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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10화 (110/172)

110화

셋째 사형은 대단히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다.

나도 말이 적은 사람은 아닌데, 셋째 사형과 대화할 때는 거의 고개만 끄덕일 정도.

물론 단순히 말만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셋째 사형은 말을 재밌게 할 줄 알았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둘째 사저나 넷째 사형도 셋째 사형과 얘기할 때면 자주 픽픽 웃었고…….

무슨 말을 하건 대부분 은은한 미소로 받아치는 대사형까지, 그 앞에선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을 정도다.

셋째 사형은 말이 많은 만큼 무수히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몇 개는 내 마음에 쏙 들기도 했다.

- 막내야, 알겠니? 설레발은 죄악이야.

설레발은 죄악.

간단히 해석하면 일에 앞서 과한 기대는 접어 두라는 의미지만…….

널리 보면 어떤 때에도 경거망동 말고, 침착함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평정, 혹은 부동의 마음가짐이랄까.

그런데 실은 난 이번 제사장과의 전투에서 약간의 설레발을 떨고 말았다.

- 후안과 싸울 때 전력을 다하면 약간 곤란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제사장을 너무 압도해서 후안이 냅다 줄행랑을 쳐 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아사드에게 듣기로 제사장에겐 귀로鬼路라는 기술이 있고, 그걸 발동하면 거의 확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채채채챙!

제사장은 팔 한쪽이 잘렸는데도 기력이 쇠한 느낌이 없다.

오히려 공세가 더 날카로워졌다.

뜻밖의 저력을 가진 영도에서, 필생의 숙적을 만난 듯한 태도로 바뀌었다.

“……!”

등골이 오싹거린다.

실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연거푸 이어지니 오싹함이 멈추지 않고, 어느 순간 연속적인 소름으로 바뀌었다.

‘같은 말인가?’

여하튼 치열한 격전 속에서 깨달은 건, 지금 조금이라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나라는 것.

물론 큰 의미는 없다.

비율로 치면 육 대 사와 오 대 오를 왔다 갔다 하는 느낌.

언제든 실수 한 번에 뒤집힐 수 있는 주도권이다.

제사장의 무기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다룰 수 있는 모든 무기의 숙련도가 달인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다수의 무술을 쓰는데도 난잡하지 않고, 오히려 현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변화무쌍의 측면에선 아랑 사형의 만변금강공을 따라갈 수 없다.

제사장이 아무리 다양한 무기를 다룬다고 해도, 그 종류는 근접 무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 넷째 사형은 권법, 장법, 수법, 조법, 지법, 각법 같은 맨손 무공과 더불어…….

하늘을 자유자재로 비행하며, 대포 같은 원거리 무기까지 펑펑 쏴댔다.

지금의 내가 승부에서 약간이나마 심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그때의 대련 덕분이다.

‘실력으로 보면… 제사장이 아직 나보다 한두 수는 위인가.’

100일의 수련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래도 세월이란 벽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다.

분노하거나 절망할 일은 아니다.

후안이 칼자크와 비슷한 나이란 건, 바꿔 말하면 철혈공과도 비슷한 세대란 뜻이니까.

어쨌든 이 실력 차이는 팔 한쪽을 자름으로써 좁혀졌고, 전투 양상은 단순해졌다.

지구력이다.

파파팟-.

뇌천보를 밟으며 은하검과 백일식을 병행한다.

영산에서의 수련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거다.

고절한 세 개 무공을 실전에서 동시에 펼치는 것.

웬만한 응용력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지금의 내겐 어렵지 않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팔 한쪽을 잘랐고, 우위까지 점하고 있으나 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

제사장이 묘한 움직임을 보인 건 그 순간이다.

여태까지 공세에만 집중하던 녀석이 처음으로 크게 거리를 벌린 것이다.

당연하지만 접전 도중에 몸을 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탈의 대가로 제사장의 가슴엔 사선으로 검상이 그어졌다.

“…….”

겉이 아니라 속까지 제대로 벤 것 같은데, 영 찝찝하다.

후안은 선뜻 추적하기 힘든 나무 위에 선 채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철혈공의 자식 중에서 경계해야 할 건 히이로와 네로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후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화에 응해 줬다.

“헥토르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요. 그건 당신도 알 터.”

“…….”

역시 대사범이란 직책에 그냥 앉아 있던 건 아닌지 안목이 정확하다.

헥토르를 얕보는 건 아니지만, 배드니커의 장남과 차녀에 비하면 아직 부족한 면이 많다.

후안이 양손을 들며 말했다.

“인정하지요. 오늘은 졌습니다.”

저건 뭐 하자는 수작일까.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후안을 노려봤다.

“당신에 대해서 철저히 머릿속에 박아 두지요, 루안 배드니커. 앞으로 교단은 당신의 모든 행동을 주시할 겁니다.”

“도망치려고?”

도발 섞인 말을 던져도 후안은 웃을 뿐이었다.

“네. 꽁무니 빼고 도망치렵니다. 그리고 약속하지요. 앞으로 전 당신의 가장 귀찮은 적이 될 것입니다.”

“네가 여기서 떠나면 소교주를 죽일 거야.”

내 덤덤한 말에 후안이 흠칫했으나, 빠르게 표정을 관리하며 웃었다.

“무슨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거짓말처럼 들리나? 그럼 가든가. 대신 에반 헬빈은 내 손에 죽어. 장담하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후안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딴에는 목소리 깔고 위협한 것 같은데, 글쎄…….

피를 철철 흘리는 꼴로 말해 봤자 별로 무섭지 않다.

나는 낄낄 웃으며 분위기를 탔다.

“꼬리가 너무 길었어, 제사장. 일을 철두철미하게 진행하려고 했다면 혼자 잠입했어야지.”

기대도 않고 던진 말이었는데, 후안이 내 떡밥을 그대로 물었다.

“…에인즈번. 실망스럽군요. 멍청하긴 해도 입만큼은 무거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비틀린 입가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

예상치 못한 소득이다.

다른 내통자의 존재를 확신만 할 수 있어도 이득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특정까지 해줄 줄이야.

에인즈번은 법학선생의 이름이다.

재수 없는 관상이라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었는데.

‘끼리끼리 논다더니…….’

후안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소교주에 대한 걸 다른 이에게 말했습니까?”

“글쎄. 어떠려나.”

“…최소한 칼자크는 알고 있겠지요. 좋습니다.”

후안이 숨을 깊게 내쉰 순간이다.

손에 들린 녹색의 혀가 다시 꿈틀거리며 형상을 갖췄다.

“그건-.”

이윽고 녹색 혀는 봉의 형태가 됐다.

봉도 물론 무기이긴 하지만, 저건 무기로 쓰기에 적합한 모양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지팡이에 가까운 형태.

그 순간 후안이 눈을 감더니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رب اللسان الأخضر……!”

“……!”

들은 적 있는 기괴한 목소리. 그리고 언어.

틀림없다.

마지막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홉을 소환할 때 말했던 그 언어다.

파지직!

나는 뇌천보를 밟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아무리 제사장이라고 해서 현시점에서 마왕을 소환하는 건 불가능하다.

의식이 시작되기는커녕 준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주니앙의 말에 따르면, 준비 없이 마왕과 소통하려고 들면 제아무리 제사장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건…….]

그 순간 무신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신은 평소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자여! 저 주문을 끝까지 외게 두면 안 되네!]

‘역시 마왕 소환입니까?’

[그게 아닐세! 이대로라면 저 사악한 존재의 권능에 휘말리게 돼!]

‘제사장이 뭘 하려는 겁니까?’

[내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주문은…….]

나는 무신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다음 멈칫했다.

‘…정말이에요?’

[내가 왜 연자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음…….’

무신의 말이 모두 사실일까?

짧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당연히 사실일 거다.

이 시점에서 무신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두 번의 도약만으로 후안이 있는 높이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주문을 외고 있는 제사장을 향해 칠죄검을 휘두른다.

스걱-.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목젖을 스쳤다.

후안이 주문을 외는 도중에도 내 공격을 피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잡는다.

“……!”

“많이 놀란 얼굴이군요……. 내가 강신 의식이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까?”

“뭘 한 거지?”

“역시 악마어까지는 모르나 보군요. 루안 영도… 알고 있습니까? 무지란 곧 비극입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지껄이며, 후안이 미소를 지었다.

“명심하시지요. 당신이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푸화악!

돌연 치솟은 어둠이 나와 후안을 집어삼켰다.

사방이 침잠하는 느낌과 함께, 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갑시다. 지옥으로……!”

* * *

어두운 공간이다.

단순히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쩐지 정신과 육체가 묘하게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찍이 겪어 본 적 없는 감각이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몸을 움직이니, 꼭 수영을 하는 것처럼 육체가 출렁거렸다.

“아. 오셨습니까?”

그때 어둠 속에 서 있는 후안의 모습이 보였다.

희한하다.

빛 한 점 공간인데, 후안의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히 보였다.

게다가 분명 팔 한쪽을 자르고, 피가 철철 흐를 만큼 가슴팍을 깊게 베었을 텐데도 이 녀석은 멀쩡한 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칠죄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무기가 없단 걸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루안 영도.”

나는 막 돌진하려다 멈췄다.

어쩐지 시간을 끌려고 굴거나, 헛소리를 내뱉은 듯한 낯짝은 아니었다.

“여기가 지옥인가? 댁 하나밖에 없는 장소라니……. 지옥은 내 생각보다 훨씬 끔찍한 곳이었군.”

“흐음. 틈새 공간에 대해선 모릅니까?”

“…….”

“표정을 보니 처음 듣는 모양이군요.”

후안이 웃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지옥으로 가는 길목이랄까요? 틈새 공간은 세계 간 이동을 할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장소입니다.”

“왜 내가 여기 온 거야?”

“제 권능으로 함께 이동한 겁니다.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앙신의 유물을 이용하면 가능하지요.”

그 녹색 혀.

범상치 않은 물건인가 싶더니, 역시 유물이었나.

‘회귀 전에는 못 봤던 건데.’

속으로 혀를 찼다.

회귀 전의 정보를 맹신하는 것도 좋지 않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또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제 대충 알겠다.

“귀로를 쓴 거지?”

후안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귀로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시군요. 철혈공이 교단에 대해 아주 체계적으로 교육해 준 모양입니다.”

“널 죽이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그 반대입니다. 제가 죽으면 당신의 영혼은 이곳에 갇히게 되겠죠. 영원히.”

그건 좀 그런데.

“사실 귀로를 둘이서 펼친 적은 처음인데……. 조금 난감하게 됐군요. 아무래도 선택권은 당신에게 넘어간 듯하네요.”

“선택권?”

“그렇습니다……! 과분하기 짝이 없는, 대면할 신을 고를 권리지요……!”

후안이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섯 앙신……! 당신은 그분들 중 한 분을 뵐 수 있는 겁니다! 자, 루안 배드니커! 선택하십시오! 이곳에서 평생을 갇혀 있을지! 아니면 저와 함께 신을 알현할지!””

“…….”

나는 속으로 무신의 말을 떠올렸다.

- 저것은 지옥의 숭배자들만이 사용하는 귀환기歸還奇일세! 원리는 모르겠지만, 쥐고 있는 유물로 힘을 증폭했어!

- 이대로 있으면 저 귀환에 연자도 휘말리고 말 걸세! 그럼 강제로 지옥의 지배자를 만나게 될 것이야!

…여기까지는 무신의 말대로.

즉, 도박은 일단 절반은 성공했다.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

내가 만나야 할 앙신- 즉 마왕이 누군지는 당연히 정해져 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채색의 마왕.”

번쩍-!

그리고 세상이 반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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