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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11화 (111/172)

111화

음울한 빛깔이 망막에 맺힌다.

생전 처음 보는 녹색 빛 하늘 아래 죽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불쾌할 정도로 치솟은 건물은 희한한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꼭 누가 쥐어짠 것처럼 비틀려 있다.

건물은 그렇게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꼴로 잘도 서 있었다.

쿠우우우-.

불어오는 바람은 괴물의 트림처럼 고약했다. 일단 바깥인데도 동굴 내부처럼 답답하고 축축한 기분이 든다.

쿳, 쿠후훗…….

비틀린 건물의 창가에서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을 엿보는 듯한 시선도 느껴진다.

시선의 기척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 그중 잔챙이가 한 놈도 없단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대사형은 이런 곳에 있는 건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다.

검은 늪의 마왕이 강신한 직후에 말이다.

숲의 나무껍질엔 귀신의 얼굴이 새겨지고, 불길한 바람이 사방에서 휘몰아쳤었다.

안 좋은 점은, 지금 느끼는 압박감이 그때보다 최소 몇 배는 강하다는 것.

[연자여, 대체… 제정신인가?]

무신이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는 있나? 지옥이야! 악기의 총본산이자 뒤틀린 고향! 죽음이 들끓는 장소란 말일세!]

‘그런 것 같네요.’

악기의 영향 때문일까.

벌써부터 몸이 살짝 굼뜨다.

악기에 침잠됐던 나비의 숲- 단지 지옥을 흉내 낸 그 장소에서도, 나는 얼마 못 버티고 죽을 뻔했다.

그렇다면 실제 지옥에서 내 몸뚱이는 얼마나 버텨 줄까?

한나절?

한 시간?

‘그보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 확실하죠?’

[…다른 세상엔 오래 머물 수 없는 게 태초의 규칙일세. 그게 아니라면 앙신이 강신 의식을 통해서만 소환되지는 않겠지. 연자도 마찬가지야. 얼마가 되었든, 이곳에 머물다 어느 순간 강제로 송환될 걸세.]

‘어느 순간이라면, 정확히 언제쯤-.’

[송환 시기엔 개인차가 있어! 그걸 모르니 위험하다고 한 게야!]

무신이 드물게도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시간까지 연자가 버틸 것이란 보장이 없네! 대체 왜 이런 무리한 짓을-.]

그 순간 무신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무신님?’

[…….]

대답이 없다.

평소와는 느낌이 다르다.

잠에 든 게 아니라, 통신이 강제로 끊긴 듯한…….

‘…….’

일단 변명하자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지옥에 몸을 내던진 건 아니다.

위험 부담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 리스크는 짊어질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고 보니 후안은?’

분명 같이 이동했을 텐데 안 보인다.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통… 통…….

건물 너머 어딘가에서 공이 튕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순간,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시선의 주인들이 다급히 숨는 게 느껴졌다. 꼭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커다란 기운이 내게로 접근하는 게 느껴진다.

일찍이 겪은 적 있는 위압감이기도 했다.

회귀 전, 검은 늪의 마왕 아홉을 보았을 때.

‘마왕.’

그 단어가 머리를 스친 순간, 나는 티 나지 않게 심호흡했다.

마침내, 대사형을 만날 수 있는 건가?

[훅……! 훅……!]

마침내 인기척 하나 없는 골목길 어귀에서 기척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칙칙한 어둠을 배경으로, 비대한 몸집의 주인공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심지어 공을 차면서 말이다.

[훅……! 훅……!]

뒤뚱뒤뚱한 움직임은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고, 숨을 헐떡대는 모습 또한 꼴사나웠지만…….

이상하게 나는 조금도 우습거나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존재가 내 앞에 이르렀다.

[호, 호호호…….]

체격은 어림잡아 3미터쯤 될까?

인간보다 훨씬 크지만, 일단은 이족보행을 하고 있고 팔도 두 개 달려 있다.

심지어 옷까지 입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이 존재를 사람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인간! 마, 만나서 반-가워요.]

한마디로 옷을 입은 녹색의 혓바닥이었다.

뚱뚱한 몸집에 맞지 않는 옷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고, 두툼한 뱃살과 군살은 찢어진 옷 사이로 추하게 삐져나와 있었다.

당연하지만, 대사형이 아니었다.

“…뉘신지.”

[아! 저는… 그러니까… 댁들 언어로, 어…….]

괴물이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팔락팔락 넘기더니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탕, 타, 타, 입니다아……!]

“…….”

내 기억으론 녹색 혀의 마왕의 이름이 그랬는데.

당연하지만, 동명이인은 아닐 거다.

내가 느낀 위압감은 이놈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실제로 꺼림칙하던 시선들은 이 괴물이 나온 직후 씻은 듯 사라졌다.

마왕이란 존재를 앞에 두고 나는 무수히 많은 의문을 느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루안 배드니커입니다.”

[그렇군요. 오, 오호호! 루, 루안…….]

탕타타는 떠듬떠듬 말하며, 품에서 걸레를 꺼냈다.

그리고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기분 나쁜 액체- 땀이라고도, 타액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걸 쓱쓱 닦았다.

어쩌면 걸레가 아니라 손수건일지도 모르겠다.

마왕은 단 두 명밖에 보지 못했지만, 아홉이라는 존재와는 인상이 천양지차였다.

물론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고.

통… 통…….

탕타타는 공을 혼자 차면서 놀았다.

뚱뚱한 몸집치고는 제법 잘 다뤘다.

손을 쓰지 않고 발, 무릎, 심지어 머리로 통통 튕기며 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뭡니까?”

일단은 신적인 존재라서 존댓말을 썼다.

내 예상대로라면 내가 반말을 하나 존댓말을 하나 큰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으, 으응? 제, 제 공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탕타타가 어쩐지 기쁜 듯이 웃으며, 나를 향해 공을 굴렸다.

[자, 자아……! 패, 패스……! 오호호…….]

데구르르…….

굴러온 공이 내 발부리에 닿아서 멈췄다.

“…….”

나는 후안의 텅 빈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한 겁니까?”

[네!]

“어째서죠? 이 인간은 당신의 하수인이었을 텐데…….”

[하, 하수인? 아, 아니에요! 그, 그는 저의… 어…….]

다시 한번 수첩을 꺼낸 탕타타가 팔락 넘기더니 말했다.

[동업자였어요!]

“동업자요?”

[아니면… 파트너……? 으, 으음. 대륙의 언어는… 너무 어렵다니까…….]

“…….”

[하여간 저는 그, 그 인간과… ‘거어래애’를 했습니다.]

“거래라니……. 댁과, 후안이?”

[네……! 저, 저는요… 대륙의 생명체들을 존경합니다……! 부, 부러워하고 있어요!]

탕타타는 거무죽죽한 걸레로 연신 땀을 닦으며 말했다.

[조, 좋지 않습니까? 인격체 간의… 존중과… 신뢰……! 그것이 성립되지 못하면 거래란… 결코 이뤄질 수 없지요……! 대, 대체 뭘 믿고 내 걸 상대에게 준단 말입니까? 호, 호호호…….]

“…….”

[거, 거래는… 좋은 시스템입니다……! 우리도… 본받아야 하는 시스템…….]

대화하기 적합한 상대는 아니다.

나는 혀를 차며 물었다.

“후안과 무슨 거래를 했습니까?”

[다, 단순해요……. 이, 이 인간은… 저를 즐겁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걸… 들어준다고 했지요……! 그 대가로 권능을 빌렸고-.]

탕타타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서… 전 최근에… 장난감이란 걸 알게 되고, 또 갖고 싶어져서… ‘후안 볼’을 만들게 됐죠…….]

“…….”

[루, 루안? 후안볼을 저한테, 패스해 주시겠어요?]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한숨만 쉬고 가만히 있으니 탕타타가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흐, 흐음……. 이 놀이가… 별로이신가 보군요……. 취, 취향은… 존중해야죠…….]

“여긴 어딥니까?”

[저, 저의 영지입니다……! 저, 저는 이곳을 도시라고 부르고… 이름도 붙였지요……!]

탕타타가 희극적으로 양손을 펼치며 외쳤다.

[헬즈하트……! 지옥의 유일한, 최대 규모의 도시……!]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유일한 도시라면 당연히 최대 규모인 게 아닌가요? 비교할 곳이 없잖아요.”

[쿨럭……!]

내 말에 탕타타는 헛기침을 격렬히 하더니, 말을 돌렸다.

[아, 안심하십시오……! 루안 배드니커… 당신들이 이 세상을… 지옥이라 부르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여긴, 이곳만큼은… 위험한 장소가 아닙니다……!]

“…….”

지옥의 도시라.

이쯤 되면 나도 헛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을 본 탕타타가 마주 웃었다.

이목구비가 좁쌀만 한 녀석이라 그 모습이 다소 역겹게 다가왔다.

[루, 루안 배드니커. 따라오시지요……! 저, 저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을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손님?”

[네에……! 손님……!]

탕타타가 웃었다.

언뜻 보인 입 구멍엔 톱날 같은 이빨이 무수히 돋아나 있었다.

“전 손님이 아닌데요.”

[네에……?]

“제가 만나려고 했던 건 무채색의 마왕이었습니다.”

[무, 채, 색… 어…….]

잠깐 골몰히 생각하던 탕타타가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웠다.

[아……! 그, 그랬군요……!]

“후안의 말에 의하면 목적지는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당신 구역으로 오게 된 겁니까?”

[그, 그것은… 후안이 착각한 것입니다……. 저한테 빌린 권능을 쓴 순간… 목적지는 이곳으로 고정됐으니까…….]

“…음.”

그랬던 건가.

내심 속이 쓸렸다.

결과적으로 무신의 말대로 된 것 같아서 기분도 좋지 않았고.

[그런데… 당신은 정말… 흥미로운 인간이군요…….]

탕타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인간이 나를 본다면… 둘 중 하나……. 허리를 숙이거나… 미치거나…일 텐데…….]

“…….”

[저, 저와… 대화할 수 있는 인간은… 처음입니다……. 오호호… 재, 재밌군요…….]

탕타타의 눈동자에서 호의가 느껴졌지만, 나는 떨떠름한 기분이 강했다.

마왕의 호의라니.

[어, 어떻습니까? 루안 배드니커……. 저, 저의 파트너가 되지 않겠습니까?]

“파트너?”

[네, 네에……. 아까 그 인간을 대신해서…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좋게 봐주시니 영광이네요. 파트너가 되면 무슨 일을 하게 되나요?”

[벼, 별거 없습니다. 그저 가끔 저를 재밌게 해주시면 되지요.]

“재밌게?”

[네……! 일전의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탕타타가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 사랑……! 저, 저는 그 감정을… 동경합니다……!]

“…….”

[그, 그 인간은… 무슨 병인가에 걸려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데……. 아……! 이, 인간이란 어찌나 나약한 생물인지…….]

탕타타가 과장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그 인간의… 심장을 달라고……. 그, 그때 인간이 보였던 표정이… 너, 너무 맛있어서……! 스읍, 시, 실례…….]

탕타타가 줄줄 흐르는 타액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제, 제가 심장을 요구하니 인간이 울부짖더군요……. 다, 다른 것이라면 뭐든 줄 수 있다던데… 그, 그럴 순 없죠. 워, 원래 값진 걸 잃었을 때의 표정이… 가장 재밌잖아요……?]

“…….”

[결과적으로… 저, 전의 인간은… 저를 자주 즐겁게 해줬습니다……. 주, 죽어서까지 말이죠…….]

나는 발치에 있는 후안을 보았다.

어쩌면, 의 얘기지만.

교단에 투신했을 당시만 해도… 후안이란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교인이 된 이유엔, 정말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한 결심이 깔려 있었을지도.

그럼 후안이 완전히 미치고, 제사장이 된 계기는 그 여자의 죽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단 한 명의 사내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나저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호, 호호… 뭐든 물어보시지요……! 저, 저는 파-트너가 궁금해하는 모든 걸… 성심성의껏 대답할… 의무가 있습니다……!]

탕타타가 손뼉까지 치며 말했다.

기꺼워하는 기색이라서 나도 편히 물을 수 있었다.

아직 발치에 있는 후안의 머리를 보며 묻는다.

“혹시 이 남자의 이름을 기억합니까?”

[네?]

탕타타가 좁쌀만 한 눈을 끔벅거렸다.

“공으로 만든 이 사람의 이름이요.”

[어어……. 글, 글쎄요…….]

나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안볼이니 뭐니, 역겨운 멸칭까지 붙였으면서, 이 존재는 벌써 후안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사실 이 탕타타란 악마가 내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도 가졌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대화도 성립하지 않을까?

후안을 공으로 만든 건 상식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었다.

감정이 있고, 말이 통한다고, 죄다 같은 인격체는 아니다.

사람과 악마란 태생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철혈공이 악마에게 가지는 무한한 증오가 조금 이해가 갔다.

‘그럼… 어떡할까.’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코인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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