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주니앙은 특별 시험 편입에 관한 회의를 하러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 웬만하면 허락해 줄 거야. 아니면 하루 정도 쉬고 내일 시작해도 되고.”
“괜찮아요.”
사실 몸이 완전히 제 컨디션은 아니지만, 큰 상관은 없을 것 같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아. 잠깐만요.”
나는 막 떠나려는 주니앙을 붙잡았다.
“에인즈번 교관, 아직 있습니까?”
“법학선생? 그 작자는 왜?”
어쩐지 말투에 좀 날이 섰다.
나는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물었다.
“후안과 싸우며 캐낸 정보가 있어요. 아마 그놈도 교인, 최소한 밀고자일 겁니다.”
“과연……. 역시 그랬었나.”
“……?”
주니앙은 뜻밖에도 내 말에 곧바로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너와 후안이 사라지고 말이야. 그 인간, 갑자기 몸이 아프다면서 퇴소를 요구했거든. 제 발이 저렸던 거겠지.”
“아… 그럼 이미 도망쳤어요?”
“캠프는 떠났어.”
주니앙이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배드니커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 그자는 숲 입구에 있는 검문소에 붙들려 있을 거야.”
“오……. 교관도 도중 이탈이 웬만해선 용납되지 않나 보네요?”
“맞아.”
역시 배드니커.
교관도, 영도도 규칙 아래엔 평등하다.
“그자는 내가 심문하지.”
현 이단심문관의 심문이라니.
나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시는 김에, 다른 쥐새끼가 있는지도 같이 조사할 수 있을까요?”
“전에 조사했을 땐 딱히 성과는 없었지만……. 에인즈번을 잘 써먹으면 흔들 수 있을 것 같네. 좋아.”
주니앙이 손을 흔들며 떠났고.
나는 기다리는 동안 영도 동의 뒤뜰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칠죄검을 꺼낸 다음, 검날을 손으로 스윽 훑었다.
‘…무신님?’
[말하게.]
기다렸다는 듯 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 탓인지, 어쩐지 퉁명스러운 기색이었다.
‘혹시 화나셨습니까?’
[화? 내가?]
헛웃음을 흘리던 무신이 정색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연자가 코흘리개 아해도 아니고, 조언을 받고 말고는 본인의 선택이지. 열다섯이면 예나 지금이나 능히 홀로서기 할 나이니까.]
‘…….’
화났구만 뭐.
[결과적으로 멀쩡히 현세로 돌아왔으니, 연자의 판단이 옳았구먼. 내가 잘못했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어. 앞으로는 연자가 어떤 위기에 처하더라도 한마디도 하지 않을 테니, 부디 안심하시게.]
게다가 생각보다 더 화난 것 같은데?
신이란 양반이 이렇게 뒤끝이 길 줄이야…….
하지만 그 바탕이 나를 염려하는 것에서부터 나온 걸 알기 때문에,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그리고 무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그렇게 지옥에 혼자 떨어지고 얼마나 후회하고, 무서워했는지 모릅니다. 무신님의 조언을 들을걸, 하면서 골백번도 더 후회했지요…….’
[…….]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이래서 고인古人의 말을 흘려들으면 안 되는구나. 어른이 하는 말씀을 들으면 최소 반은 가는구나……!’
[…….]
‘이후부턴 무신님의 조언을 결코 허투루 듣지 않겠습니다. 정말요!’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 말은 거짓말이잖나.]
‘…….’
[후우…….]
무신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실로 반성하는 태도는 아니지만, 연자가 날 생각하는 마음엔 거짓이 느껴지지 않으니, 일단 알겠네.]
‘고맙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다시는 지옥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말게. 악기는 생명체에게 너무 위험한 힘이야.]
마침 그 화제가 나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악기나 마왕의 권능에 저항하기 위한 힘은 역시 가호의 단련밖에 없습니까?’
[무슨 뜻인가?]
‘저는 가호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마저도 전투용이 아니라 단련할 수 없는 종류고요. 이번에 악기에 크게 노출되어 보니 알겠던데, 그건 단순히 심신心身을 단련한다고 대처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음…….]
무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대로일세. 그대들은 앙신이니 선신善神이니 그들을 분류해서 말하지만, 근본적으론 같은 존재일세. 그리고 일정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신의 힘에 대응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신의 힘뿐이지,]
‘그럼 혹시 무신님께서 가호를 내려 주시는 건……?’
무신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의 내게 그 정도 힘은 없네.]
‘…….’
[하지만 방법은 있네. 계약하면 되니까.]
‘계약… 말입니까?’
[신의 가호는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지. 하지만 신수神獸의 힘이라면 특별한 조건 없이 빌릴 수가 있네 물론 계약을 맺어야 하겠지만.]
무신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연자는 영웅의 혈통을 이었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가?]
신수에 대해선 나도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형식으로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신수가 정확히 뭡니까?’
[신이 된 짐승일세. 생전엔 영수靈獸나 환수幻獸, 심지어 괴수怪獸라고도 불렸던 존재들이지. 그들 대부분은 일곱 종족에게 호의적이야. 마음에만 든다면 계약 조건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고.]
‘음…….’
[연자의 가문은 흑요정 쿠세트의 피를 계승하고 있지? 그렇다면 분명 떠받들고 있는 신수의 힘도 막강할 터. 여유가 될 때 책임자에게 한번 물어보게나.]
책임자라면 철혈공한테 물어보면 되려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무엇인가?]
오늘의 무신은 왠지 모르게 금방 사라질 기색이 없어서, 나는 이참에 묻고 싶었던 걸 다 묻기로 했다.
‘백일식에 대해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무엇인가?]
“후반부 초식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는데요-.”
나는 천천히 영산에서 떠올린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염화제일공과 백일식의 관계.
불꽃의 상징성.
회피, 방어기로 채워질 후반부 초식.
이야기를 모두 들은 무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은 접근이로군……. 반드시 모든 동작이 공격기일 이유는 없지. 전반부만으로 이미 파괴력은 충분할 테니까.]
‘그렇죠?’
[연자는 생각이 유연하구먼. 아주 잘했어.]
‘…….’
잘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뜻밖에도 스스로의 감정이 요동치는 걸 깨달았다.
무신은 깨닫지 못했는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동작의 연속성이 될 걸세.]
‘…연속성이요?’
[각기 다른 동작을 하나의 무술로 묶으려면 그 전환이 자연스러워야 하지. 가령 제일초식부터 마지막 초식까지, 순서를 꼬아서 전개하더라도 막힘이 없어야 해.]
‘아.’
그러니까…….
화륜을 쓴 이후에 낙화를 쓰거나.
낙화를 쓴 이후에 작열을 내지르거나.
반드시 일초식부터 순차적으로 전개하는 게 아닌, 거꾸로 사용해도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내 초식을 모두 하나로 묶을 수 있던 거였어.’
알고 보면 별거 아니었지만, 나는 어쩐지 무학에 대해 새롭게 개안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은하검의 묘리에 대해 더 가르쳐 주십시오.’
[음?]
나는 곧바로 칠죄검을 뽑아 든 다음, 은하검을 펼쳤다.
[호오…….]
이때의 무신은 내 은하검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무신이 감탄하더니 내게 물었다.
[연자는 혹시 내가 의식이 없을 동안 은하검을 연마했나?]
‘네?’
[벌써 일추一樞에 입문한 것이 놀라워서 그렇네.]
‘아…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랬군…….]
무신이 어쩐지 흡족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이선二璇에 이르는 법은 간단하네, 방금 펼쳤던 검로를 압축시키면 돼.]
‘압축……?’
생소한 개념에 내 고개가 기울었다.
[연자에겐 흑요정의 피도 섞여 있었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흑요정의 피가 모두 흐르고 있으니, 이선까지는 어렵지 않게 이를 것일세. 그러나 삼기三璣부터는 단순히 수련만으로 도달하기 어려울 테지.]
‘그게 무슨…….’
[은하검의 묘리는 칠죄검에 숨어 있다네. 그리고 칠죄검의 힘을 개방하기 위해선 일곱 종족이 가진 종種의 이치가 불가결.]
그래서 지난번에 칠죄검이 미르에 반응했던 건가?
[음……. 연자에겐 아직 먼 얘기였구먼.]
‘아뇨. 흥미로웠습니다.’
[그런가? 달리 궁금한 게 있다면 더 물어봐도 좋네.]
어쩐지 은하검을 보여 줬을 뿐인데, 무신의 태도가 부쩍 호의적인 태도로 변했다.
나는 내친김에 뇌천보와 염염질주를 펼친 다음 물어보았다.
‘앞서 펼친 무공은 제가 최근에 창안한 무공인데, 어쩐지 뒤에 펼친 동작과의 연계가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큰 관계가 없는데 무공인데도 불구하고요.’
[흐음…….]
‘그렇다고 같은 무공으로 묶기엔 애매하고, 어쩐지 두 무공을 섞거나 연거푸 펼치면 더 뛰어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신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앞서 펼친 무술은… 혹 천둥이나 번개에 영감을 받고 창안한 것인가?]
나는 살짝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무신이라 그런지 안목이 보통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뇌천보라고 이름을 지었지요.’
[작명이 촌스럽구먼…….]
‘…….’
[아무튼 번개에서 탄생한 무술이라면 연계가 자연스러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세. 불꽃과 번개는 비슷한 인상을 가졌으니 섞이기 쉬운 것이지.]
‘네. 저는 불꽃을 번개마저 포괄하는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재밌는 접근이로군…….]
무신이 드물게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학의 시작점은 언제나 관찰이지. 옛 선인들께서는 자연을 눈에 담는 걸로 영감을 얻고, 그를 토대로 수많은 무술을 창안하였네. 하지만 같은 것을 바라본다고 꼭 동일한 성질의 무학이 탄생하지는 않았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가령 두 고수가 바다를 보았을 때, 한 명은 그 드넓음에 경탄하고, 다른 한 명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 그러니 자연의 이치 또한 인간이 해석하기 나름일세. 깊게 관찰한 결과, 실은 그 본연의 성질이 우리가 알던 것과 전혀 달라도 상관없네.]
이어지는 무신의 말은 내 뇌리에 깊숙이 새겨졌다.
[이미 무의 이치는 독자적인 형태로 가슴속에 새겨졌으니까.]
‘아…….’
나는 멍하니 탄성을 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이름 없는 무신은 백노광과 정반대되는 성격을 가졌지만…….
만약 백노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사람을 스승으로 모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연자는 이미 발걸음(步法)과 달리는 법(輕功)에 대해 알게 됐으니, 균형을 위해선 육체를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법(身法)에 대해 연구해야 할 걸세.]
‘알겠습니다.’
나는 무신이 말한 게, 과거의 스승님이 지나가듯 언급한 보신경步身輕의 개념이란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
그때 주니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음침하게 뒤뜰에 있어? 한참 찾았네.”
“…가끔 이런 곳이 안정되더라고요.”
나는 칠죄검을 납검하며 대꾸했다.
“역시 이단심문관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재-.”
“그보다 회의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당연히 잘 풀렸지.”
주니앙이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가면 돼. 아니면 도검선생이 좀 이따 돌아오는데 얼굴 보고 가도 되고.”
“괜찮아요.”
“구매 물품 체크는?”
주니앙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2차 시험에서 배부했던 거랑 거의 흡사해.”
나는 대충 한번 슥 훑어본 다음 돌려줬다.
“딱히 쓸 만한 건 없네요.”
“제대로 본 거 맞아?”
“그럼요.”
“흐음……. 뭐, 그래. 후회하지 마라.”
나는 숲을 보았다.
‘자, 그럼…….’
이제 진짜로 가 보실까.
* * *
“카, 카론이 보라색 공을 갖고 있습니다……!”
“…….”
헥토르는 식은 눈으로 그리 말한 놈을 보았다.
어떤 의미에선 이번 수련회에서 가장 바빴던 녀석이다.
박쥐처럼 뻔질나게 이곳저곳 기웃거렸던 영도.
한스 밴더.
뭐라고 해야 하나…….
원래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녀석이었는데, 요 6주 동안 6살은 더 먹은 것 같다.
“개소리하고 있네.”
옆에 있던 에디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카론 옆에서 모기처럼 손바닥 비빌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넙죽 엎어지면 우리가 ‘아, 그래?’ 하고 믿어 줄 줄 알았어? 헥토르 님?”
에디가 헥토르를 보며 말했다.
“들을 것도 없습니다. 죽이는 건 규칙 위반이니까, 대충 팔다리 한두 개 정도만 분질러서 쫓아내죠.”
“저, 정말입니다! 헥토르 님……! 믿어 주십시오…….”
한스가 머리를 처박은 채 빌었다.
“난 말이야.”
헥토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수련회에서 무슨 일을 겪든 간에, 이곳에서의 은원을 바깥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곳의 시스템이 경쟁을 권장하고 있으니, 수련회에서의 일은 수련회에서만 끝내기로 결심했지.”
“네, 네에…….”
“하지만 이 건만큼은 달라, 한스 밴더. 거짓말을 지껄이는 거라면, 약속하지. 네가 속한 가문은 성치 못할 거다. 내 또 다른 이름에 맹세코.”
또 다른 이름……?
잠깐 생각하던 한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아나토스 가문……!’
헥토르의 외가.
배드니커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한 권세를 가진 가문이었으며- 무엇보다 밴더 가문의 영지와 근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
한때 헥토르의 측근이었던 한스는 알고 있다.
아나토스는 배드니커와 달리 헥토르의 뜻에 철저히 따른다.
현 아나토스의 가주인 제논 아나토스가 헥토르의 외조부이며, 손자의 말이라면 끔벅 죽기 때문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한스에서 시선을 거두며, 헥토르가 중얼거렸다.
“알겠나? 난 이번 수련회에서 반드시 1위를 해야 한다.”
“…….”
“…그게 죽은 그 녀석과의 약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