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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1화 (121/172)

121화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있던 칠죄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

어쩐지 이 대화를 잊힌 무신 또한 엿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신이 될 수 있단 건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 의문이 들었으나,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말 그대로다. 내가 세운 업業이 적지 않고, 만신전萬神殿의 위치 또한 파악했다. 이외의 조건도 모두 충족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신이 될 수 있지.”

“…….”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신이 돼 봤자 내가 얻게 될 신명은 잡신雜神 수준일 테니까. 모든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신좌는 오직 하나, 무신뿐이다.”

철혈공의 무심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루안, 너 또한 마왕을 죽이려면 무의 신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아마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것이냐?”

내 표정을 읽은 듯 철혈공이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냐?”

“뚜렷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쩐지 그건 제 길이 아닌 듯합니다. 여태껏 쌓은 제 무학에 반反하는 느낌이랄까요.”

“…….”

“가주님, 인간이 신을 상대로 이기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 번만 더 고심해 주십시오.”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사람이 사람인 채로 신神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철혈공은 내 억지에 진지하게 응해 줬다.

턱을 쓸며 고민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려면… 기회가 여러 번 있어야겠지.”

“기회라 하심은.”

“목숨이 여벌로 있다거나, 몇 번이고 재도전할 수 있다거나. 혹은… 가장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아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거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인간이 신을 상대하려면 그 정도 불합리는 갖춰야 할 터.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이건 말 그대로 최소 조건이니까…….”

철혈공이 나를 보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지?”

“…아닙니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누군가에게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그리고 어쩐지, 내 뒤통수를 후려친 건 나의 스승 백노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삼 사흘 동안 푹 쉰 게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휴식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대놓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을 테니까.

‘어째 가호가 너무 좋더라니.’

역천逆天.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

모두가 갈망해 마지않는 힘일 테지만…….

철혈공의 말에 의하면, 마왕이 상대일 땐 이게 겨우 최소 조건이라는 듯하다.

그리고 마왕을 실제로 대면해 본 바로, 내 생각도 같다.

‘…좋아. 좋다고.’

애초에 쉬울 거란 생각은 안 했다.

다름 아닌 스승님이 내린 과업이니까.

마왕인지 뭔지, 다 때려잡을 때까지 한번 강해져 보자.

“달리 요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이 자리에서 모두 말해라.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들어줄 테니까.”

‘이 자리에서…라.’

그렇다면 이번에 세운 공功으로 받을 수 있는 보상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결정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언제까지고 제사장 토벌을 우려먹을 생각은 없다.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혹 본가에도 사역하고 있는 신수가 있습니까?”

무신과도 얘기를 나눴던 것.

악기의 내성을 기르는 방법이다.

“물론 있다.”

“혹시 계약을 주선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악기에 대항할 수단이 필요해서요.”

“어렵지 않은 일이지.”

철혈공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배드니커가 거느리고 있는 신수는 총 다섯 마리다. 녹색 사슴, 흰쥐, 회색 양, 검은 뱀, 그리고 푸른 개. 너는 이 중에서 무엇을 원하지?”

“음…….”

사슴이랑 쥐, 양은 뭔가 안 끌리고.

고른다면 뱀, 아니면 개인데…….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뱀이요.”

철혈공이 살짝 미묘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사슴이랑 쥐, 양은 너무 약해 보입니다. 개는 제가 파란색을 안 좋아해서요.”

딱히 뱀이란 동물이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단순 소거법으로 정한 셈이다.

그러자 철혈공이 픽 웃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도서관 사서는 아직 만나지 않은 모양이군.”

“네? 아… 네. 바로 수련회 가느라고 시간이 애매했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지하 도서관이란 게 진짜로 있기는 한 겁니까? 본관 건물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없던데요.”

“물론 있다. 계단으로 출입하는 곳이 아닐 뿐.”

“…….”

“네가 뱀을 선택했으니, 머지않아 만나게 되겠지.”

의미심장한 말.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혹시 가주님께서도 신수와 계약을 맺었습니까?”

“그렇다.”

“어떤 신수와 계약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슴과 쥐, 양, 개.”

“…음. 그 말씀은.”

“그래. 뱀을 제외한 모든 신수와 계약했다.”

철혈공이 묘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흑요정 쿠세트 이후, 검은 뱀과 계약을 맺은 자는 배드니커의 핏줄에서 한 명도 없었지.”

“…….”

저렇게까지 말하니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차올랐지만.

철혈공이 왠지 모르게 기대 섞인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주워 담기가 어려웠다.

“…거참 기대되네요.”

“달리 궁금한 건?”

오늘의 철혈공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고, 시간도 넉넉해 보였다.

나는 이참에 묻고 싶은 걸 모두 묻기로 했다.

“마왕 원정대는 어떻게 됐습니까? 진척이 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대면 때 말했던 무채색의 마왕- 즉 대사형의 토벌대를 말하는 것이다.

철혈공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건이라면 무기한으로 연장됐다.”

“…네?”

“전에 말했지. 마왕의 소재는 일정치 않다고. 무채색의 마왕이 또 주거지를 옮겼다.”

주거지를 옮겼다?

이건 나와 지옥에서 만났기 때문일까?

“다행히 추적은 가능했지만…….”

철혈공이 드물게도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해당 지역에 발을 들인 1차 정찰대, 정예로 구성된 50명이 행방불명됐다. 장소를 감안하면 죽었을 거라 보는 편이 맞겠지.”

“그곳이 어딥니까?”

“대륙 최악의 마경魔境이다.”

“제국 금지禁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거쳐 온 보석 산맥.

혹은 늪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혈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수십 배는 위험한 장소다.”

‘금지보다 수십 배 위험한 장소?’

그런 곳이 이 대륙에 있다는 건가.

“그러니 미안하지만, 전의 제안은 잊도록. 나 또한 그곳에서 널 지킬 여력은 없을 것 같으니까.”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말해 줄 수 없다. 이미 단서는 줬을 터.”

단서란 [대륙 최악의 마경]이라는 타이틀을 말하는 듯하다.

“그곳의 정보는 네 스스로 알아보도록. 그 정도도 못 한다면 발을 들일 수조차 없는 장소니까…….”

“…….”

“다만, 조언 정도는 줄 수 있다.”

“조언이요?”

“제국 아카데미에 마경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다.”

“누굽니까?”

“그것까지 말해 주면 의미가 없지.”

날로 먹으려다 실패.

역시 만만한 양반이 아니다.

“그자와 접촉할 수 있다면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겠지. 그 이후에도 마경을 목표로 할지는 네 의지에 달렸지만.”

제법 의미 있는 정보이긴 한데, 문제가 있다.

“…제국 아카데미 카르텔(Kartell)은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장소 아닙니까?”

“그렇지.”

“제 나이에 입학하기도 이미 늦었고.”

애초에 지금 와서 아카데미나 다닐 시간은 없다.

내가 은근한 시선으로 물었다.

“혹시 배드니커의 힘이라면 제국 법률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불가능하다.”

“넵.”

그러자 철혈공이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수련회는 어떻게 됐지?”

“최종 3위요.”

아마도, 라는 사족은 일단 뺐다.

“그렇다면 알아서 방법이 생길 것이다.”

“……? 일단 알겠습니다.”

“달리 할 말은?”

말투로 보니 이제 슬슬 마지막 문답인 듯하다.

나는 여태까지 중 가장 신중한 태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드니커에선 이번 수련회에 제사장이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그렇다.”

“그럼 사전에 막지 않고 방치했단 뜻이 되겠군요. 제사장을 죽이기 위해서.”

“그래.”

철혈공은 그 어떤 변명도, 핑계도 없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델락은 이 일을 반대했다.

만약 회귀 전에 아사드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이 일을 계획한 게 철혈공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의견을 밀어붙였던 자가 있을 텐데, 혹시 처벌받을 수 없는 위치입니까?”

- 애송아, 너는 배드니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이 가문이 품고 있는 진정한 힘과 비밀에 대해서.

아사드가 꺼냈던 말, 가주인 철혈공조차 어쩔 수 없는 인물.

하지만 난, 지금도 가끔 죽었던 녀석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쉽지는 않겠지.”

그럴 거라곤 생각했다.

사실 나도 반쯤 화풀이로 지껄인 말이다.

“그러나 네가 그자의 처벌을 바란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다소 놀란 눈으로 철혈공을 보았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음.”

철혈공은 살짝 고개만 끄덕거렸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허튼 말을 하지 않는 남자란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얘기가 생각보다 길어졌구나. 당분간 움츠리고 있을 생각인 듯하니 소가주 임명식은 따로 하지 않으마. 다만 앞서 말했던 권리는 모두 보장될 테고, 배드니커의 인간 절반 이상이 네 명에 복종할 테지.”

고작 절반, 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가문이 워낙 크다 보니 막강한 힘이다.

아마 뜻대로 다루지 못하는 인원은 소가주 신분으로 다룰 수 없을 만큼 높은 위치, 혹은 다른 형제자매를 지지하는 파벌이겠지.

“수련회의 수료식이 곧 열릴 거다. 늦지 않게 가봐라.”

“네.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하마.”

“네?”

“곧 선물이 갈 거다.”

아직 더 줄 게 남았다고?

내가 당황한 얼굴로 보니, 철혈공이 어울리지 않게 나직하게 웃었다.

“네가 응당 가져야 할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어쨌든 철혈공의 시선이 다시 에인즈번에게 향했기 때문에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남 고문당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에 오두막을 나섰다.

“후우…….”

피비린내 나는 오두막을 나섰을 때.

하늘엔 땅거미가 내려와 있었다.

‘오래도 얘기했구만…….’

제인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돌아간 걸까?

사용인으로선 무례한 일이었지만, 징수인이란 신분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아마 배드니커에서 가장 바쁜 집단일 테니까.

꾸르륵…….

“어우. 배고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배가 등에 붙을 지경.

일단 본가로 돌아가서 뭐라도 좀 먹을까.

아니면 수료식에서 맛나는 걸 좀 주려나.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힐끗 칠죄검을 내려다봤다.

“…….”

잊힌 신의 제단과 무신, 그리고 칠죄검.

이것에 대해선 철혈공에게 질문하려다 말았다.

어쩐지 지금 당장 묻는 게 시기상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최소 이선二璇의 경지는 달성한 다음에.’

나는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본가로 향했다.

사람이 적고 음침한 후원을 가로질러 담장을 지나서, 마침내 본가의 장원으로 돌아온 것.

수료식은 어디서 열리려나.

길 가는 사용인을 아무나 붙잡으면 들을 수 있을 거다.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어딘가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저 녀석은…….’

보기 드문 하얀색-이 아니라 은색 머리카락.

수련회 때는 대부분 한 갈래로 질끈 묶고 있었는데, 지금은 풀어헤친 머리가 풍성하게 흐르는 채다.

나는 반가움을 담아 외쳤다.

“흰둥아!”

“…히이익!?”

그러자 세렌이 과할 정도로 화들짝 놀라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어, 어어…….”

생각보다 훨씬 놀란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내가 살아 있단 걸 모르는 상태였던가?

꼴을 보니 카론이나 헥토르한테 전해 듣지도 못한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째 세렌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

“어, 음, 그러니까…….”

허둥지둥하던 세렌이 치마 끝단을 살짝 올린 채 꾸벅거렸다.

어울리지 않는 귀족식 인사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루안 공자님……?”

“…….”

“아, 아니면 전 약혼자님?”

상대가 누구든 치켜올라가 있던 눈매는 축 처져 있고, 항시 날이 서 있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간다.

“…….”

나는 겉모습만큼은 세렌이 분명한 소녀를 보며 눈가를 좁혔다.

이 녀석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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