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나는 내가 진짜 루안 배드니커란 사실을 증명하려다, 문득 생각을 바꿨다.
‘4주.’
약 한 달.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다.
그동안 이 녀석들이 얼마만큼 강해졌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탓.
나무에서 뛰어내려 착지를 마친 순간, 곧바로 들이닥친 건 미르였다.
호쾌한 기세로 망치가 휘둘러진다.
나는 살짝 상체를 비틀어 피하면서, 그 강맹한 기세에 놀랐다.
‘이 녀석-.’
동작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예전의 미르라면 덩치 큰 녀석 앞에선 일단 몸부터 굳고 봤는데…….
지금은 딱히 겁먹은 기색 없이, 시선마저 또렷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후웅!
뒤이어 사선으로 그어지는 에반의 칼날을 피했다.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연스러운 연계.
이어서 이격, 삼격으로 이어지는 검로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이븐이군.’
만약 후안이 의식을 성공했다면, 에반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첫 번째 삶에서 보았다.
에반은 아마 어떻게든 수련회에서 살아남았을 테지만, 이미 소교주로서 각성을 끝마친 상태였을 거다.
그 사실을 숨긴 채 영웅기관 헤로스에 잠입했겠지.
즉.
에반 헬빈의 실제 배신 시기는, 실은 알려진 것보다 몇 년이나 빨랐다는 뜻이다.
‘지금은?’
이 녀석은 여전히 내가 알던 에반 헬빈이다.
우직하게 가전 검술을 고집하며,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일 목적을 지녔고, 언젠가 레이븐으로 마왕을 쓰러뜨릴 야망을 지닌 영도.
나는 그 사실이 기꺼웠다.
결국 에반도 제사장의 개입만 없었다면 잠시간의 방황 끝에 아버지의 진전을 잇는 걸 택할 녀석이었다.
푸화악!
그 순간 지면에서 무형의 팔이 치솟았다.
샤를의 가호다.
나는 살짝 도약해서 회색빛 손아귀를 피한 다음, 양쪽에서 덮치는 에반과 미르의 턱에 발차기를 먹였다.
빠악!
“큭…….”
“으억!”
두 녀석이 비틀거리며 물러설 동안, 나는 다시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섰다.
“뭐 하는 거예요! 정신 안 차려요?”
“윽……. 하, 하지만 저 녀석 너무 잽싸다……!”
“보면 알아요! 우리의 합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다니…….”
샤를이 까득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
나는 아예 나뭇가지에 느긋하게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뭔 대단한 합공이라도 펼친 줄 알겠네. 포메이션은 괜찮은데 연계가 아직 어설퍼. 네 기습 타이밍도 재미없을 만큼 뻔했고.”
미르가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언데드가 저렇게 말을 잘했나?”
“뭔가 이상한데.”
그래도 눈치가 없는 녀석들은 아닌지, 무기를 쥔 손이 느슨하게 내려갔다.
그나마 경계를 버리지 않은 건 샤를 정도였다.
“긴장을 풀면 안 돼요. 애초에 맛이 간 숲인데 어떤 놈이 나올 줄 어떻게 알고? 언데드가 아니라 환각을 쓰는 몬스터일 수도 있잖아요.”
“듣고 보니…….”
“포메이션을 바꾸겠어요. 제가 들어갈 테니 이번엔 에반이 먼저-…….”
“…….”
나는 잠깐 작전을 짜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았다.
오고 가는 말이 험하긴 하지만, 목소리에선 희미한 신뢰가 느껴진다.
친우는 아니라도 전우 정도의 관계로는 발전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첫 만남에 비하면 애교 수준.
“…….”
잠깐 저 녀석들 사이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그려져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조금 아쉬운 느낌이랄까.
내가 저 자리에 끼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친해지고, 강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지만.
짝!
나는 손바닥을 부딪치며 시선을 모았다.
“싸움은 그만하자. 난 언데드도, 환각을 쓰는 몬스터도 아니고 진짜 루안이니까.”
“하.”
샤를이 입가를 비죽이며 말했다.
“실종된 지 4주도 넘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저희더러 그걸 믿으라고요?”
“맞는 말이군. 그럼 나만 알 만한 걸 물어봐.”
“…뜬금없이 질의응답이라도 하자는-.”
조소를 보내던 샤를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묘하게 쭈뼛거리는 태도로 물었다.
“크, 크흠. 그럼 헤, 헥토르 님이 좋아하는 게 뭐죠?”
“몰라.”
“헥토르 님의 생일은……?”
“그걸 시발 내가 어떻게 알아.”
“형제잖아요!”
“우리 별로 안 친하거든?”
“전엔 형님이 자길 귀여워한다고 자랑하더니!”
내가 그랬나?
“샤를, 내가 물어볼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샤를을 뒤로하고, 에반이 나섰다.
그리고 특유의 침착한 어조로 묻는다.
“어머니가 어디 출신이랬지?”
“제국 북부 콜랜드.”
“내가 사용하는 검술의 이름은?”
“레이븐.”
“마지막으로 봤을 때 영도 포인트 소지 1위는 누구였어.”
“싸가지 카론.”
“수련회에서 룸메이트는?”
“너잖아.”
“으음…….”
에반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마, 맞는 것 같은데.”
그리고 몇 배는 복잡해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죽은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것저것 있었어. 결과적으로 길을 좀 많이 헤맸다고나 할까.”
“4주 동안?”
“그만큼 넓은 숲이잖냐.”
“음…….”
에반은 내 변명에 완전히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덮어놓고 부정하기에도 애매한 듯했다.
“아무튼 너희,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군. 공은 많이들 모았어?”
“……!”
내가 공에 대해 언급하니 셋은 다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몬스터인 것과 별개로, 같은 영도도 적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그렇게 안 쫄아도 돼. 내 타깃은 보라색 공뿐이니까.”
나는 그리 말하며 특히 미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표정 관리를 못하는 녀석이라서 그렇다.
미르가 노골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망치를 쥔 손아귀에도 힘이 좀 빠졌다.
‘없나 보구만.’
적어도 이 녀석들에게 보라색 공은 없다.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까?
억지로 뺏었을까? 아니면 그냥 넘어갔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이건 어때.”
나는 주머니에 들었던 파란색 공을 하나 꺼내 던졌다.
깜짝 놀란 셋이 동시에 공을 피했다.
“이건…….”
“파란색 공. 몇 점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네.”
“15점이다!”
“참 그랬지. 고마워.”
“헤헤… 별말씀을.”
샤를이 꼴값 떠는 미르를 살짝 노려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파란색 공이라면 상당한 가치를 가졌는데- 무슨 속셈이죠?”
“속셈 같은 거 없어. 공의 최대 소지 개수는 3개잖아? 난 보라색 공으로 다 채울 생각이라 파란색이 필요 없거든.”
“…….”
“여기서부턴 거래인데, 혹시 보라색 공의 소재를 알고 있어? 말해 주면 이것들도 줄게.”
나는 파란색 공으로 저글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두 개로 하니 맛이 안 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이따 줄걸.
어쨌든, 내 제안을 받은 셋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최종적으론 샤를을 보았다.
역시 저 녀석이 조장이 된 모양이다.
잠깐 고민하던 샤를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요. 받아들이죠. 다만 숲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니 맹신하진 마시길.”
“당연한 말씀을.”
“우선 우리가 파악한 보라색 공의 위치는 총 세 개예요.”
“오…….”
설마 모두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수고를 덜었다…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응?”
“일단 카론과 헥토르 님이 각각 한 개씩 소지하고 있어요.”
역시나라고 해야 하나.
내 감이 정확히 맞았다.
“좋구만. 나머지 한 개는?”
그때 에반이 말했다.
“마지막 보라색 공의 소재는 위험해, 루안. 손 안 대는 편이 좋아.”
“응?”
뜻밖의 말이다.
카론이나 헥토르보다 더 위험한 녀석이라니.
그런 놈이 영도들 중에 있었나?
“이번 시험에서 보라색 공은 단 세 개밖에 없고, 사실 교관들이 처음부터 그 위치를 가르쳐 줬어요.”
이건 못 들은 정보인데.
“이번 시험엔 특히 강한 몬스터가 세 마리 있습니다. 그중 [외눈박이 오거]와 [여왕나비]는 각각 카론과 헥토르 님이 토벌했어요. 그렇게 둘은 각자 보라색 공을 하나씩 손에 넣었죠.”
샤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 괴물만큼은 무리였습니다. 한 번은 단체로 토벌전을 준비했는데도 실패하고, 겨우 도망쳤죠.”
“어떤 괴물이길래.”
“우리는 일단 [동굴의 주인]이라 부르고 있어요.”
에반이 말을 이었다.
“숲 북쪽의 동굴에 있는 녀석인데, 정확히 어떤 몬스터인지는 아무도 몰라. 무슨 이상한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있거든. 덩치가 거인처럼 크다는 것밖에는…….”
“거인은 아니다. 절대로.”
미르가 불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정보 고맙다.”
나는 공 두 개를 모두 던졌다.
깜짝 놀라서 공을 받은 에반이 물었다.
“다 주면 넌 어떡하게?”
“보라 공 얻으러 간다니까.”
사실 소재가 죄다 파악되지 않으면 하나쯤은 보험으로 갖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럴 걱정은 없어졌다.
나는 등을 쭉 펴며 말했다.
사흘의 시간은 넉넉하지만, 이 넓은 숲에서 카론과 헥토르를 찾는 건 제법 귀찮을 것 같다.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자, 잠깐만. 루안!”
“……?”
에반이 막 떠나려는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복잡한 얼굴을 하더니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너희들도.”
나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대꾸한 다음, 이번에야말로 진짜 떠났다.
‘동굴’은 숲의 북쪽에 있다고 했나?
우선은 거기부터 가볼까.
* * *
카론 우드잭은 제국의 4대 금지 중 한 곳인 [가라앉는 늪지대]에서 태어났다.
자의식이란 게 생겼을 무렵 양손엔 이미 무기가 쥐어져 있었고, 두 발로 뛰어다닐 수 있을 때쯤엔 늪지대에 자라는 풀잎의 맛을 전부 알게 됐다.
철이 들기 전까지 족히 10번은 죽을 위기를 넘겼고, 잘나신 귀족 자제들이 예법이나 교양을 배울 땐 사냥과 생존을 직접 몸으로 익혔다.
그러니 악명 높은 배드니커의 수련회가 아무리 혹독하다고 해도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겪어 온 삶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다.
영도란 놈들도 마찬가지다.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우수한 스승, 천금과도 같은 영약… 그딴 것보다 백배는 중요한 게 실전이란 것이다.
그리고 교관이라는 안전장치가 존재하는 한, 이 수련회는 완벽한 실전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존경하는 아버지, 하이드 우드잭의 말은 카론으로서도 뜻밖이었다.
- 배드니커의 핏줄은 건들지 마라.
그건 카론에겐 조금 낯선 형태의 조언이었다.
여태껏 하이드가 조심하라고 일렀던 건 대부분 몬스터와 같은 마물, 즉 사냥감이었으니까.
이번 수련회는 좀 다를까?
[위대한 가문]의 후예는 카론이 알고 있는 귀족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 줄 것인가.
결과적으론 아니었다.
나름 각지에서 날고뛰는 영도들을 끌어모았다는데, 카론의 눈에 차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딱 한 명만 뺀다면 말이다.
카론이 대사범 중에서 특히 감탄했던 건 수렵선생 탄코였는데…….
과거 대전사로서의 위명도 익히 들었고, 수업의 방침이나 내용 또한 가장 카론의 마음에 들었다.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첫날부터 그 탄코와 대련하려는 미친놈이 있었다.
‘루안 배드니커?’
사실 그전까지 카론이 주목했던 건 헥토르 배드니커였지만.
카론은 헥토르 또한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단 걸 금방 알아챘다.
‘철혈공이 특히 아끼는 세 자식 중 한 명이랬나?’
그리고 카론이 알기로 그 세 명 중 루안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마침 잘됐군.’
대전사 탄코의 실력을 감상할 기회다.
상대가 일합이라도 버텼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저 비실비실하게 생긴 놈이 대전사의 공격을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카론은 그런 생각을 품으며 대련을 보았고…….
…생전 처음으로 또래의 실력을 보고 얼굴이 굳고 말았다.
‘저놈은 대체…….’
안목 없는 녀석들은 모를 거다.
시종일관 탄코가 루안을 압박한다고 생각하겠지.
한스같이 멍청한 녀석은 루안이 특혜를 받는다고도 주장했다.
전혀 아니다.
루안의 육체 능력은 분명 우수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 대응 능력은 카론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카론이 탄코의 입장이었어도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었을 만큼.
‘대인전 경험이 말도 안 되게 풍부한 놈이다.’
카론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과의 전투 경험 말이다.
그걸 감안해도 영도와는 수준 차이가 극심했기 때문에, 대련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지만…….
별개로 탄코와 저 정도 수준의 대련을 펼치는 건 카론에게도 불가능했다.
그때 직감했다.
헥토르나 세렌보다, 저 루안이라는 놈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하지만 카론이 가장 주시하던 대상은 어이없는 사유로 사라지고 말았다.
허락되지 않은 시간에 멋대로 숲을 누비다가 그대로 실종된 것이다.
물론 카론의 본능은, 그 실종 사건에 무언가 더 숨겨진 게 있다고 주장했지만…….
딱히 파고들 필요성은 못 느꼈다.
이후로 카론은 다른 영도와 압도적으로 격차를 벌리며 1위 자리를 지켰고, 이 성적으로 수료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까앙!
헥토르와 일합을 나눈 순간, 카론의 눈가가 좁혀졌다.
상대의 검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그그극, 서로의 검이 맞닿고 있는 상황에서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너와 나의 포인트 격차를 알고 있나?”
“글세……. 밑에 있는 녀석의 점수엔 딱히 관심이 없어서.”
“37점이다. 하지만 원래라면 훨씬 더 격차가 적었겠지.”
“아. 그러셔.”
카론이 대놓고 조소했지만, 헥토르는 딱히 기분 나쁜 태도 없이 말했다.
“난 지난 시간 동안 하루에 최소 1점씩은 확정적으로 감점당했으니까.”
“…뭐?”
“지난 4주일 동안 내 대련 상대는 쭉 수렵선생 탄코였다.”
카론이 멈칫했다.
“몰랐겠지. 방금 네가 말한 것처럼, 넌 뒤쫓아 오는 녀석을 한 번도 바라본 적 없었을 테니까.”
“…….”
“나도 그랬다.”
헥토르가 말했다.
“당연하지만, 난 탄코 선생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 녀석처럼 대인전 능력을 인정받아 추가 점수를 받지도 못했고.”
헥토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군.”
“……!”
헥토르가 손목을 비튼 순간, 카론의 단검이 검날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헥토르는 손아귀에 힘을 가해 쳐올린다.
까앙!
청명한 소리와 함께 단검이 날아갔다.
카론은 손목에서 아릿한 고통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카론 우드잭, 대인전 능력은 이제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