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카론!”
제로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근처에 서 있던 신바의 표정도 굳었다.
“역시 헥토르 님……!”
“대단해! 그 카론 우드잭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고!”
반면 헥토르 일행에게선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저 콧대 높은 놈한테 드디어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다……!
스릉-.
카론은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여분의 단검을 뽑아 든 다음 곧바로 다시 교전을 이어 갔다.
카카캉!
하지만, 재차 몇 합을 나눈 직후엔 카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에선 내가 밀리는군.’
딱히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카론의 주무기는 단검이 아니고, 근접전 또한 특기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사실과 별개로 웬만한 무기 전반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긴 하지만…….
가장 손에 잘 맞는 무기는 활이고, 전투 방식은 정면에서의 승부 따위가 아닌 사냥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동굴 내부란 장소는 카론의 주 무대라고 하기 어렵다.
이곳이 활을 쏘기 힘든 장소란 건 문외한이 봐도 알 수 있을 거다.
즉 이곳에 헥토르를 끌어들인 게 자충수가 된 셈인데…….
쇠뇌라도 있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그 정도 장비까진 갖추지 못한 상태.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대결을 없던 일로 할까?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다시 세력 대 세력으로 붙으며 [동굴의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끈다면, 헥토르는 결국 카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
저놈이 의외로 동료를 신경 쓰는 성격이란 건 알고 있으니까.
비겁한 짓이 되겠지만, 카론은 딱히 그러한 행위에 거부감이 없다.
말로만 맺은 약속 따위에 무슨 효력이 있다고.
하지만.
‘…….’
어쩐지 헥토르를 이 자리에서 철저히 짓밟고 싶단 오기가 치솟았다.
그건 카론으로서도 생소한 감정이었다.
“재밌군. 그렇다면 이제부턴 나도-.”
전혀 상상 못 한 일이 벌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르릉!
돌연 하늘이 부서지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실제로 동굴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부서진 돌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진다.
그중엔 바위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커다란 것도 섞여 있었기에, 카론은 급히 회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르르…….
쏟아지던 돌무더기를 모두 피한 카론은, 기도를 찌르는 흙먼지 때문에 쿨럭거렸다.
‘이게 뭔-.’
그 순간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 속에서, 어떤 거대한 존재가 허리를 펴는 광경이 보였다.
“……!”
고개를 뒤로 젖혀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체격, 누더기 같은 천 아래에 언뜻 보이는 창백한 피부.
그리고 손에 쥐어진 거목만 한 나무 몽둥이.
‘-동굴의 주인!’
설마 동굴 천장을 부수며 진입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저 존재의 괴력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카론은 즉시 주변을 살폈다.
흙먼지 때문에 동굴 내부의 지형이 바뀌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고 있던 영도들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깔려 죽은 걸까?
그건 아닐 거다. 뜻밖의 상황이었지만, 대처 못 하고 개죽음당할 만큼 어설픈 놈들은 아니다.
아마 쏟아진 돌무더기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라 보는 편이 맞다.
문제는, 떨어진 돌무더기가 출구를 막아 버렸단 건데.
“피해라!”
문득 들린 외침에 카론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굴렸다.
콰아아아앙!
방금까지 서 있던 지면을 나무 몽둥이가 후려쳤다. 딱딱한 동굴 바닥이 유리창이라도 된 것처럼 부서졌다.
여전히 소름이 끼칠 만큼의 파괴력이었지만.
‘…….’
언뜻 위화감도 느껴진다.
동굴의 주인과는 일전에 싸운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어쩐지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전보다 훨씬 공격적인 듯한데.
잠깐 놈을 직시하던 카론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다친 건가?’
거적때기가 피에 물들어 있고, 자세히 보니 호흡도 거칠다.
제법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갑작스러운 등장은 동굴의 주인이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자신의 둥지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놈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거지?
“카론.”
흙먼지를 틈타 헥토르가 다가왔다.
“뭐냐.”
“방금 천장이 무너지면서 동굴 입구가 막혔다. 내 조원은 물론이고, 네 조원의 생사도 알 수 없어. 쉽게 죽을 녀석들은 아니지만, 당장 협력은 기대할 수 없단 뜻이다.”
“그래서.”
“당장 보이는 유일한 출구는 저놈이 부수면서 등장한 천장인데, 우리가 암벽을 탈 동안 저 괴물이 두고 볼 것 같지는 않군.”
“본론만 말해.”
“저놈을 쓰러뜨릴 때까지만 협력하는 건 어떠냐.”
카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헥토르도 한숨을 내쉬며 덧붙이듯 말했다.
“당장 떠오르는 건 이 방법밖에 없어서 그렇다. 아니면, 다른 괜찮은 생각이 있나?”
카론은 잠깐 상황을 분석하더니, 헥토르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좋아. 그럼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니 짧게 말하마. 내가 앞에서 시간을 끌 테니, 네가 화살로 저놈의 급소를 노려.”
쿠어어어어어어-!
괴물의 괴성이 무너진 동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동굴 벽면에서 후두둑 돌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
카론이 잠깐 귀를 틀어막은 순간, 헥토르는 정말 동굴의 주인을 향해 홀로 달려들었다.
‘저놈이 뭘 믿고.’
잠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카론의 기동력이라면 헥토르가 시간을 끄는 동안 충분히 도망칠 수 있고, 사실 그편이 훨씬 합리적이다.
동굴의 주인이 강대한 적이란 건 이미 한차례의 토벌전으로 깨달았다.
‘잘됐군.’
네놈은 그 괴물과 싸워라. 내가 도망칠 때까지 말이야.
카론은 헥토르를 비웃으며 등을 돌렸다.
‘…….’
그래야 하는데.
카론은 동굴의 주인과 싸우는 헥토르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10미터에 근접한 괴물과 정면에서 싸우고 있다.
마치 카론이 도망칠 가능성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웃기는 놈이다.
우리 사이에 언제 신뢰 따위가 형성됐다고?
“…젠장.”
카론은 즉시 등 뒤에 묶고 있던 장궁을 꺼낸 다음 동굴의 주인을 조준했다.
저 괴물과 일전에 싸우며 깨달은 건, 웬만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피부를 지녔다는 점이다.
거기에 맨손으로 거목을 뽑을 만한 괴력을 지녔다.
움직임 자체는 조금 굼뜬 편이었지만, 공격하는 순간의 폭발적인 속도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 때문에 카론은 현재의 전력과 장비로는 놈을 사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사냥이 아닌 사투를 할 때.
급소는 어디지?
그그극, 시위를 당긴 순간 카론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번뜩거렸다.
[간파의 가호.]
지난번에 이 가호를 사용했을 땐 놈의 약점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다친 지금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우우웅-!
그리고 동굴의 주인의 몸뚱이에서 붉은 기류가 휘몰아치는 게 보였다.
‘얼굴? 아니. 목 쪽인가.’
아마 목울대 근처에 상처를 입은 듯한데, 사실이라면 말도 안 되게 터프한 놈이다.
사냥의 기본 중 하나는 출혈량을 계산하는 것.
덩치가 비대한 놈이긴 하지만, 쏟아낸 핏물을 고려하면 진작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저놈이 움직이는 나무 몽둥이는 여전히 빨랐고, 파괴적이다.
하지만 전과 달리 약점이 포착됐다.
충분히 할 만하다는 방증이 생긴 것.
카론이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를 놓은 순간,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갔다.
쏘아져 날아가는 화살에 옅은 빛무리가 휘감기더니, 도중 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이었으나,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혜, 가호加護다.
카론은 화살에 두 개의 가호를 적용했다.
첫 번째 [투척의 가호]는 문자 그대로 투척, 사격하는 모든 공격의 위력과 속력을 높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꽈아앙!
“……!”
불현듯 들린 폭발 소리에 헥토르가 깜짝 놀랐다. 화살이 적중한 순간, 작은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폭약이라도 넣은 건가?
헥토르의 예상은 틀렸다.
카론이 가진 [폭살의 가호]는 접촉한 물체를 일정 시간 후에 터뜨릴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투척의 가호와 상성은 좋지 않은 편이지만…….’
폭발의 위력은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증가하니, 화살이란 무기와는 맞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강한 공격력을 위해 사용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화살은 동굴의 주인의 급소에 제대로 꽂혔다.
어쨌든 방금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여태껏 미친놈처럼 몽둥이를 휘두르던 동작이 처음으로 멎었고, 헥토르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쿠우웅……!
동굴의 주인이 한쪽 무릎을 꿇은 순간, 헥토르는 즉시 도약했다.
덩치가 거의 10미터에 이르는 괴물 같은 놈이라 한 번의 도약으론 부족하다.
적의 무릎 위에 착지한 헥토르는, 그대로 이 광포한 거인의 몸을 질주하여 순식간에 목 앞까지 당도했다.
‘목이 너무 두껍다.’
헥토르가 가진 검으로, 한 호흡 만에 베는 건 어려워 보인다.
일반적으론 그럴 것이다.
까드득.
칼자루부터 질주한 검기가 칼날 전체에 푸르스름하게 맺혔다.
그 상태에서 손목을 비틀며 독특한 변주를 주니 기묘한 흔들림과 함께 칼날의 잔상이 생겼다.
헥토르의 검술, 잔영검이 펼쳐진 것이다.
스거거걱!
단 한 번 휘둘렀지만, 꼭 연속으로 베인 듯한 소리가 났다.
뒤이어 괴물의 목울대에서 피가 튀었다.
‘해치웠나?’
감촉은 확실하다.
단순히 핏줄만 손상시킨 게 아닌, 경추를 확실하게 자른 느낌이 났다.
“멍청아! 피해!”
카론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헥토르는 지체 없이 거인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후웅! 철퇴 같은 것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기 직전에 몽둥이를 휘두른 건가?
정통으로 맞았다면 전신이 곤죽이 됐을 거다. 헥토르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쿠우우웅……!
그리고 동굴의 주인이 마침내 쓰러졌다.
덩치가 큰 놈답게 쓰러질 때도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켰다.
“…죽은 건가?”
헥토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카론이 활시위를 당겼다.
활시위엔 화살이 세 개나 걸려 있었다.
피피핑-.
마치 마법처럼, 세 발의 화살은 모두 쓰러진 거인의 각기 다른 급소에 적중했다.
꽈과광…….
그리고 작은 폭발음이 세 번.
동굴의 주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곧 그 몸뚱이가 빛무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후우우…….”
그 모습을 보고 카론과 헥토르는 동시에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았다.
헥토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펼친 잔영검…….’
평소보다 훨씬 위력이 강했는데, 어떻게 펼쳤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지금 당장 다시 써보라고 하면 재현할 자신이 없을 정도.
‘그 감각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음 경지로 이어지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한편 카론은 천천히 사라지는 동굴의 주인의 몸뚱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덩치가 큰 녀석답게 사라지는 것도 굼떴다.
‘어찌어찌 둘이서 쓰러뜨리긴 했는데.’
어쩐지 석연찮다.
애초에 이 괴물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승산은 아예 없었을 거다.
전투 때문에 멈췄던 사고가 다시 흘렀다.
이놈은 왜 다쳤던 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 동굴의 천장을 부수고 등장했을 때의 움직임이나 기색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며 겁을 먹은 듯 다급한…….’
카론은 동굴의 주인이 떨어졌던 곳을 보았다.
박살이 난 동굴 천장 너머로 겨울의 시린 창공이 펼쳐져 있었고, 태양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
잠시 태양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건 뭐지, 하고 생각한 순간.
꽈아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추락했다기보다 땅을 향해 도약해서 지면에 처박힌 것처럼 빨랐다.
쭉 하늘을 보고 있던 카론조차 제대로 포착하지 못할 만큼.
“…뭐야? 이놈 왜 죽어 있어?”
그리고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헥토르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흙먼지 속에서 익숙한 금발의 영도가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루안 배드니커?”
“응?”
루안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소 멍한 얼굴로 말했다.
“카론?”
카론이 흠칫 몸을 떨었고.
“그리고 헥토르.”
헥토르는 평소처럼 형님을 붙이라고 딴죽을 걸지 못했다.
“뭐야.”
루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여기 다 있었구나.”
분명 반가워야 할 형제간의 재회였지만, 헥토르는 물론이고 카론까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