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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14화 (114/172)

114화

의무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좀 큰데.”

이놈의 수련복은 어째 크거나 작은 것밖에 없는 걸까.

그래도 작은 것보단 큰 게 낫긴 하다.

단추나 끈으로 조일 수라도 있으니.

영도 중에선 카리스 녀석이 유난히 작은 옷을 입었는데, 특히 하체 쪽이 꽉 껴서 얼마나 추하던지.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갈게.”

“네.”

벌컥, 문을 열고 주니앙이 등장했다.

뭘 숨기랴.

구름같이 몰려들던 기사를 물린 게 바로 우리의 교의선생- 주니앙이 되시겠다.

“…….”

주니앙은 대단히 복잡한 얼굴로 날 봤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품을 더듬더니 연초를 하나 꺼낸다.

치익-.

“후우…….”

주니앙이 연기를 뿜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루안 배드니커. 맞지?”

“당연하죠. 갑자기 왜 이래요? 바로 어제 봤으면서.”

“바로 어제.”

주니앙이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면 바보 연기라도 하는 건가.”

“무슨-.”

주니앙은 내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툭 말했다.

“오늘은 수련회 마지막 주 차야.”

“네?”

“네가 행방불명된 지 벌써 4주나 지났다고.”

뭐요?

* * *

대략적인 상황을 들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그날 밤- 전투에서 강제로 이탈했던 칼자크는 곧 주니앙, 루크를 대동한 채 공터로 돌아왔지만…….

그곳엔 전투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고 인기척은 없었단다.

사실 어두운 숲에서 실종자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이튿날 특별 시험까지 미룬 채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펼쳤으나-.

당연하게도 나와 후안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고.

무려 사흘 동안, 캠프 전역을 뒤졌음에도 말이다.

“참고로 도검선생은 아직도 찾고 있어. 교관 업무가 없을 때는 계속 나가더라.”

“음.”

나한테 죄책감이라도 갖게 된 걸까?

사실 당연한 일이다.

후안과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잘 짜놓은 계획이 망가진 건 칼자크의 독자적 판단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칼자크 말고 다른 놈이 이 사달을 냈으면 가서 머리를 쥐어박았을 거다.

‘산맥에서 목숨 빚을 졌으니, 한 번은 뭐.’

그때 주니앙이 말했다.

“그러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서 나가 보니 기사에게 둘러싸인 네가 있었던 거지. 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한담.

막연한 느낌을 받으며 가만히 있으니, 주니앙의 기색이 살짝 바뀌었다.

“…교단의 사술 중엔 멀쩡한 인간의 몸뚱이를 뺏는 것도 있지. 가호가 있는 사람에겐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이 의심도 오랜만이구만.

“오해가 심하십니다. 알았어요. 말할게요.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

주니앙의 성격은 아마 기본적으로 냉정, 침착이겠지만.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의심과 의혹으로 시작했던 낯짝에 점차 놀라움이 번지더니 당황, 이윽고 경악으로.

“…지옥으로 갔다고? 그리고 거기서 마왕을 만났고?”

“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지?”

“미친 얘기 같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하아아…….”

나는 털썩 의자에 앉은 채 얼굴을 감싸 쥔 주니앙을 위로했다.

“알아요. 선뜻 믿기 힘드신 거. 이럴 줄 알았으면 지옥에 있는 돌멩이라도 하나 주워 올-.”

“안 믿기도 어려운 상황이야.”

주니앙이 손가락 사이로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

“도검선생이 말했어. 제사장과 네가 정면 대결하는 걸 보았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납득… 나, 납득을…….”

겨우 납득하려던 주니앙이 나를 보며 외쳤다.

“아니, 시발! 그래도 마왕은 너무 갔잖아!”

“인정합니다.”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직 사제인 주니앙으로선 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나도 다른 영도한테 이 얘기를 들었으면 지랄 노라고 말했을 거다.

“마왕이라니……. 본교의 주교급도 본 적 없을 텐데…….”

“음…….”

“하지만… 그래. 지옥에 간 것까진 믿을 수 있어. 다른 차원으로 간 거라면 그렇게 뒤졌는데도 네 시체조차 못 찾은 점, 몇 주나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까지 모두 설명이 되니까.”

“그래요. 전 거짓말 안 해요.”

“그건 거짓말이군.”

헉.

“상황은 알겠어. 말하는 게 늦었지만…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루안 배드니커.”

“별말씀을. 그보다 후안에 관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분위기를 보니 공표하진 않은 듯한데.”

“일단 그렇게 됐어. 제사장이 개입한 게 확실시되면 수련회건 뭐건 그냥 엎어지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라더라.”

“누가요.”

“아사드 님이.”

과연.

대마법사쯤 되는 양반의 말이니, 주니앙도 그냥 수긍한 듯하다.

“그러니까 아마 이 일은 그냥 불문에 부쳐질 확률이 높은데…….”

주니앙은 왠지 모르게 불만 섞인 표정을 짓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화 안 나나?”

“무슨 화요?”

“제사장은 실질적으로 너 혼자 죽인 거나 다름없어. 얘기를 들으니 도검선생, 그 양반은 민폐만 끼쳤구만, 뭐.”

그렇긴 해.

“네 나이에 제사장을 죽인 건 왕년의 철혈공조차 이루지 못한 업적이야. 이 일이 알려지면 네 오명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질걸? 차기 가주 자리도 꿈이 아니야.”

“둘 다 관심 없네요.”

진심으로 그랬다.

대사형에 관한 걸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가주는 개뿔이.

“…겸손하군. 어둠 속에서 묵묵히 뒤처리하는 걸로 만족한다는 건가?”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루안 배드니커. 쭉 봤지만 역시 네겐 동질감이 느껴져. 어때? 이단심문관이 되지 않겠-.”

“괜찮습니다.”

“…그래.”

주니앙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우선 넌 본가로 돌아가게 될 거야.”

“네? 지금요?”

“듣기로 가문에선 네 장례 절차까지 밟고 있다던데? 빨리 안 돌아가면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 될걸?”

그럴 수가.

“그리고 원로회한테도 사정을 설명해야겠지.”

“으음…….”

이미 이 가문의 원로회에겐 좋은 감정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참작의 여지가 있는 철혈공이나 아사드와 달리 말이다.

“그럼 수련회는요?”

“뭔 수련회.”

“마지막 주라면서요? 아직 수련회가 안 끝났는데, 이대로 이탈하면 저 수료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수료가 문제야? 그리고 어차피 넌 이대로 버텨도 수료 못 해.”

“왜죠.”

“4주 넘게 사라졌는데, 꼴랑 첫 주 차랑 마지막 주 차만 출석하고 수료하시겠다? 배드니커가 동네 무관도 아니고, 어림도 없지.”

“…….”

그러고 보니 수료를 하려면 이외에도 각 과목에서 5점씩, 총합 20점을 획득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시간만으로 부딪치기는 어렵다는 뜻인데.

“어떻게 안 됩니까? 저 수료 꼭 받아야 하는데.”

“왜.”

“가주님의 명입니다.”

“으, 으음… 철혈공의…….”

철혈공의 이름에 주니앙이 살짝 당황하더니, 미간을 모으며 고민해 줬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뭐죠?”

“포인트 순위 3등 안에만 들면 돼. 그럼 출석 일수나 과목 점수 따위는 문제가 안 되지.”

나는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혹시 전체 점수표 볼 수 있어요?”

“영도 동 1층에 게시돼 있을 거야. 가서 확인하든가.”

“그럴까요.”

나는 주니앙과 함께 영도 동 1층으로 향한 다음, 그곳에 있는 게시판을 눈에 담았다.

[1위. 카론 우드잭 102점.

2위. 제로스 실베르 67점.

3위. 헥토르 배드니커 65점.

4위. 신바 51점.

5위. 세렌 굿스프링 49점.]

“오호…….”

일단 압도적인 성적으로 카론이 독주 중이었고.

2위와의 격차를 바짝 좁힌 헥토르, 5위권 안에 든 세렌이 눈에 띄었다.

본 김에 신경 쓰이는 다른 녀석들의 점수도 확인했다.

[9위. 에반 헬빈 39점.]

[22위. 미르 자이언트. 27점.]

그리고 대망의 내 점수는…….

[34위. 루안 배드니커 14점.]

“엥? 마지막으로 봤을 땐 17점이었는데.”

돌려줘요, 하는 시선을 담아서 주니앙을 보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뭔가 싶었는데 수첩이었다.

촤락-.

“루안 배드니커……. 제로스 실베르와 거래 내역이 있는데? 3점으로 정보를 샀다고.”

“앗.”

그걸 깜박했네.

“그나저나… 점수가 저렇게 낮은데도 꼴찌는 아니네요.”

“총원이 37명인데 거의 꼴찌지.”

“37명?”

“네가 없을 때 두 명 죽었어.”

“아…….”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약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러고 보니 마왕의 강림 의식을 막는다고 해도, 이 수련회 자체가 지닌 위험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20퍼센트의 사망률은 여전한 것이다.

“표정이 왜 그래? 역대급으로 적게 죽은 건데.”

“누구 죽은 소식 듣고 웃을 순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번 기수는 사망자가 엄청 적은 편이야. 다들 우수했거든.”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이른 판단 아닙니까?”

그러자 주니앙이 고개를 저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더 이상 죽을 확률은 아주 낮아. 보통 사망자들은 초반 적응 기간인 1~2주 차 때 쏟아지거든.”

“그렇군요.”

“아무튼 얘기를 되돌려서… 지금 네가 3위를 노리려면 최소 51점은 따야 해.”

“…….”

망했구만.

아무리 마지막 특별 시험이라고 해도 저 정도 점수를 한 번에 퍼줄 것 같지는 않다.

형평성에 너무 어긋나니까.

“하지만 마지막 특별 시험이라면… 어떻게 잘하면 가능할지도.”

역시 배드니커.

믿고 있었다고.

“물론 참가 여부는 다른 교관들이랑 회의를 해봐야 견적이 나올 것 같기는 한데-.”

주니앙이 힐끗 나를 보며 물었다.

“진짜 할 거야? 솔직히 많이 어려울 거야. 도중에 참가하는 만큼 페널티도 많을 거고,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죽을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특별 시험에 대한 설명을 안 들었네요. 어떤 방식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조별 서바이벌이야. 시작한 건 나흘 전이고, 총 일주일 동안 진행되지.”

나흘 전에 시작했고 일주일이면… 이제 사흘 남은 셈인가?

“그럼 마지막 주 차는 아예 이 특별 시험으로만 꽉 채워져 있는 거군요?”

“맞아. 여태껏 수련회에서 배운 걸 총동원해야 할걸. 사냥과 생존, 이론적인 지식, 무기술, 가호까지 싹 다.”

“아하.”

“잠깐 있어 봐.”

주니앙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보여 줬다.

동그랗게 생긴 빨간색 공이었다.

“뭐죠?”

“공. 이게 포인트야. 빨주노초파남보 공이 있고, 각각 1점, 3점, 5점, 10점, 15점, 20점, 25점의 점수를 갖고 있어. 즉 이건 1점짜리 공이지.”

통, 주니앙이 공을 던졌다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공이 숲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당연히 높은 점수를 가진 공일수록 쉽게 손에 넣기 어려워. 참고로 소지할 수 있는 공은 3개가 최대야.”

“오… 즉 보라색 공 3개를 모으면…….”

“총 75점.”

주니앙이 말했다.

“1등은 불가능해도, 2등까지는 충분히 가능해. 물론 2, 3등이 손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지만.”

나는 다시 순위표를 보며 물었다.

“이미 공을 가진 놈한테서 뺏어도 돼요?”

“물론이야. 이 안에선 서로 죽이는 것 빼곤 모든 게 허용돼.”

그건 2차 시험과 같구만.

“만약 참가한다면 넌 이번 시험을 혼자서 치러야 해. 이미 시험이 시작됐는데 다른 조에 편입할 수는 없잖아? 별개로 다른 녀석들은 합동으로 움직일 거고.”

주니앙이 설명을 이어 갔다.

“시험이 시작되고 이미 며칠이나 지났으니 조끼리 연합을 맺은 녀석들도 분명 있겠지. 공을 독식한 놈들한테 반격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 녀석들이 갑자기 끼어든 네 존재를 반길까? 수련회에서 엄청 우수한 퍼포먼스를 보였던 것도 아니고.”

“…….”

“뭐… 제사장과 한판 벌인 게 사실이라면 괜한 걱정이겠지만.”

주니앙은 아직 내 실력에 반신반의하고 있는 듯했지만, 별 상관은 없다.

“딱 좋네요.”

“뭐가?”

나는 굳이 속내를 밝히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심정이 많이 유치했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싸우고, 마왕과 만나고, 대사형과 재회했다.

결과적으로 잘 풀리긴 했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나는 제사장을 압도하지 못했고.

마왕에겐 철저히 농락당했다.

솔직히 대사형이 중간에 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대사형의 말에 따르면 탕타타 그놈은 날 갖고 논 거나 다름없는 것 같으니까…….

나름 영산에서 열심히 수련해서, 성취를 얻은 다음 복귀했는데 이렇게 농락당하니, 뭐랄까.

나의 델리케이트한 마음에 깊은 상흔이 새겨졌달까.

요약하면 지금의 나는…….

화풀이가 아주,

격렬히,

절실하게,

마렵다.

‘카론……! 헥토르……!’

내 욕구를 해소해 줄 두 친구를 떠올리며, 나는 애타는 심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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