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0화 (120/172)

120화

내가 물었다.

“가주님은 본가에 계시나?”

“예.”

“그리고 날 부르셨고…….”

“그렇습니다.”

“음…….”

살짝 난감한데.

가주의 호출이 문제가 아니고 다른 점이.

“수료하고 찾아뵈면 안 될까? 아직 특별 시험도 안 끝났어.”

“교관 측과는 다른 징수인이 접촉해 따로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겁니다. 도련님이 불이익을 받을 부분은 없겠지요.”

“아하.”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이유가 뭐야?”

“그야 물론 도련님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서입니다.”

“…….”

“대단히 기분이 좋아 보이시더군요. 가주님을 모신 경력이 길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제인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 * *

제인을 따라 숲을 나섰다.

사실 카론과 헥토르가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지 한번 확인하고 싶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는 듯했다.

나는 힐끗 뒤를 보며 말했다.

“아사드 님의 결계가 그냥 뚫렸네.”

“그분께서도 허락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본가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중간에 영산에서 100일을 지냈다 보니, 나로서도 오랜만의 귀환이기는 했다.

딱히 남다른 감상이 생긴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5층에 계셔?”

“아뇨. 가주님께선 현재 별관에 계십니다.”

“별관 어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좋아. 바로 가면 되겠지?”

그러자 제인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장에 조금은 신경 쓰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사흘 동안 나비의 숲을 굴러다녔기 때문에, 내 겉모습은 말끔하다곤 볼 수 없는 꼴이었다.

비록 철혈공이 이러한 예법에 엄격한 편은 아니지만, 가주와 대면하는 자리니 최소한의 체면은 갖추는 게 맞다.

나는 몸을 씻고, 제인이 준비한 의복을 입었다.

“불편해.”

“잘 어울리십니다.”

널널하고 편한 수련복만 입다가 이런 예복을 입으니 죽을 맛이다.

“스타일링도 도와드릴까요?”

“마음만 받을게.”

제인이 머리를 만지고 향수까지 뿌리려 드는 걸 겨우 거절한 다음, 나는 안내에 따라 별관이란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철혈공이 있다는 별관은 나로서도 다소 뜻밖의 장소에 있었다.

본관 후원 너머.

그러니까… 세렌과 함께 몰래 누볐던 출입 금지 장소에 철혈공이 있단다.

“…….”

어쩐지 하리바와 싸웠던 때의 기억이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영산 때의 시간까지 계산하면 오래되기는 한 건가?

“도련님?”

“지금 가.”

제인의 뒤를 따라 정돈되지 않은 후원을 걷는다.

방금까지 직접 [나비의 숲]을 누볐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점은.

이곳은 내가 겪었던 숲 내부보다 훨씬 어둡고 침침한 느낌이 든다는 점.

사실 인적도 없고,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부지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장소였다.

그렇게 숲을 좀 걸으니 얼마 안 가 건물 한 채가 나왔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앞을 보며 물었다.

“가주님이 저기 계시는 거야?”

“네.”

철혈공이 있다고 보기엔 다소 허름한 외관의 건물이다.

툭 까놓고 말해 조금 큰 사이즈의 오두막이잖아 저건. 귀족보단 사냥꾼이 사용할 법한 집 말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기분과 함께 오두막에 접근했고, 문을 열었다.

달칵-.

‘욱…….’

그리고 직후 코끝을 찌르는 혈향에 인상을 구겼다.

불현듯 뇌리를 스친 건 숲에서 보았던 참사였다.

기분 나쁜 기척을 흘리던 숲, 그곳에서 발견한 조그마한 오두막, 피 웅덩이 속에 놓여 있던 소녀.

“왔구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안에 시체 대신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철혈공이 저러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단 걸 처음 깨달았다.

그러니까… 자상하고, 인자한 어조 말이다.

“가주님?”

내부가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화안이라도 사용해야 하나 싶을 때쯤.

화륵-.

벽면에 걸려 있던 등불에 불이 들어오며 방 내부를 비췄다.

“…….”

그리고 드러난 모습에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중앙에 배치된 길쭉한 금속 탁자였는데, 탁자 위엔 온갖 흉악한 도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나는 저것들이 고문에 쓰는 전문적인 도구라는 것, 도구에 묻은 핏물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의자도 있었다.

아마 구속 의자로 보이는 곳엔 누군가가 사슬로 묶인 채로 앉아 있었는데, 얼굴엔 가죽 주머니 같은 걸 뒤집어쓰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체형만 봐선 남자 같은데 기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제인에게 듣지 못한 건가?”

“네.”

“흠.”

철혈공이 의자에 앉은 이의 포대를 벗겼다.

“허, 허억, 힉… 히익, 히엑… 힉!”

“…….”

마치 딸꾹질하듯 숨을 몰아쉬는 남자.

내가 아는 얼굴이다.

나는 살짝 굳은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말했다.

“…에인즈번 선생.”

“선생이라. 그 직함도 거짓은 아니었지. 진짜 정체는 교인이었지만. 아, 이 정보의 출처는 너였던가?”

철혈공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에인즈번을 내려다봤다.

법학선생 에인즈번.

고상한 학자 같은 외모를 하고 있던 자에게선, 더 이상 과거의 총명함과 품위를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수십 년은 더 늙었고, 그 이상으로 추레해졌다.

“아, 아, 아닙니다……!”

에인즈번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저는 교인이 아닙니다……! 가주님……! 믿어 주십시오……! 저, 전 그저 그들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쉬잇.”

철혈공이 검지로 입술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사정. 언제나 그게 문제지, 선생. 이 세상에 이유 없이 교단에 투신한 자가 있을 것 같은가.”

“가, 가, 가주님……!”

“잘나신 두뇌를 잘 굴려서 생각해 보게. 나름 제국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이지 않나?”

툭, 툭.

철혈공이 장난이라도 치듯 검지로 에인즈번의 이마를 두드렸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에인즈번은 발작이라도 하듯 몸을 떨었다.

“실은 말이야. 자네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도 큰 관심 없어. 나는 지금 그저 기쁠 뿐이야.”

“예, 예, 예?”

“그토록 나를 피해 다니던 교단이, 실은 내 집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 이것만큼은 묻고 싶군. 역겨운 쥐새끼들에게, 비로소 나와 전면전을 할 각오가 생긴 것인가?”

“저, 저, 저는… 교단의 사정 같은 건 모릅니…….”

뿌직-.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철혈공이 들고 있던 꼬챙이 같은 도구가 에인즈번의 발등을 꿰뚫었다.

“목청은 아직 살아 있군. 내 별거 아닌 재주 중 하나가 비명으로 기력을 감별하는 것이라네.”

“헤, 헤윽, 힉, 히익……!”

“안심하게. 앞으로 사흘은 더 살 수 있을 테니. 아, 물론 선생에겐 평생보다 긴 사흘이 될 테지만…….”

“가, 가, 가주님……!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

철혈공이 다시 포대를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그러자 에인즈번의 목소리가 뚝 끊겼고, 움직임도 멎었다.

죽은 건 아니고, 강제로 가사 상태로 만드는 마도구인 걸까?

“…심문 중이셨군요.”

“그런 셈이지.”

“이런 일도 직접 하십니까? 왜 아랫것들에게 시키시지 않고.”

“우문이군. 나보다 정확히 심문할 수 있는 자는 이 가문에 없어.”

…진위의 가호.

확실히 그 능력이 있다면, 철혈공의 심문 능력은 주니앙 이상일 것이다.

“앉겠나? 좀 더럽기는 한데.”

“…….”

철혈공이 어울리지 않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했는데.

나는 이 남자에게서 처음으로 외견에 걸맞은 천진난만함을 엿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체 철혈공에게 교단은 어떤 존재이며… 교단은 이자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나는 의문을 누르며 철혈공이 가리킨 허름한 의자에 앉았다.

철혈공은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위를 걷더니, 근처에 있던 낡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피 묻은 장갑을 벗고,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루안.”

“네.”

“정말 잘해 줬다.”

“…….”

세상천지 이렇게 살벌한 칭찬이 달리 있을까.

얼굴의 핏물을 닦으며 저런 말을 하는 아버지는 철혈공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열다섯이란 나이에 제사장을 홀로 죽인 건 대단한 업적이다. 사실 업적이란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야.”

“…….”

“이 일이 알려지면, 이 제국에서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다. 위대한 가문은 물론이고 황족이나 제도의 귀족, 헤로스, 용병 업계나 마법사 무리, 종교 단체까지……. 모두 네 이름을 알게 되겠지.”

“막아 주십시오.”

내 말에 철혈공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엔 핏자국이 아직 남은 채였다.

“막아 달라고?”

“네.”

“어째서.”

“명성이란 양날의 검입니다. 그리고 아직 전 그걸 뜻대로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귀찮은 날파리가 꼬일 게 염려스러운 것이냐? 배드니커의 이름이 있다면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이름이 교단까지 막지는 못하겠지요.”

철혈공이 침묵했다.

“교단이 제국의 가장 큰 적이 된 이유가 뭘까요. 사상이 위험해서? 가진바 세력이 강대하니까? 제 생각엔 전부 틀렸습니다.”

“…….”

“교단은 평소엔 철저히 자신들을 감추다가 확실한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때마다 제국엔 피바람이 불었지요.”

“은밀성.”

철혈공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숨겨진 비수야말로 가장 위험하지.”

“물론 저도 이 업적을 없던 걸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젠간 써먹을 때가 있겠죠. 그때까지만 새어 나가지 않게 조치해 주십시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철혈공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의사를 존중하마.”

“…….”

“하지만, 이 배드니커에서만큼은 이제 그 누구도 네 이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씀은…….”

“오늘부로 네가 소가주다.”

“……!”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철혈공을 보았다.

“앞으로 네 판단에 따라 본가의 기사를 최대 30명까지 차출할 수 있으며, 이제 합당한 사유 없인 원로회조차 널 핍박하지 못할 것이다. 사적으로 금전을 쓸 일이 생기면 재무부에 얘기하면 될 것이고……. 또한 본관 동쪽에 있는 소철당小鐵堂은 앞으로 네가 쓰도록 얘기해 두마.”

“어…….”

“집사, 시녀를 비롯한 하인들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보낼 텐데, 최종 선별 권한은 네게 맡기겠다. 사람을 보는 안목을 기르는 것도 중요한 법이지.”

소철당은 여태껏 빈 건물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여태껏 소가주란 위치는 쭉 공석이었으니까.

“또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언제든 가문에 있는 아사드에게 말하도록. 늦어도 일주일 내론 답하마.”

게다가 철혈공의 독대권까지.

“…저는 가주가 될 생각이 없는데요.”

과거의 루안이 가장 바라던 것들이 순식간에 쏟아졌는데도, 나는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철혈공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소가주가 됐다고 반드시 가주가 돼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주고 싶은 건 가문에서의 권리인데, 일일이 하나씩 주려면 절차가 귀찮거든.”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합니다.”

“전혀 과하지 않다. 오히려 네가 세운 전공에 비하면 부족할 정도지.”

상벌에 엄격한 철혈공이니, 저 말이 사실이긴 할 거다.

워낙 후다닥 끝나서 실감이 안 났는데- 새삼 암흑교단의 제사장을 죽인 게 엄청난 일이구나 싶다.

“그러니 여기서 물으마. 혹시 더 바라는 것이 있느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들어주마.”

…지금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말했다.

“가주님.”

“말해라.”

“저는 아직 약합니다.”

그 말에 철혈공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건 겸손인가?”

“아뇨.”

“제사장을 단신으로 격파하고, 마왕과 대면하고도 살아남았는데도 약하다라…….”

철혈공이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고 있는 풍경이 드높다면 그럴 수 있지. 궁금하구나. 네가 추구하는 강함은 어느 정도냐?”

“최소, 마왕과 주먹을 맞댈 수 있는 경지.”

내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전 지옥에서 마왕이란 존재와 마주쳤습니다만… 제가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닙니다. 그 괴물의 변덕과 예상치 못한 상황이 맞물려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죠.”

“…….”

“그런 경험, 다시 겪기는 싫습니다.”

그러자 철혈공이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왕魔王. 제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교인들 때문에 그러한 칭호로 불리지만, 사실 그들은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나도 안다.

직접 만난 순간 깨달았다.

대사형은 물론이고, 탕타타란 놈도 지금의 나로선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란 걸.

“즉, 지금 너는 신神과 주먹을 맞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가능할까요?”

“…….”

철혈공이 침묵했다.

어쩐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나는 그 태도에서 약간의 망설임도 느꼈다.

이 남자는 지금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루안, 너의 질문은 내가 평생토록 고민한 화두와 맞닿아 있다. 나 또한 나름대로 고심했고, 찾아봤고, 답을 찾았지.”

그리고 철혈공이 다소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신과 승부하려면, 스스로 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

“…네?”

“그리고 난 지금 당장이라도 신神이 될 수 있어.”

“…….”

다른 이가 말했다면 농담이나 미친 소리로 다가왔겠지만.

말한 사람이 말한 사람인지라 나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제사장을 죽인 너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으니 말해 주마. 우리에게 가호를 주는 신이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야. 이 대륙에 존재하는 신은 대부분이 필멸자로, 사후에서야 신이 된 존재들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고 철혈공을 보았다.

어쩐지 일반적인 경로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의 비밀을 엿들은 기분이었다.

철혈공의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신위에도 급이 있고, 격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마왕……. 앙신이라 부르는 저 존재는, 신 중에서도 확연히 강한 존재지. 과거엔 저들이 이만큼 활개 칠 수 없었다. 그들을 견제할 만큼 막강하면서도 선한 신이 있었으니까.”

철혈공의 자색 눈동자에서 차가운 불꽃이 타올랐다.

“그 자리야말로 나의 지향점이며, 수천 년 동안 비어 있는 유일한 신명神名이지.”

나는 홀린 듯이 물었다.

“그 신명이 무엇입니까?”

“고서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때에 따라 군신軍神이나 전신, 혹은 투신鬪神 대우까지 받았지. 그러나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예의 신. 다시 말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철혈공의 말을 받았다.

“-무신武神.”

오두막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