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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09화 (109/172)

109화

‘이럴 거 같더라니.’

기껏 인재를 모으고, 열심히 작전까지 짜면 뭐 하나.

계획대로 흘러가는 꼴을 못 보는데.

그런데도 의외로 내 심정은 담담했는데, 마음 한구석으론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조금은 예상했기 때문이다.

“일이 나쁘게 풀리진 않을 거라더니.”

“…면목 없군.”

칼자크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어울리는 꼴은 아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곧 지원군이 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일부러 후안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블러핑이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운 건 미처 주니앙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이번 외출은 다소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나는 교관 동의 의무실에서 쉬고 있는 만큼, 건물 내부의 기척을 좀 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는데-.

후안의 방은 특히 더 주목하고 있었다.

‘이 새끼는 왜 안 들어오는 거야.’

이 오밤중에 어딜 싸돌아다니기에.

결국 23시가 넘어가는 시점까지 후안의 방은 여전히 비어 있었고…….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슬며시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 장소를 발견한 것.

당연히 주니앙이나 루크에게 상황을 전달할 여유는 없었다.

“후웁……!”

그 순간 칼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뜻밖의 기개에 놀랐다.

“괜찮아요? 출혈이 심해 보이는데.”

“지혈했다. 제 컨디션이라곤 말 못 하겠지만, 짐짝은 안 돼야지.”

그래도 큰 도움은 기대하긴 힘들 거다.

복부의 상처는 치명적이다. 모든 동작에 힘이 들어가는 부위라서 그렇다.

“혓바닥으로 공격하는 놈이다.”

“그렇더군요. 산맥에서 비슷한 놈을 죽였는데 말입니다.”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안이다.

“오셀은 제법 유망한 교인이었지요. 악마와의 계약을 주선해 준 것도 실은 나였는데…….”

“…….”

“그보다 루안 배드니커……. 방금 공격도 그렇고, 제가 알던 것보단 훨씬 유능한 것으로 보이는데 혹시 재능을 숨기고 있었던 겁니까?”

저런 질문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후안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대꾸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렇습니까?”

까, 하는 순간 벌려진 입에서 다시 한번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빠르다.

영산에서의 수련이 없었다면 전혀 보이지 않았을 터.

‘아차.’

노리는 건 내가 아니다.

혓바닥은 칼자크를 향하고 있다.

멀쩡할 때라면 몰라도, 지금 칼자크가 대응할 수 있을까?

카앙!

다행히 칼자크는 혓바닥을 쳐냈다.

우선은 그렇게 보였는데-.

츄릅.

“……!”

혓바닥이 곧 검을 칭칭 감쌌다. 마치 똬리를 틀려는 뱀처럼 기분 나쁜 움직임이다.

검을 단단히 묶은 혓바닥은, 이윽고 로프처럼 칼자크를 끌어당겼다.

“큭!”

칼자크는 몸을 휘청거렸지만, 끝까지 검을 놓지는 않았다.

검사로선 멋진 끈기였지만, 그게 좋은 판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혓바닥은 검 채로 칼자크를 번쩍 들더니, 채찍처럼 크게 휘둘러 칼자크를 날려 보냈다.

“칼자……!”

어마어마한 괴력이다.

칼자크의 몸은 마치 던져진 조약돌처럼 저 밤하늘까지 치솟았다.

망연한 눈으로 하늘을 보다가, 나는 상체를 비틀어 혓바닥을 피했다.

“다 죽어 가는 놈은 관심 없습니다, 루안 영도.”

후안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혓바닥을 쭉 뺀 채로 잘도 말하는구나 싶었다.

“당신은 어쩐지 살려 두면 귀찮아질 것 같군요. 여기서 확실히 죽여 둬야겠어요.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

“뭐, 제 예상이 맞는다면 그런 건 애초에 없었겠지만.”

‘썩을.’

눈치도 빠르시군.

뭐, 좋다.

상황이 엿같이 돌아가긴 하지만, 애초부터 이런 때를 대비해서 단련하지 않았나.

수련회가 끝난 후 느꼈던 분노, 허망함, 치욕. 이후 겪었던 영산에서의 100일과 넷째 사형과의 대련까지-.

그간의 기억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후우우우…….

나는 깊게 숨을 내뱉은 다음 상대를 노려봤다.

“…붙어 보자고, 제사장.”

방해꾼 없이, 일대일로.

* * *

칼자크의 육체는 아찔한 높이까지 치솟았다.

사파이어 스네이크를 섭취하며 대단히 발달한 기감조차 경종을 울렸다.

드넓게 펼쳐진 한밤중의 숲을 이렇게 내려다보는 건 나름의 절경이었지만-.

뚝.

상승이 낙하로 뒤바뀐 순간 더 이상 팔자 좋게 감상이나 늘어놓을 수는 없게 됐다.

쐐애애액!

“……! ……!”

추락한다.

공기 저항으로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렵다.

복부의 고통 때문에 다른 대응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

칼자크는 어쩔 수 없이 양팔을 교차시키며 충격에 대비했다.

콰지지지직!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숲의 굵직한 나뭇가지가 충격을 줄여 줬다. 육체를 할퀴는 나뭇가지의 감각이 끝났을 때쯤.

쿠당탕!

칼자크는 바닥을 굴렀다.

일단 명줄은 부지했다.

팔, 늑골, 다리에도 금이 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젠장…….”

칼자크가 억지로 일어났다.

후안의 입구멍에서 나타난 녹색의 혀.

그건 위험하다.

물론 후안이 죽었다고 단정 짓고 방심한 탓에 허용한 공격이긴 하지만…….

‘칼자크, 이 병신 같은 새끼.’

과거의 연 따위 이미 잊은 것처럼 지껄였으면서 대체 뭐냐? 이 한심한 모습은.

상대는 교인, 심지어 제사장이었다.

별의별 것들이 득실거리는 교단에서, 스무 명도 되지 않는 간부란 말이다.

목구멍을 찌른 걸로 죽였다고 단정 지었으면 안 됐다.

물론 핑곗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산맥에서 만난 제사장에게 이런 재생력은 없었으니까.

‘…애송이가 위험하다.’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칼자크는 필사적으로 공터로 돌아갔다.

“…….”

그리고 그곳에 당도한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콰가가가각!

결코 좁다고는 할 수 없는 공터가 비좁게 느껴질 만큼의 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며 덮치는 녹색의 혀.

그것에 완벽히 대응하고 있는 루안의 모습은, 앳된 겉모습을 고려하지 않으면 칼자크조차 쉬이 볼 수 없는 실력자로 보였다.

‘루안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칼자크는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억지로 삼켰다.

그 대신 현재 상황을 재차 분석하고,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심적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합류하고 싶지만… 이 꼴로는 짐짝만 될 뿐.

‘…조력자가 필요하다.’

캠프로 돌아가서 조력자를 데리고 온다.

그렇다고 죄다 데리고 올 수는 없다.

교관 중에 후안의 수하가 있을지도 모르고,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오면 줄행랑을 칠 수도 있으니까.

‘교의선생. 루크 단장.’

현시점에서 가장 뛰어나고, 또 믿을 수 있는 두 명을 떠올렸다.

그 둘과 지금의 루안.

세 명의 힘을 합하면 제사장이라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칼자크는 이 순간 옛 친우였던 후안을 완전히 묻고, 교단의 제사장으로만 대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

‘…제발 죽지 마라, 루안.’

갚아야 할 빚이 하나 더 생겼다.

칼자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캠프를 향했다.

* * *

주니앙의 설명.

그리고 루안의 추측대로 제사장이란 직책은 대부분 교단의 내부 인물로 결정된다.

그런데도 후안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

흑교주가 직접 나서서까지 회유했던 이유는, 후안이 가진 특별한 자질 때문이다.

후안은 다수의 마왕을 동시에 섬길 수 있었다.

악의 화신인 흑교주 이외에 그게 허락된 자는 없었다. 그 핏줄을 이은 소교주조차도 말이다.

마왕이란 독선적인 자들이다.

멍청한 제국 놈들은 마왕의 숭배자들을 한데 묶어 [암흑교단]이라고 부르지만, 내부 사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애초에 여섯 마왕조차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성향도 제각각이고, 경전의 내용도 아예 다르다.

파벌마다 교리도, 규칙도, 구성원의 성격까지 다르니 흑교주란 구심점이 없었다면 진작 다른 세력이 됐을 거다.

자연스레 마왕도 자신에게로 향하는 신앙이 분산되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안이 숭배하는 마왕은 무려 셋이나 된다.

흑색 늪의 마왕인 아홉.

핏빛 달의 마왕인 하덴아이하르.

그리고 녹색 혀의 마왕 탕타타.

이중 아홉(Ahop)은 그 막강한 권능만큼이나 더욱 조심히 모셔야 할 마왕인데, 아홉의 경전은 마왕의 경전 중에서도 가장 두꺼운 편이었다.

반면 탕타타는 아홉과는 정반대되는 성향이다.

딱히 자신의 숭배자가 아니더라도 이해관계가 일치하거나, 대가가 마음에 들거나, 혹은 특별한 이유 없이도 부탁을 들어준다.

물론 권능을 하사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지만.

촤악!

후안은 녹색 혀를 더 이상 입안에만 두지 않았다.

그걸 손으로 직접 뽑아낸 다음, 채찍처럼 휘둘렀다.

이 녹색의 혓바닥이야말로 탕타타가 직접 하사한 마왕의 권능이다.

표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타액은 부식의 성질이 있어서 맞닿는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무효화한다.

평범한 무기라면 진작 부식됐을 것이고, 평범하지 않은 무기도 오래 버티진 못한다.

단단하기로 소문이 난 황실의 검조차 이 혓바닥의 부식액을 버티진 못했다.

‘저 검은 대체 뭐지?’

루안이 휘두르는 허름한 검에선 부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이 영도는 대체.’

단 한 번도 주의 깊게 본 적 없던 배드니커의 무능아가 깜짝 놀랄 만한 무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열다섯. 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얻은 겁니까? 당시의 철혈공도 제사장과 직접 맞붙진 못했을 터인데.”

공세를 퍼붓는 와중에 그런 말을 내뱉을 만큼, 후안의 놀라움은 진짜였다.

그러나 막상 루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꼼수 좀 썼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

후안은 깊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꽈악.

무기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채찍처럼 유연하던 혓바닥이 경화硬化했다.

순간적으로 단단해진 혓바닥을 양손으로 잡고, 후안은 창처럼 내찔렀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동작이 반 호흡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뤄졌다.

휘익!

“……!”

루안이 그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후안으로선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치열한 공방에서, 상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지 않고 대응한다.

이건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경험까지 갖췄다고? 고작 열다섯이란 나이에?’

후안이 녹색의 창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꿨다.

푹 찌르던 창의 끄트머리를 부러뜨려 단검으로 활용하고, 길쭉한 창대를 검처럼 휘두른다.

검, 도, 창, 봉, 도끼, 둔기, 채찍…….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무기술을 보며, 루안도 감탄하고 말았다.

“사형과의 대련이 없었다면 상당히 고전했겠어.”

“사형?”

“응. 혹시 형상기억합금이라고 알아?”

“처음 듣는군요.”

“나도 그랬어.”

그 순간이다.

후안은 눈에서 벼락이 내려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쿠르릉!

반 호흡도 안 되는 찰나, 코앞까지 당도한 루안의 검.

그걸 포착했을 때, 칼날은 이미 핏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스걱-.

소리와 고통은 조금 뒤늦게 찾아왔다.

후안은 살짝 물러난 채로 절단된 오른팔을 붙들었다.

얼굴엔 짙은 낭패가 어려 있었다.

“아프지?”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아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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