갑자기 어디선가 눈을 뜨기 힘들 만큼의 강풍이 휘몰아쳤다.
“갸아아악-!”
순간 균형을 잃고 그대로 날아갈 뻔했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의미 모를 괴성까지 내뱉고 말았다.
이 바람, 단순히 낙하할 때 발생하는 공기 저항이 아니다.
갑자기 영산이 미치기라도 한 건지, 실제로 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
단지 그것뿐인데도 하산 난이도가 몇 배는 올랐다.
‘무슨 태풍이라도 상륙한 것 같구만!’
잘 지은 건물마저 날려 버릴, 그런 슈퍼태풍 말이다.
이러면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발걸음에 더 힘을 줄 수밖에 없었고.
당연하지만, 발에 힘이 들어간 만큼 속도는 줄 수밖에 없었다.
“……!”
그 순간, 불현듯 눈앞에 벽이 나타났다.
물론 내가 거의 70도 이상의 경사에서 내달리고 있는 걸 고려하면, 이 경우엔 벽이 아니라 발을 디딜 만한 벼랑길일 거다.
아마도 내가 정상적인 루트를 밟았을 때 걸었을 길 말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엿 됐다.’
아무튼 안개 너머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벼랑길에 얼굴부터 처박고 말았다.
콰당탕!
그리고 내 몸은 지면에서 튕겨 절벽과 한참이나 떨어진 허공까지 날아갔다.
‘이건, 진짜 위험한데.’
당연하지만 내게 비행 능력은 없다.
위험천만한 경사길이라고 해도 지면에 발을 붙이는 것과 안 붙이는 건 천지 차이.
이대로 경로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속수무책으로 지면을 향해 처박힐 수밖에 없다.
‘어쩌지?’
내공이라도 있었다면 다른 수단을 마련했을 테지만, 여전히 단전에 있는 내공의 총량은 부스러기 정도.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건 FAD였다.
나는 순간 얼굴도 없는 이 녀석과 눈이 맞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
“…….”
[…설마-.]
“미안.”
그 즉시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킨 다음, FAD를 디딤대로 삼아 도약했다.
파각. 단단한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간신히 원래 경사길로 돌아왔다.
쿵!
일부러 두 발을 깊숙이 박아 넣으며
그사이 내가 발로 밀어낸 FAD는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FAD?”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안개 너머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비행체가 다가왔다.
지직, 직…….
금이 간 화면에 잠시 후 문자가 나타났다.
[FAD의 한 줄 평: 개새끼야.]
“…진짜 미안.”
나는 즉시 한 번 더 사과했다.
* * *
방금 같은 요행을 또 바랄 수는 없다.
FAD가 나와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을 빼더라도 말이다.
이후로는 조금 느리더라도 확실히 주변을 살피며 나아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광풍의 기세는 갈수록 강해졌고, 안개마저 짙어졌다.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불면 안개까지 날려야 맞는 게 아닌가 싶지만, 영산에서 상식을 바라진 않기로 했다.
그렇게 닷새가 흘렀다.
[현재 진행도: 78.7%.]
남은 시간과 거리를 계산하니, 대충 하루에 5퍼센트씩 전진하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더 이상의 변수가 없을 때.
나는 가능하면 이 이상 환경이 바뀌지 않길 바랐지만…….
역시 영산이라고 해야 하나.
이 장소는 항상 내 기대에 엿을 날린다.
쿠르르릉……!
98일이 경과한 무렵, 다시 말해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을 때.
하늘에서 빗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러운 폭우는 내게 많은 문제점을 안겨 줬다.
시야가 좀 더 불확실해졌다거나, 피부를 때리는 폭우가 거슬린다거나,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거나. 그런 건 약과고.
가장 큰 문제는 경사길이 미끄러워졌다는 점이다.
나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전보다 훨씬 다리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릉……!
그나마 저 뇌운에서 낙뢰가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꽈앙!
‘…썅.’
조금 떨어진 곳에 낙뢰가 꽂혔다.
후두둑, 떨어지는 돌조각을 보며 나는 오랜만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괜찮다.
낙뢰에 맞을 확률은 천문학적이라고 들었다.
대충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질 만큼 재수가 없어야-.
꽈앙!
이번엔 좀 더 근접한 곳에 번개가 꽂혔고, 그 순간 자연스레 깨달았다.
이 낙뢰는 자연적이지 않다.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시커먼 뇌운과 어쩐지 시선이 맞은 듯한 느낌이 든 순간…….
꽈광!
낙뢰가 창처럼 나를 향해 쇄도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도 눈으로 포착할 수 있을 정도니까, 실제 낙뢰보단 느리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였다.
그 뇌전의 창은 번뜩인 순간 이미 코앞까지 치달아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곤두선 기분이다.
스치기라도 하면 전신이 감전될 테고, 그 즉시 내 몸은 안갯속에 집어삼켜질 거다.
탓!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절벽을 박차며 억지로 경로를 바꿨다.
꽈르릉!
아슬아슬하게 낙뢰의 범위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모골이 송연하다.
게다가 기분 탓인가.
어쩐지 낙뢰가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꽈과과광!
시발, 기분 탓일 리가 없지.
나는 연이어 들이닥치는 낙뢰를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러면서도 회피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는 없었는데, 여전히 아래로 내달리는 상황이라서 그렇다.
저번처럼 벼랑길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고려하고…….
그러면서도 미끄러운 절벽 길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하체에도 힘을 강하게 실어야만 했다.
이 모든 걸 계산하니 뇌가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는데, 신이라도 들린 건지 나는 그럭저럭 잘 해냈다.
과부화된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지만, 내 몸뚱이는 입력된 모든 공정을 빈틈없이 수행해 냈다.
일반적인 깨달음과는 어쩐지 결이 다르다.
그저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는 단어의 참뜻을 머리가 아닌 육체로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번쩍……!
이제 낙뢰는 하나씩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만뢰萬雷라는 단어가 비유가 아닌, 실제로 펼쳐질 수 있는 광경이란 걸 이해했다.
꽝!
그리고 나는 비교적 조용한 절벽 길에 다리를 박았다.
처음이다.
기력에 여유가 있는데도 질주를 멈춘 것은.
“…….”
이 앞은 정말 위험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여태까지 겪었던 모든 위험이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위기 감지 능력은 건재한가 보군.]
빗소리 너머로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폭우 때문에 FAD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앞은 만뢰지대萬雷地帶다. 지금의 네가 넘볼 구역이 아니지.]
“…….”
[여기까지 하자, 루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마.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는 건 분명히 매력적이야. 하지만 그게 목숨의 무게보다 무겁지는 않을 터.]
나는 줄곧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이곳에서 죽으면 실제로도 목숨을 잃나 보군요.”
[그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
[루안?]
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만뢰를 눈에 담았다.
[포기하겠나?]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만큼의 여유가 없다.
나는 내려치는 번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회색빛 하늘에 번지는 번개의 형태가 꼭 세상이 부서지기 직전에 번지는 균열 같았다.
실은 정말 그런 게 아닐까?
하늘 너머에 있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태산만 한 망치로 하늘을 연이어 후려치는 거다.
천둥은 그때 발생하는 굉음이고, 번개는 그 균열인 거지.
쓸데없는 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내겐 의인화가 필요했다.
사형이 나무를 무인에 빗댄 것처럼, 나도 낙뢰를 쓰러뜨려야 할 상대로 규정지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나란 놈은 상상력이 부족한지, 자연을 적으로 여기는 건 어쩐지 몰입이 안 됐다.
어쩔 수 없이 번개를 조종하는 가상의 적을 상상한 이유였다.
그리고 강적을 이기기 위해선 언제나 분석이 필요한 법이다.
“───.”
언제부턴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연이은 천둥소리에 고막이 터진 건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시끄러운 잡음이 사라져서 집중이 더 잘됐다.
시간의 흐름마저 잊었을 무렵.
“…….”
나는 문득 내가 서 있는 곳에 번개가 떨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받고 옆으로 회피했다.
소리 없는 섬광이 시야를 채웠다.
두 눈을 감아도 빛의 잔영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방금 어떻게 피한 거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요행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는데, 번개가 내려칠 장소가 왠지 모르게 예측이 됐다.
나는 왜 깨달음이란 놈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지 알 것 같았다.
“하아아…….”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턴가 이게 내 준비 동작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윽고 단전에서부터 치솟은 미약한 열기가 전신에 빈틈없이 번졌다.
이명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침묵 속에서, 나는 홀린 듯 발걸음을 내디뎠다.
만뢰지대에 몸을 던진 것이다.
번쩍!
나는 번개가 내리친 장소야말로 일시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이란 걸 이해했다.
분석한 걸 총동원하고, 오감에 육감을 더한다. 그걸로도 부족해 추측까지 곁들여서 낙뢰 지점을 예상한다.
내 눈도 뭔가 이상해졌는지, 어쩐지 발을 내디뎌야 할 장소만 구분되듯 밝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러한 지점을 선으로 쭉 연결한 다음 걸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생전 처음 행한 움직임일 텐데도, 반복 숙달이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치 익숙한 무공을 펼치는 듯한-.
“-아.”
팔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 내딛고 있는 발걸음이 보법步法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고.
그 직전의 고민, 연구가 이 순간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추구하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무인이 행했다면, 그 모든 과정은 무공의 창안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나조차도 깨닫지 못한 사이 하나의 무공을 창안했다는 뜻이다.
“하, 하하…….”
소리가 사라진 공간에서, 내 웃음소리만이 선명히 들렸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발걸음은 온전히 나의 무공이었다.
배드니커도, 잊힌 신도, 심지어 스승님에게조차 영향을 받지 않은.
오로지 내가 겪은 현상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나만의 무공.
나는 평소 새로운 초식에 이름을 지어 주는 걸 즐겼다.
그러한 습관 덕분일까.
이 우연찮게 탄생한 보법에도 딱 맞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뇌천보雷踐步.”
번개를 짓밟는 걸음.
감성이 과하긴 한 것 같은데, 당장은 이 이상으로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탓…….
그리고 나는 비로소 지면에 안착했다.
어느새 휘몰아치던 폭풍우는 멈춘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