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의무실로 돌아온 주니앙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네 개인 선택 과목 말인데, 나로 결정됐어.”
“왜죠.”
“나한테 한 명도 안 왔거든. 자연스럽게 할당되는 분위기였달까…….”
“…….”
양쪽에게 모두 슬픈 이유로구만.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물어봤다.
“오늘 영도들의 조가 정해졌죠? 혹시 제가 속한 조도 들었습니까?”
“응. 말해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엔 에반, 미르, 샤를과 같은 조였지만.
이미 내 행적은 그때와는 소소하게 달라졌고, 점수도 1점 떨어졌으니 다른 조에 배치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주니앙의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너 혼자야.”
“네?”
“1인 1조로, 너 혼자라고. 임시긴 하지만.”
“…왜 얘기가 그렇게 됐죠?”
“다쳐서 병석에 누운 페널티겠지 뭐. 영웅의 덕목 중에선 자기 관리도 있으니까.”
“…….”
“그러니까 주제도 모르고 수렵선생한텐 왜 덤빈 거야? 그 양반은 대충이란 걸 모른다고.”
나름 자제한다고 한 건데.
애초에 원래 목적이 다치고 입원해서 주니앙을 만나는 거라서 계획 자체는 성공한 셈이고.
‘그나저나 1인 1조라…….’
오히려 좋은 상황이 아닌가?
물론 혼자이니만큼 상위 등수를 따내는 건 힘들어지겠지만 말이다.
“너무 낙담하지 마.”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니 주니앙이 말했다.
“일단 이번 특별 시험에서만 그런 형태가 될 거고, 완전히 나은 이후엔 적절한 조에 편입시켜 줄 거야.”
“그렇습니까?”
“물론 그때쯤이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졌겠지만. 수료하는 데에 의미를 두자고.”
“…….”
명색이 성직자란 양반이 위로를 이렇게 못해서야.
“…그보다 교관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제사장은 어떻게 선별되는 겁니까?”
주니앙이 힐끗 나를 보더니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
“배드니커가 사람을 품을 때 인적이나 경력에 대한 조사를 소홀히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 후안 선생의 일생에서 교단과 접촉할 틈은 별로 많지 않던데요? 분명한 건 그 작자가 태생적인 교인은 아니란 점입니다.”
“…….”
“즉 회유를 통해서 교인이 됐다는 것인데……. 제사장 같은 중요 위치로 회유하는 건데, 일이 개월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지 않을까 해서요.”
주니앙은 잠시 내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연초를 집더니, 성냥불로 불을 붙였다.
치익-.
“흑교주에 대해선 알고 있어?”
“자세히는 몰라요.”
“그놈은 말이야…….”
후우, 연기 섞인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꿈을 지배할 줄 알아.”
“…몽마처럼, 말입니까?”
“그래.”
생전 처음 듣는 정보에 두 눈을 깜박거리다, 퍼뜩 어떤 생각이 들어 물었다.
“이거 혹시 극비 정보예요?”
“잘 아네. 너도 내게 비밀을 밝혔으니 그 답례다.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
“꿈의 지배자인 흑교주에겐 시간도, 공간도 별 의미가 없어. 만나고 싶은 자가 있으면 상대의 꿈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이건 확실하지는 않은데, 단 하룻밤의 꿈속에서 수백 일의 체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더라.”
“음…….”
“물론 만난다 해서 반드시 설득이 가능한 건 아니야. 쉽게 쓸 수 있는 힘도 아닌 것 같고. 그러니 여태껏 죽은 제사장들은 죄다 이름도, 신분도 없는 자가 대부분이었지.”
주니앙이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 후안이 제사장이라면, 제사장 중에서도 상당한 특이한 경우란 거야.”
그렇겠지.
일반적으로 역사 깊은 비밀 조직의 간부란, 애초에 그 자리를 내정한 채 육성하는 내부적 인물이 대부분이다.
혹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고아라거나.
명문가 출신의 후안은 둘 다 아니다.
“…….”
서랍에서 발견한 사진이 잠깐 떠올랐지만,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 두기로 했다.
“단장님과 얘기는 했어요?”
루크를 말하는 거다.
“그래. 네 얘기도 전했어.”
“뭐라고 합니까?”
“일단은 따르겠지만, 어떻게 행동할지는 상황을 보고 결정한다더군.”
이번에도 숨어서 기회를 엿보겠다는 것인가?
과하게 신중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신중함으로 성과를 거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납득이 간다.
“넌 내일 시험 어떡할 건데? 치를 거야?”
“일단은 미참할 생각이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구매 목록 좀 보여 주시겠어요?”
“알았어.”
나는 주니앙에게 받은 구매 리스트를 훑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칼자크한테서 따로 말은 없었나요?”
“음.”
주니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없었어.”
* * *
영도의 일과는 오후 10시면 대부분 끝나고, 교관들도 불침번을 서는 인원을 빼면 11시엔 모두 잠든다.
이후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캠프를 빠져나가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저벅-.
고적한 발소리에, 후안은 유난히 캄캄한 밤하늘에서 시선을 거뒀다.
“왔군.”
“…….”
칼자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기감을 펼친 후안은, 곧 주변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혼자 왔구나.”
“약속 따위는 안 했어. 대화를 나누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뜻이지?”
칼자크가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어둠으로 인해 깨닫는 게 늦었는데, 그의 등엔 길쭉한 창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칼자크는 그걸 후안에게 던졌다.
챙그랑-.
“집어라.”
“뭐?”
“오랜만에 한번 겨루자고, 창술선생.”
후안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날 못 믿는 건가?”
“반대로 묻자. 내가 뭘 보고 널 믿어야 하냐? 전우라서? 과거에 맺은 인연이 있으니까?”
“납득 가는 설명을 해준다고 말했잖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직 날 모르냐? 나 못 배운 새끼야. 말로 백번 지껄여도 의미 없어.”
스릉-.
칼자크가 검을 뽑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5년쯤 전이었지. 나는 빌어먹을 보석수를 쫓아다니느라 온전히 검술을 갈고닦지 못했다……. 넌 어때? 창술… 무예선생 나리.”
칼자크가 발부리로 툭 창을 밀쳤다.
“내가 알던 네놈이라면 아무리 바빠도 단련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터. 이렇게 하자. 네 무예가 5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면,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하.”
후안이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재밌겠네.”
* * *
‘혼자 오라고?’
진짜 염병을 떠는구나.
칼자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의심받는 걸 눈치챘다면, 염병할 짓거리는 집어치우고 결백의 증거나 가져오란 말이다.
그럼 같이 네 무죄를 주장해 줄 테니까.
물론 칼자크는 루안을 신뢰하지만, 녀석이 뭔가 착각한 걸 수도 있다.
…물론 그럴 확률이 희박하단 건 안다.
그 맹랑한 꼬맹이가 범상찮은 놈이라는 건 산맥에서 이미 알게 됐다.
하지만-.
까앙!
서로의 거리가 좁혀진 순간, 휘둘린 검이 창대를 후려쳤다.
물러선 건 후안이었다.
뿌드득.
고작 한 번의 공격만으로 칼자크는 깨달았다.
그래. 달라지기는 했다.
수준이 떨어진 것도 변한 건 변한 것일 테니까.
5년 전 칼자크가 겪었던 후안의 창술은 이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즉 이 남자는 5년간 무예를 단련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손에 물집이 잡힐 만큼 창대를 휘두르던 녀석이, 무학에 관한 서적이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죄다 매수했던 녀석이.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빠드득.
이를 간 칼자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왜 교단에 투신한 거냐, 후아안-!”
스걱!
창대가 순식간에 반으로 잘렸다.
칼자크는 일순 무방비해진 후안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후안의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진 순간, 칼자크의 검이 그 목울대를 겨냥했다.
검 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바바라를 살리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면 믿어 주겠어?”
칼자크는 후안의 처연한 미소를 보며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교단이 내뱉는 헛소리 중 가장 잦은 게 죽은 놈팔이라는 걸, 황실 기사단 출신인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던가? 저 척박한 남부의 황야에서, 교단이 사자 소생의 의식을 꾀하고 있었지. 제국 황실과 영웅기관 헤로스, 켈트론 용병의 첫 협업 임무……. 기억나, 칼자크? 너와 나, 바바라가 처음 만난 그때 말이야.”
“…….”
“우린 바바라의 미소를 좋아했지.”
칼자크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바바라의 죽음은 유감이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후안이 험악한 얼굴로 칼자크를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군.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이야. 대답해. 바바라는 이제 네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랬던 건가.”
“너…….”
“생각해 보면 그게 더 말이 되겠어. 넌 살아 있는 바바라의 구애를 못 본 척하고, 죽은 동생의 넋을 기리러 떠났으니까.”
큭큭큭. 후안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칼자크, 우리가 다른 게 뭐지? 둘 다 죽은 자에 얽매여 있는데 말이야.”
“바바라가 지금 네 꼴을 보면 욕을 날릴 거다.”
“…….”
“쓸데없는 짓은 집어치우라고 말하며 머리를 쥐어박겠지. 그런 여자잖아.”
“…그래. 완고하기 짝이 없었지.”
후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여라.”
칼자크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갈등의 빛이 스쳤지만, 극히 찰나였다.
푹.
칼날이 후안의 목구멍을 관통했다.
피가래가 끓는 소리.
손끝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촉.
전우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칼자크는 검을 뽑았다.
푸슛, 상처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후안이 비틀거리더니 곧 지면에 얼굴을 처박으며 쓰러졌다.
“…….”
칼자크는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물러나며, 근처 나무에 등을 기댔다.
선명한 숲 벌레 소리가 불쾌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칼자크는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그러고 보니 살인은 오랜만인가? 오랫동안 산맥에 처박혀서 괴물만을 죽였으니까.
그러나 구역질의 이유가 꼭 오랜만에 저지른 살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네 말이 맞아. 완고한 여자였지.”
나에겐 너무 과분하기도 했고, 칼자크가 뒷말을 삼킨 순간.
“그래. 조금만 더 융통성이 있었더라면 나도 그녀를 죽이진 않았을 거야.”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자크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뭐?”
빠악!
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날아와서 칼자크의 복부를 꿰뚫었다.
칼자크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그걸 베어 내려고 했지만, 이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어마어마하게 단단해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꽈앙!
칼자크는 쭉 밀려난 채 나무에 처박혔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츄릅……. 복부를 꿰뚫은 무언가가 천천히 떠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두 동강 낼 생각이었는데 그 찰나에 반응하다니……. 또 강해졌구나, 칼자크.”
“…너.”
“몇 년을 산맥에 처박혀 있어도 너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 건가? 정말 질투가 나는 재능이야.”
후안이 천천히 일어서며 옷을 털었다.
“…과거의 나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이제는 딱히 아무렇지도 않아, 칼자크. 너를 앞에 두고서도 그저 담담하군. 이 또한 위대하신 앙신의 가호겠지.”
칼자크가 꿰뚫은 목구멍에선 여전히 피가 울컥울컥 치밀었지만.
후안은 괴로워하기는커녕 말하는 게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후안.”
“내가 비극의 인물로 보였어? 아니면 숭고한 결심을 바탕으로 악의 세력이 투신했다고 생각한 건가. 그런 자가 제사장이란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한 거야?”
후안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순진하잖아, 이 얼간이 놈아. 산맥에서 몇 년 살더니 감이 다 죽었어. 옛날의 너는 이것보다 훨씬 날카로웠는데…….”
“…이 새끼가.”
“잘 가라, 칼자크. 한때의 친우여. 솔직히 말하면, 딱히 반갑지는 않았어.”
후안의 입가에서 녹색 빛의 혀가 날름거렸다.
방금 복부를 꿰뚫은 건 혓바닥이었나.
‘더럽게…….’
칼자크는 이 순간에도 그딴 감상이나 품는 자신에게 한숨이 나왔다.
혓바닥이 다시금 쇄도한 순간, 칼자크의 뒤쪽에서 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채앵! 검에 부딪힌 혓바닥의 경로가 꺾였다.
난입한 검은 칼자크의 바로 측면에 떨어졌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름한 외관이었다.
“산맥 때랑은 입장이 반대네요?”
칼자크는 억지로 입가를 비틀었다.
“…이 애송이가. 난 그때 머리를 꿰뚫었어.”
“그건 조무래기였고.”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루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안은 영문 모를 얼굴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안 영도? 무단으로 캠프를 벗어나는 건 감점 사유인-.”
“칼자크가 이 자리에 혼자 온 건 댁을 존중해서겠지.”
루안이 칠죄검을 뽑은 다음 다시 허리에 채웠다.
“친구라서 그런지, 같은 대사범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고지식한 양반이란 말이야.”
“…….”
“반면 우리의 철혈공 가라사대- 그 어떤 때라도 교인과는 대화도, 협상도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루안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제 그 뜻을 좀 알겠군.”
“아하.”
후안도 픽 웃었다.
“당신이었군요. 제 정체를 발설한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