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대사형이 사용하는 기보奇寶는 세 자루다.
바람과 번개를 지배하는 풍뢰극風雷戟.
진합일眞合一의 이치를 품었다는 음양도陰陽刀,
마지막으로 천하에 베지 못할 게 없다는 단목검斷木劍.
평소 내가 기억하던 대사형의 차림새란.
폭이 넓은 잿빛 무복.
대충 묶은 머리카락과 소탈한 인상.
그리고 그 모든 것과 매치되지 않는, 흉악한 세 자루의 기보를 등에 교차시키듯 묶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도검刀劍 두 자루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외의 차림새는 기억 속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머리카락이 전보다 좀 길어진 것 같기는 하다.
“…대사-.”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다.
소름이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녹색 바람이 휘몰아쳤다.
기류의 중심에서 동그란 공 같은 게 뭉치기 시작하더니, 다시금 탕타타의 형상을 갖췄다.
[오호호호……!]
저 새끼는 대체 어떻게 해야 죽는 걸까.
풍뢰극에 직격을 맞고서도 멀쩡히 부활하는 모습은 나로서도 충격적이었다.
[스테에에엘라……!]
순간 악마어인가 뭔가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조금 다르다.
스텔라…….
사형의 또 다른 이름인가?
[저, 저의 영역엔, 무슨 일이시지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왜 내 손님을 가로챈 거지.”
[손, 손님이요?]
탕타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사형은 전에 없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시답잖은 연기는 내 앞에서 안 해도 돼. 나를 속인 대가는 방금의 공격으로 칠 테니까.”
[호, 호호호…….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 인간은 내가 데려가겠다. 이의 있나?”
[그, 그럴 리가요……! 다, 당신과 싸울 만큼… 제가 담-대하지는 않습니다……. 오, 오호호호…….]
탕타타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조, 좋은 시간 되시길……! 뿅……!]
그리고 탕타타가 그대로 점프하더니 음울한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어…….”
등장만큼이나 임팩트 있는 퇴장이었다.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는데, 대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오겠어?”
대사형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어조만큼은 부드러웠다.
기억 속 그대로의 목소리.
나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대사형은 골목길에 있던 수많은 건물 중 한 곳으로 들어섰다.
비틀린 건물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는데, 단순히 가구만 없는 게 아니라 벽지도 없고 바닥은 맨땅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야말로 속 빈 과실, 오히려 골목길이 더 깔끔해 보일 지경이다.
‘겉만 신경 쓴 건가.’
탕타타는 이곳을 도시니 어쩌니 떠들었지만, 조금만 파고들어도 실속 따위 없는 껍데기란 걸 알 수 있었다.
“…….”
먼저 들어선 사형은 내게 등을 돌린 채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곧바로 돌아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내게 보이기 싫은 건 아닐까.
평소라면 이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직설적으로 물어봤을 테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나도 쉽게 입을 떼기 힘들었다.
“고금제일공의 이 단계에 이르렀구나.”
갑자기 무공 얘기라니.
“연마한 세월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취야. 축하해.”
“…고맙습니다.”
나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대답했다.
그제야 대사형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탕타타는.”
“…….”
“위험한 마왕이야.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위험하지 않은 마왕은 없지만, 저자는 특히 더 악질이지. 방금 네가 목격했던 탕타타의 모습은 모두 거짓으로 보는 게 맞다.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와 대화하고 심지어 ‘놀이’까지 한 건 위험한 일이었어.”
“조언인가요?”
대사형은 내 물음에 입을 닫았다.
건조한 시선이 낡은 창틀 너머로 닿았다.
보기만 해도 눈 아픈 지옥의 풍경이었지만, 대사형의 얼굴을 뒤덮은 피로는 그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지쳐 보였다.
나는 문득 대사형이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일지 궁금해졌다.
“네가 올 걸 알고 있었어.”
“…….”
“설마 이렇게 빨리, 심지어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러모로 네겐 아직 이른 장소야.”
“그런 것 같더군요.”
“백노광이 네게 말해 준 시간이 있을 텐데.”
그 순간 나는 대사형을 노려봤다.
대사형은 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더니 말했다.
“뭐라고 했지?”
“…10년 뒤의 재회를 입에 담으셨습니다.”
“그 말대로야. 지금의 넌 나를 죽이기에 아직 10년은 일러.”
“죽이다뇨?”
“백노광이 나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나?”
“스승님께선… 대사형을 잡아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에 대사형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희미한 변화였지만, 내포된 감정의 양은 적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약간의 동요뿐이었지만 말이다.
“…이번 만남은 없던 걸로 치마.”
대사형이 피로를 털 듯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엔 너 자신의 힘만으로 직접 찾아오면 좋겠구나.”
“어디로 말입니까?”
“영산.”
“네?”
대사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주껏 알아보란 뜻이군요. 좋습니다. 대신 다른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말해.”
“얼마나 죽였습니까?”
대사형은 금방 대꾸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
“그리고 앞으로 그 이상을 죽이게 될 거야.”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
대사형이 처음으로 웃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는 조소에 가까웠는데, 개인적으로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웃음은 아니었다.
“반대로 물으마. 내가 여기서 타당한 이유를 말한다면 넌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
“그게 무슨…….”
“못 그러겠지. 너는 백노광의 말만을 믿고, 따를 거야. 내가 한 말을 이유가 아닌 변명으로 받아들이고.”
대사형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털었다.
“…미안. 탓하려는 건 아니야.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너희는 이미 백노광을 불가침의 존재로 여기고 있어. 마치…….”
대사형이 강조해서 말했다.
“마치 그 사람이 무武의 신神이라도 되는 것처럼.”
“…….”
“그 사실이 변치 않는 한 나도 너희에게 할 얘기는 없어.”
“확실히 변하셨군요.”
나는 대사형을 보며 말했다.
“제가 아는 대사형은 이렇게 단정 짓는 말투를 쓰지 않았는데.”
“뭐?”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냐고요? 당연히 그러겠죠. 스승님을 존경하는 것과 별개로 제겐 저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걸 긍정하는 건 아니에요.”
애초에 이건 스승님이 내게 준 가르침이기도 했다.
대사형에게도 분명 같은 가르침을 줬을 터.
그래서 나는 대사형이 직접 사문을 나서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고 여겼는데…….
대사형이 나를 봤다.
계속 눈을 마주쳤지만, 나는 이 순간에서야 처음으로 시선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흐흐.”
대사형이 맥없는 웃음을 흘린 순간, 나는 영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나서 반가웠다, 루안.”
“네?”
직후, 나는 내 몸이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본능적인 감각이었는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당장이라도 육체가 이곳을 떠날 것 같은 느낌.
‘이게 무신이 말한 태초의 규칙이라는 놈인가?’
대사형도 그걸 깨달았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하루야.”
뜬금없는 자기소개였지만, 나는 그 진의를 깨달았다.
“예.”
깨달았지만…….
“…조만간 다시 봅시다, 대사형.”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아서 외면했다.
이번에는 이렇게 넘어가겠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더는 피할 수 없겠지.
내 입으로 똑똑히 불러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대사형이 아닌-.
하루라고.
* * *
째재잭-.
숲새 소리와 풀 내음, 조금 축축한 지면의 감촉.
나는 지옥에선 느낄 수 없는 감각을 만끽했다.
서늘한 바람 너머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하다.
잠깐만 이대로 좀 누워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럴까.’
나는 그대로 눈을 뜨지 않고 한동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방금 있었던 만남을 곱씹었다.
대사형이 스승님을 이름 석 자로 부르고, 스스로도 더 이상 대사형이라 불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면…….
파문을 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 결과부터 말하자면 첫째는 파문했다.
- 정확히는 제 발로 나갔지.
나는 그제야 스승님이 하셨던 말씀도 이해가 갔다.
마침내 직접 대사형과 재회했지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대사형은 분명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하루 사형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미소를 짓지 않게 됐고, 말투가 많이 건조해졌지만.
충동적으로 지옥까지 떨어진 나를 책망하는 그 말투는, 분명 내가 기억하던 대사형이었다.
“으음…….”
영산으로 오라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다시 한번 가호를 발동하라는 뜻인가?
“부족해. 너무 부족해.”
여러 의미에서 정보가 너무 부족하고.
힘 또한 부족하다.
영산에서 얻은 성과가 적지 않은데도, 강함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는 느낌이다.
이제야 비로소 강호에 입문했다는 스승님의 말씀도 떠올랐다.
“…슬슬 일어날까.”
머리는 무겁지만, 몸은 가뿐하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숨을 크게 내뱉었다.
“푸후우우우…….”
찬찬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부쩍 고요한 대낮의 공터가 보였다.
나는 사방에 새겨진 전투의 흔적을 보고, 이곳이 내가 후안과 함께 사라졌던 장소임을 깨달았다.
떠났던 장소에 그대로 귀환한 것이다.
날이 밝았다는 건 벌써 하루가 지났다는 뜻.
사실 체감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리 적은 시간도 아니었던 것 같다.
휘오오오-.
“어우, 추워.”
몸이 으슬으슬하다.
탕타타와 염병할 술래잡기를 하며 수련복이 많이 찢어졌는데, 아무래도 한겨울의 바람을 맞기엔 시원찮은 꼴이다.
나는 후딱 숲을 가로질렀고, 금방 캠프로 돌아왔다.
지옥의 비틀린 건물을 보다 와서 그런지, 허름한 영도 동마저 깔끔해 보였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별일 없었겠지?
결과적으로 후안은 죽었으니, 마왕 강림 의식 또한 성공적으로 무마됐을 터.
‘…….’
후안을 생각하니 복잡한 심정이 됐다.
동정하는 건 아니다.
후안은 대학살을 주모했고 그 대가를 치렀다.
그것과 별개로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마왕에게 죽는 최후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후안의 최후는 결국 마왕이 장식하는 걸로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걸까?
운명론 따위는 믿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
“아오. 머리 아파…….”
일단은 좀 쉬고 싶다.
물론 칼자크나 주니앙을 만나서, 별일 없었다는 확언부터 들어야겠지만.
‘그나저나…….’
캠프가 이상하게 조용한데?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의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다른 영도 녀석들이나 한번 볼까?
‘아니지.’
이 시간이면 이미 2차 특별 시험 때문에 숲에 투입됐을 거다.
그렇다면 캠프가 조용한 곳도 이해가 갔다.
교관의 수라고 해봤자 영도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니까.
“음?”
“어.”
그러다 교관 기사 한 명과 만났다.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 품행부터 단정히 했다.
지금의 나는 아직 의무실에 입원하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을 테니, 여기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거다.
그것과 별개로 후줄근한 겉모습과 멋대로 돌아다닌 점을 책망하면 할 말 없지만.
“잠깐 바람 좀 쐴 겸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금방 의무실로 복귀-.”
“루안… 도련님?”
도련님?
아직 수련회 중인데.
“루안 영도인데…….”
“루, 루, 루…….”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던 기사가 갑자기 부릅뜬 눈으로 외쳤다.
“루안 도련님이다아──!”
“…뭔데?”
반응이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