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만나야 할 사람.”
아사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비척거리는 동작으로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턱이 낮은 탁자 위에 있던 컵에 손을 뻗었다.
출렁-.
분명 빈 컵이었는데, 아사드의 손이 닿자마자 물이 차올랐다.
아사드는 물을 단숨에 들이켠 다음 나를 보았다.
“그게 누군데.”
“케이안이요.”
우선은 견제하듯 속내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표정을 계속 관찰했다.
아사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밤새도록 진탕 술이라도 마신 사람 같다.
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징수인 케이안? 그 녀석은 왜.”
케이안을 ‘그 녀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남자는 본가에서도 몇 없겠지만.
아사드가 말하니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좀.”
“좀?”
“제사장을 죽이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
마치 가면을 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아사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이 순간 나는 이해했다.
철혈공이 어째서 아사드를 가장 신뢰하는지.
원로회가 왜 이 남자에게 존중을 보이는지.
무표정한 얼굴의 아사드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나조차도 일순간 그 분위기에 압도될 정도였다.
의도적인 건 아니고, 철혈공과 같은 느낌이다.
이 정도 경지의 인물이라면 미세한 감정만으로 대기의 마나를 요동치게 만들 수 있으니.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그 정보를 입수할 경로는 없었을 텐데.”
“…….”
그렇겠지.
실제로 사건이 터지기 직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고.
사실 이 대화야말로 내 계획의 핵심이자, 난관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제사장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과제 말이다.
“궁금한데? 그 정보를 어떻게 안 거야? 가문 내에서도 아는 건 다섯 명이 안 되는데.”
나는 그 다섯 명이 누군지 추리해 봤다.
철혈공, 루크, 아사드는 확실하고.
또 한 명은… 원로회의 의장? 나머지는 모르겠다.
“미리 말해 두는데, 쓸데없는 헛소리나 거짓말은 하지 마. 난 귀찮은 걸 싫어하거든.”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아니. 그건 너무 쉽지.”
“…….”
어쩐지 대답에 따라 죽는 것보다 못한 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말했다.
“좋습니다. 저는 제가 받은 가호로 이 사실에 대해 알게 됐어요.”
“가호라고?”
“네.”
부디 아사드에게도 철혈공처럼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했다.
예전에 변명했을 때처럼, 지금 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영산의 가호 때문에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결과 미래를 알 수 있게 된 거니까.
“미래를 알 수 있는 가호는 내가 알기로 [별의 가호]와 [예측의 가호] 그리고 [원시 요정의 가호]뿐인데, 네 가호는 뭐지?”
별의 가호라면 들은 적 있다.
전에 세렌이 나한테 그 가호를 지녔냐고 소리쳤던 게 떠올랐다.
‘별의 가호를 가졌다고 말할까?’
미래를 읽는 가호라면 그렇게 속여도 무방할 테지만…….
“아뇨. 전혀 다른 가호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아사드의 말은 진심이다.
이 사람은 정말 내가 납득 못 할 변명을 대면, 철혈공의 자식이건 뭐건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그러니 나는 지금부턴 아사드에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하지 못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냥 대답하지 않기로.
이 남자를 상대론 그게 올바른 대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내가 모르는 가호는 거의 없을 텐데…….”
그러더니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한다.
“예측의 가호는 마주한 상대의 움직임을 토대로 몇 초 후의 움직임을 추측하는 가호고.”
“……?”
“원시 요정의 가호는 두루뭉술한 말로 미래를 가르쳐 주지.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고대 요정의 특징 때문이야.”
아사드가 나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별의 가호는 커다란 사건의 대략적인 개요만을 예지한다. 가령 [앞으로 몇 년 내로 대화재가 발생한다…….] 뭐 이런 느낌으로.”
말을 듣는 즉시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즉.
저 세 개의 가호 중 무엇도…….
배드니커의 영지에서, 제사장이, 마왕 강림 의식을 벌인다…라는 형태의 예지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단 건 방금의 문답은 아사드가 던진 함정이었다.
“표정 좀 펴라. 나도 이런 식의 화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배드니커와 마도학, 두 가지만으로 내 머리는 터져 나가기 직전이란 말이야.”
“…그렇습니까.”
“네게 여러 가지 의구심이 들지만, 일단 교인은 아닌 듯하고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 그것과 별개로 모든 걸 털어놓은 느낌은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연륜이라는 걸까.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며 말했다.
“제 입으로 묻기에도 좀 그런데, 절 믿어요?”
“그래. 제아무리 간덩이 부은 교인이라고 해도 나를 대면할 용기는 없을 테니까. 거기에…….”
아사드가 내 반지를 가리켰다.
“그 반지는 앙신의 숭배자들은 못 써.”
“아…….”
뜻밖의 사실이었지만, 이걸 만든 게 아사드라면 거짓말은 아닐 거다.
“일단 상황 정리부터 할까? 너는 제사장이 수련회에 잠입한 것도, 이곳에서 일대 사건이 터질 것도 알고 있다……. 그 뒷사정까지는 굳이 안 캘게. 어차피 이곳은 배드니커. 네가 제사장을 죽이고, 그 계획을 수포로 돌린다면 정보의 출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러니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다.”
“뭡니까.”
“제사장의 정체를 알고 있나?”
“…….”
나는 침묵했다.
어쩐지 지금 이 대답이 이 대화 최고의 분기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도와주시렵니까?”
그리고 넌지시 아사드의 의중을 묻는다.
사실 대마법사 아사드의 조력만 얻을 수 있다면 이딴 수작질은 할 필요가 없다.
“…….”
아사드는 드물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캠프는 나비의 숲 서부에서 열리는데.”
마침내 아사드가 입을 열었다.
“그곳은 내 구역이 아니야.”
뜻밖의 진실에 나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게 무슨.”
“내가 수호하는 건 본가 저택과 숲의 중앙부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의 관리자는 다른 사람이지.”
“그게 누굽니까?”
“리세라디고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내가 가문 겉면의 수호자라면, 그 녀석은 뒷면의 수호자다. 숲지기이자 지하도서관의 사서이기도 하지.”
“지하도서관의 사서…….”
수련회에 오기 직전 내가 찾던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아사드의 말투로 깨달았다.
리세라디고스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최소 아사드는 그자를 자신과 동격의 인물로 취급하고 있었다.
“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녀석이라, 내가 침입한 걸 알면 발광할 거다.”
나는 황당한 심정이 돼서 물었다.
“제사장이 침입했는데 그딴 사이가 대숩니까?”
“제사장이건 마왕이건, 그런 거에 얽매이는 녀석이 아니야. 좀 괴짜거든.”
“…….”
괴짜인 아사드가 괴짜라고 말할 정도면, 되레 정상인이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 라세리디고스란 사람한테 도움을 받으면 안 됩니까?”
“리세라디고스다. 그리고 도움이라……. 솔직히 난 회의적인데.”
아사드가 어쩐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네가 설득해 볼래?”
“뭐, 만남만 주선해 주시면…….”
“그건 어렵지 않은데 말이야.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어떤 의미로는 제사장보다 위험한 녀석이니까.”
“…그냥 대화만 하는 건데도?”
아사드가 쓰게 웃더니 말했다.
“숲에 형성된 결계 말인데, 가문 녀석들 대부분이 몬스터를 통제하기 위해 친 줄 알고 있지? 실은 아니야.”
“…설마.”
“리세라디고스 때문이다. 그 녀석의 봉인 겸 감시랄까.”
“음.”
그렇게 위험한 자가 왜 가문의 수호자라는 걸까.
의아함이 솟구친 순간, 회귀 전에 아사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배드니커의 가법 위에 존재하는 게 철혈공이다- 속사정을 모르는 외부인들은 종종 그런 말을 하기도 하지.
- 애송아, 너는 배드니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이 가문이 품고 있는 진정한 힘과 비밀에 대해서.
어쩌면 그 라리세디고스란 존재는, 아사드가 말한 가문의 비밀 중 하나가 아닐까?
“대신 다른 조력자를 소개해 주지. 말도 잘 통하고, 네가 동원하려고 했던 징수인 케이안보다도 나은 녀석일 거다.”
그리고 마침내 아사드가 내가 원하는 말을 꺼냈다.
“도검선생 칼자크. 녀석과 합류해라. 마침 숲에서 연락이 끊겼으니, 네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알아봐.”
* * *
아사드가 나한테 주문을 걸어 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하루 동안은 결계를 마음껏 통과할 수 있다는 듯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날이 밝는 즉시 캠프를 떠났다.
물론 내 공식적인 소재는 의무실에서 휴식이고, 이 알리바이는 주니앙이 증명해 줄 것이다.
그러니 다음으로 중요한 건 캠프에 있는 통신 수정의 시선을 피해서 움직이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제로스에게 위치를 들어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숲에 배치된 통신 수정이다.
숲에도 통신 수정이 존재한단 걸 회귀 전, 교관 동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됐으니까.
내가 그 점을 물으니, 주니앙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 그거? 평상시엔 작동하지 않아.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숲에서 특별 시험을 치를 때나 쓰는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덕분에 나는 숲을 마음껏 실컷 내달렸다.
‘아- 상쾌하다.’
처음으로 남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달렸기 때문에 나도 들떴다.
역시 주변 볼거리가 풍성해야 뛸 맛도 나는 법이다.
바위에 안개밖에 없었던 영산과는 사뭇 다른 풍경.
나는 달리던 도중에 몬스터 몇 마리를 발견했지만, 굳이 없애거나 하지는 않았고…….
덕분에 빠르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숲 한복판보단 나무의 높이가 낮아서, 그럭저럭 햇볕이 드는 장소.
아마도 숲과 본가 저택의 중간쯤에 위치한 곳엔 제법 큰 건물이 하나 있었고…….
그 앞엔 기사 몇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등지고 서 있었는데, 태도를 보니 숲 쪽에서 사람을 맞이한 적은 거의 없는 듯했다.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니,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누구냐!”
“나야 나.”
“당신은…….”
“루안 도련님?”
기사 중 한 명이 나를 아는 듯해서 찬찬히 보니,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발터 경?”
숲을 떠나기 전에 몇 번 겨루면서 얼굴을 텄던 기사였다.
발터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직 수련회가 한창 아닙니까?”
“잠깐 볼일이 있어서. 허락은 받고 나왔으니까 염려하지는 마.”
“아, 네…….”
“그보다 혹시 여기 도검선생 안 왔어?”
“도검선생…….”
그러자 발터는 물론이고, 옆에 서 있던 동료 기사까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그게, 음, 도검선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오긴 왔는데 말입니다.”
“그게 뭔 말이야?”
“…으음.”
잠깐 고민하던 발터가 말했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게 빠를 듯합니다. 따라오시죠.”
그리고 나는 발터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아마도 숲의 검문소 역할을 하는 건물 같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내부엔 통신 수정은 물론이고 식량, 무기, 간이 침대까지 갖춰져 있었다.
평소에 기사들이 이곳에서 묵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때였다
“이 개새끼들아-! 너희 진짜 자신 있냐!”
천박한 욕설.
귀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누구야?”
목소리는 건물 내부의 어느 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발터가 난감한 얼굴로 방의 문을 열었다.
내부에 들어서니 우선 철창이 보였고, 그 안에 웬 갈색 머리카락의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 너-!”
그 미청년이 나를 보며 반색했다.
나는 당연한 태도를 보였다.
“누구쇼.”
“너, 너까지 그러기냐…….”
“…….”
나는 발터를 보며 설명을 요구했고, 발터가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사흘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자신을 도검선생이라고 주장하던데…….”
“…….”
“…저는 물론 도검선생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어요.”
“진짜 답답해 죽겠네!”
갈색 청년이 가슴을 탕탕 쳤다.
처음 보는 인물 같은데도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러-니-까-!”
이윽고 청년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칼자크가 맞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