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 자리에 넷째 사형을 소환하면 당장의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다.
마왕이 불가해의 괴물이라고 해도 내 생각은 변함없다.
물론 눈앞의 존재는 대사형과 동격의 괴물이고, 넷째 사형은 대사형의 무위를 천외천으로 비유했지만… 글쎄.
넷째 사형은 사형제 중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서, 꺼낸 말을 죄다 믿는 것은 좀 그렇다.
그러니 죽을 위기를 배제하고 보면…….
어쩌면 난 보기 드문 기회를 얻은 걸지도 모른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마왕이란 존재와 소통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마왕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교단 놈들조차, 매 강림 의식마다 목숨을 거는 게 그 증거다.
나는 다시 탕타타를 보았다.
[음……. 아, 아무래도 저의 제안이 달갑지 않으신가 보군요.]
탕타타가 난감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잘 보이기 위해 아첨이라도 떨어야 할까? 문득 든 생각을 즉각 부정했다.
어쩐지 사람의 잣대로 이 괴물의 비위를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먹혔다면 후안이 죽지도 않았겠지.
‘만만하게 생긴 놈일수록 조심해야지.’
우스꽝스러운 생김새와 어눌한 말투에 속으면 안 된다.
어쩌면 탕타타야말로 가장 위험한 마왕일지도 모른다.
[어, 어쩔 수 없군요. 오호호……. 저, 저마다 겨언해애의 차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는 탕타타를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파트너는 됐고… 대신 거래는 어떻습니까?”
관점을 한번 바꿔 봤다.
거래는 대화와는 또 다르다.
반드시 상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득실로만 판단하면 되니까.
어쩌면 앙신과 교단의 관계 또한 그러한 계산으로 성립한 걸지도 모른다.
[거어래애요……?]
“놀잇감이 부족하신 것 같은데, 제가 좀 즐겁게 해드리죠.”
[호, 호호호……!]
탕타타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리고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조, 좋아요……! 그, 그럼… 저랑 술래잡기를 하지요……!]
술래잡기?
[그, 그럼 시이이이작……!]
파앙!
탕타타가 손뼉을 끊어 친 다음, 즉시 내게 손을 뻗었다.
“……!”
투실투실한 손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분명 회피에 성공했는데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오, 오호호……!]
탕타타가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손을 연속적으로 뻗었다.
일순 스승님의 금나수擒拿手가 떠올랐는데, 실제로 그때 느꼈던 것과 대등한 긴장감을 느껴야만 했다.
한 번이라도 붙잡히면 뼈와 살이 분리될 것 같다는, 그런 긴장감 말이다.
‘뭔 움직임이-.’
탕타타의 동작 자체는 빠르지 않다.
비대한 몸집에 비하면 잽싼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공격을 한번 느낄 때마다 체력과 정신력이 뭉텅뭉텅 깎여 나갔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부담감은 탕타타가 가진 특이한 분위기 때문일까?
심지어 이놈은 그런 분위기를 의도조차 않고 내뿜는 걸로 보였다.
[오호호호……! 자, 잘 피하는군요! 그,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탕타타의 녹색 빛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나는 이번에도 정색했다.
젤리 같은 낯짝에 타액인지 땀인지 모를 게 송골송골 맺힌 순간.
[오호호호호호홋-!]
촤아아아아악!
탕타타가 미친놈처럼 머리를 풍차 돌리듯 돌렸다.
“……!”
그 반동으로 붉은 체액이 사방으로 튀겼다.
뭔지는 모르지만, 한 방울이라도 맞으면 위험하다.
나는 급히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치이이이이익-!
체액에 닿은 주변 사물은 그대로 부식됐다. 후안이 다루던 녹색 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산성이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회피는 정확한 판단이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나 보다.
휘청-.
분명 한 방울도 맞지 않았는데, 나는 순간적인 현기증과 함께 육체가 굼떠지는 걸 느꼈다.
‘설마?’
부식하면서 발생한 독연毒煙 때문인가?
깨닫는 즉시 호흡을 중단했지만, 이미 살짝 마신 건 별수 없었다.
[오, 오호호……! 이제 못 도망……!]
꽈앙!
[……?]
탕타타의 얼굴에 화륜을 먹인다.
말하다 말고 불을 뒤집어쓴 탕타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 으응……? 지금은 제가 술래인데……?]
“술래를 공격해선 안 된다는 룰이 있었던가요.”
[어…….]
잠깐 생각하던 탕타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따, 딱히 정하지는 않았군요……?]
나는 탕타타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이, 단전의 내공을 폭발시켰다.
으드득!
어금니에 금이 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힘을 주며, 전신 기경팔맥에 열기가 치달리도록 진기를 운용한다.
화르륵!
체내에 있던 독연은 불에 닿은 것처럼 순식간에 녹았다.
물론 상태가 더 악화되는 걸 막은 것뿐이고, 둔해진 육체 능력까지 되살리는 건 무리였다.
나는 때마침 들이닥친 탕타타의 공격을 뇌천보로 피했다.
‘직접 공격해도 되려나?’
탕타타가 흩뿌린 부식액은, 이 녀석의 기름진 얼굴에 좔좔 흐르고 있다.
직접 접촉하기엔 어쩐지 껄끄럽다.
그럼 남은 수단은 옷 너머를 공격한다거나, 아니면 역시 칠죄검으로 대응을-.
‘…주먹에 강기를 두르면.’
솔직히 어떻게 될지 결과를 모르겠다.
먹힐지, 먹히지 않을지 완전히 미지수란 뜻이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회귀 전 만난 마왕이 아홉이 아니라 탕타타였다면, 회피가 아닌 방어 쪽을 단련했을 것 같다고.
[호, 호, 호……!]
그때 이 녹색 돼지가 다시 움직였다.
투실투실한 손바닥으로 손뼉을 치기 시작한 건데, 평범한 박수가 아니었다.
짝! 짝!
갈채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귓전이 찢겨 나가는 것 같다.
웅웅거리는 이명 너머로 탕타타의 희희낙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너무 재밌어……!]
‘썩을 놈…….’
나는 욕지거리를 속으로만 삼키며 뇌천보를 재차 밟으려 했지만, 순간 발이 엉켜서 넘어질 뻔했다.
갈채가 퍼질 때마다 공기를 깨부수듯 충격파가 번졌는데 그 때문인 듯하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다.
나는 뇌천보를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절벽에서도 자유자재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고작 박수의 여파에 막힌 것이다.
‘마왕의 권능…….’
저 힘엔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걸까?
단순히 몸과 정신을 갈고닦는다고 해법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역시 가호밖에 없나?’
내 가호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이건 단련할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이 아니다.
연마한다고 해서 악기에 대한 내성이 올라갈 것 같지도 않다.
[마, 망가지지 마요……! 망가지지 말라고오오-!]
헛소리를 늘어놓던 탕타타는, 이제 거의 발작이라도 하듯 주변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미 수준 차이는 절감하고 있는 상황.
아마 저놈이 작정하고 나를 죽이려 들었다면, 나는 삽시간에 죽음을 맞이했을 거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현 상황을 받아들이니,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럼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놈이 이걸 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리고 모든 놀이엔 규칙이 있다.
탕타타가 지키고 있는 규칙은 무엇일까?
나는 탕타타의 주변을 빠르게 질주하며 녹색의 비대한 몸뚱이를 관찰했고, 어렵지 않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움직이지 않고 있구만.’
탕타타 나름대로 지키고 있는 룰인 걸까?
그러고 보니 처음 손을 뻗었을 때도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화르륵!
나는 뇌천보 대신 염염질주를 사용했다.
사방팔방에 화기를 흩뿌리며 내달린다.
달리는 경로는 단순했는데, 탕타타를 중심으로 쳇바퀴를 굴리듯 빙빙 도는 것.
[호호호호……!]
탕타타는 건물이 타오르는데도 여전히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후우우…….”
독연이 매연과 뒤섞인 시점에서 나는 다시 호흡을 재개했다.
암녹빛 도시는 이제 불길에 휩싸인 채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염염질주에서 보법, 뇌천보로 움직임을 바꿨다.
파지직!
발걸음에 짧은 전류가 흐른 순간, 한 가지 깨달았다.
‘의외로 상성이 좋은데?’
염염질주에서 뇌천보로의 전환이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연계기였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어쩐지…….
염염질주에서 뇌천보로 전환하는 것보다.
뇌천보에서 염염질주로 전환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게 전개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뛰다 걷는 것보단, 걷다 뛰는 게 더 자연스러운 행위라서 그런 것일까?
살짝 느낌이 다르다.
번개에서 파생된 뇌천보.
불꽃에서 파생된 백일식.
이건 내 느낌이지만, 번개보단 불꽃이 더 포괄적인 개념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염염질주가 뇌천보를 ‘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 생각은 그렇다.
번쩍!
뜻밖의 순간에 찾아온 영감을 즉시 행동으로 펼쳤다.
나는 뇌천보를 밟으며 탕타타와 거리를 좁혔고, 두 발자국 간격에서 납검했다.
부식액은 여전히 꺼림칙하지만, 지금 머릿속을 스친 단상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파파팟.
뇌천보를 밟으며 내지른 주먹은, 분명히 백일식의 제일초식인 작열의 형태였지만 그 위력은 일전과 달랐다.
백일식白日式 번외초식番外招式.
뇌권雷拳.
꽈르릉!
주먹이 꽂힌 순간, 탕타타의 얼굴이 풍선처럼 터졌다.
“네?”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성과에 나도 잠시 머리가 멈췄다.
나는 급히 탕타타로부터 물러선 다음, 추이를 지켜보았는데…….
[…….]
탕타타의 몸뚱이는 얼굴이 없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얼굴이 사라졌지만, 죽였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뚱뚱한 몸뚱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휙!
그때 탕타타의 몸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돌더니 이리저리 제스처를 취했다.
[……! ……!]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모양새다.
잠시 기다리니, 목 밑에서 폭포처럼 녹색 살덩이가 부글부글 치솟았다.
[호, 호호호……!]
그리고 탕타타의 얼굴이 재생했다.
“…….”
살면서 기상천외한 광경은 많이 봤다고 자부하지만, 얼굴까지 재생하는 광경은 처음이라 턱이 툭 떨어졌다.
[바, 방금 그건 재, 재밌었습니다……! 짜릿했어요! 호호호호……! 그, 그럼… 저도 재밌게 해줘야겠지요……?]
탕타타의 어조가 살짝 낮아진 순간이다.
‘조졌다.’
이건 더 잴 상황이 아니다.
즉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코인을 꺼내려는 순간.
콰지지지지지지직-!
하늘에서 길쭉한 창 한 자루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창은 엄청난 굉음과 함께 탕타타를 가루로 만들었다.
바람과 번개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내가 피운 불길을 일순에 잠재웠다.
파지직-.
‘저 창은…….’
나는 전류가 휘감겨 있는 창을 보았다.
풍뢰극風雷戟.
천둥과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신기.
나는.
이 창의 주인을 알고 있다.
그 순간 검은 형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소리 없는 착지를 마쳤다.
오래된 고목을 연상케 하는 특유의 분위기는 지옥의 칙칙한 풍경 속에서도 여전했다.
스승님 다음으로 내게 깊은 족적을 남긴 무인은, 아직도 전류가 튀고 있는 풍뢰극을 맨손으로 잡았다.
“…….”
대사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