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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2화 (122/172)

122화

엄청나게 닮은 사람인가?

아니면 자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강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내 안목이 사람 하나 못 알아볼 만큼 형편없지는 않단 말이지.

‘세렌이 맞는데?’

빤히 보니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태도…….

세렌의 얼굴로 저런 태도를 보이니 나름 신선하기는 한데.

“뭔데? 왜 안 어울리게 존댓말이야?”

“어, 어… 참……! 그랬지. 핫핫.”

핫핫?

“오늘, 날씨가, 참, 좋지?”

“…….”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고, 눈앞의 인물이 진짜 세렌이라면…….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둘이다.

지난 4주 동안 이 녀석의 성격이 확 바뀌었거나.

그도 아니면 연기를 하고 있거나.

물론 지금 보이는 소심한 모습이 연기인지, 여태껏 봤던 까칠한 쪽이 연기였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야, 너-.”

“아……! 그,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 아니라 가볼게! 그럼 안녕!”

세렌은 그 말을 남기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뒤를 쫓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자리를 피하는데 억지로 쫓아가는 것도 너무 예의 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를 지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긴 한데.

“모르겠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머리가 멍하다.

세렌이 여기 있단 건 수료식은 아직이란 뜻이니, 시작하기 전에 본가에 들러서 배 좀 채워야겠다.

* * *

수련회.

[절망의 6주]라고도 불리는 그 지옥 같은 일정이 마침내 끝났다.

“진짜 이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우냐?”

“그래, 운다. 시발……. 진짜 행복해서 눈물이 나온다고.”

“난 앞으로 엄마 아빠한테 진짜 잘해 줄 거야.”

“한 달도 안 갈 것 같은 결심이구만.”

6년과도 같은 6주를 보낸 영도 일동은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퇴소했고.

지금은 배드니커 본가 정원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아… 이 기름진 고기가 너무 그리웠어…….”

“이건 뭐야? 생선알이라는데?”

“와- 항구도시에서나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이건 나비주래. 나비를 담근 건가?”

“우웩. 난 절대 안 먹어.”

“마나 증진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쓰여 있어.”

“헉.”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린 음식의 행렬은, 배드니커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호화스러웠다.

까다로운 미식가였던 귀족들도 죄다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

물론 수련회 때문에 강제로 싸구려 입맛이 된 이유도 있긴 하지만.

연회는 가호식 이후 이어졌던 교류회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으나, 활기는 그때 이상이다.

자리를 채운 건 [위대한 가문]의 혈통, 즉 귀족 자제가 대부분이었으나 6주의 훈련 때문일까.

대부분의 영도가 이 순간만큼은 예의범절이란 놈을 잠시 머리에서 지웠다.

어차피 주변에 흉을 볼 사람도 없겠다, 어린 영도 대부분이 천박하게 웃고 떠들며 분위기를 즐겼다.

“…렉스를 위해 건배.”

“좋은 녀석이었는데. 빌어먹을…….”

물론 같은 조원, 혹은 친구를 잃은 영도들도 있었다.

그들은 연회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조용히 친우를 추모했다.

‘진짜 끝난 거구나.’

에반 헬빈은 아직도 조금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수료했다는 현실이 아직 믿기지 않는다.

사실 지금 이 연회도 교관 측에서 준비한 함정이고 진짜 마지막 시험은 남아 있다! …라는 반전이 있어도 그렇게 놀라진 않을 정도.

휘이이-.

이제는 조금 온화해진 밤공기가 뺨을 어루만졌다.

가로등의 불빛과 음식의 향기, 떠들썩한 영도들의 목소리가 기분 좋은 소음으로 다가왔다.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어쩐지 분위기에 취하는 느낌이다.

“에반은 이제 어쩔 거예요?”

그때 샤를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인이라도 마셨는지 얼굴빛이 조금 불그스름하다.

“어쩔 거냐니?”

“수료 이후에요. 선택지가 여럿 있잖아요.”

“아…….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참. 당신 변방 출신 귀족이었죠.”

저게 딱히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아니란 걸 이제는 안다.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니 샤를이 설명했다.

“배드니커의 수련회를 수료한 영도에겐 크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첫째로는 곧바로 헤로스에 입관하는 것. 물론 상위 3명 빼고는 정식 영웅이 아니라 견습 단계부터 시작하겠지만요.”

견습 영웅이란 기사로 치면 스콰이어 계급이다.

종자처럼 정식 영웅을 보조하며 업무를 배우다가, 해당 영웅에게 인정받고 이후 기관에서도 인정받으면 비로소 정식 영웅이 되는 방식.

“그거 괜찮네.”

에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헤로스 입관은 수련회에 참가하기 전부터 에반의 목표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영웅이란 신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개는 뭔데?”

“하나는 그냥 귀향하는 거죠.”

“아하.”

의외로 저걸 고를 영도도 많겠다 싶었다.

힘든 훈련을 끝내서일까.

나름 각오를 마친 에반도 고향의 정경과 아버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마지막은 제국 아카데미에서 추가 교육을 받는 거예요.”

“…굳이?”

에반이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아카데미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수련회까지 겪고 다시 교육 기관에서 수업받는 건 좀.

에반이 알기로 제국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은 최소 3년이다.

간혹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 1~2년 안에 모든 과정을 마치긴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년 단위로 걸리진 않아요. 특별 과정은 3개월이면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아카데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있고.”

“예를 들면?”

“실전은 배드니커의 수련회가 최고겠지만, 이론적인 부분은 어떨까요? 배드니커의 대사범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수업의 총량은 너무 적었잖아요.”

“음.”

저 말엔 에반도 동의한다.

애초에 수련회의 수업은 대부분 실전 기반이었다.

“반면 아카데미에 있는 자들은 이론적인 부분에서 전문가죠. 그곳에서만 쌓을 수 있는 인맥도 있겠고.”

“샤를은 아카데미에 갈 생각인가 보네.”

“맞아요.”

샤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솔직히 전 에반도 아카데미에 갔으면 좋겠어요.”

“나?”

“에반은 귀족으로서의 예법이 부족해요.”

“…….”

“농담이고, 아버지의 오명을 씻고 싶은 거잖아요?”

“그렇지.”

“제도야말로 제국의 중심이에요. 소문이 가장 빠르게 번지는 곳이기도 하죠. 아카데미에서 활약한다면, 에반의 이름은 몇 달도 안 돼서 제국 전역에 알려질걸요?”

저렇게 말하니 솔깃하다.

이번 수련회 때문에 어느 정도 방황도 끝났고, 자신감도 붙었다.

지금이라면 또래에겐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극소수의 몇몇만 빼면 말이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

“그러세요. 그나저나 이 꼬맹이는 대체 어디 갔-.”

“진짜 있었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샤를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예상대로 영도에게 둘러싸인 미르가 보였다.

“그러니까 네가 본 건 환각이래도.”

“맞아. 숲에 형성되어 있는 결계 때문에 잘못 본 거겠지.”

“나도 우리 누나가 갑자기 나와서 깜짝 놀랐어.”

그중엔 팜도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변을 봐. 살아 있는 영도는 전부 연회에 참가했는데, 루안은 안 보이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아니면… 진짜 유령이라도 본 걸 테고.”

팜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하니 미르가 찔끔했다.

“뭐, 이번 수련회에서 진짜 유령은 카론이랑 헥토르 님이었지만.”

카리스가 어깨를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나흘째였나……. 그때부터 그 두 명, 동맹이라도 맺었는지 갑자기 공이란 공은 다 뺏고 다녔잖아.”

스컬이 낙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나는 전신이 홀딱 벗겨졌어…….”

“그건 네가 멍청하게 속옷 안에 공을 숨겨서고……. 카론 그 녀석 가호 앞에서 뭘 숨길 생각을 하면 안 됐어.”

“에이씨. 밥맛 떨어지게.”

대화를 듣고 있던 에반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이 물었다.

“에반은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가 본 게 환각인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숲에서 갑자기 마주친 루안 배드니커는 파란색 공 세 개를 주고선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대화도 나눴고.

에반은 마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헛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적어도 만나고, 얘기를 나눴을 당시엔 그랬다.

이후 알게 됐다.

숲에서 루안을 목격한 영도는, 자신들의 조를 제외하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무슨 괴담도 아니고…….’

에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결과만 보면 자명하잖아.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니까.”

“그렇긴 하죠. 그때 준 공이 진짠지도 모르게 됐고.”

카론과 헥토르.

이번 수련회 최대 강자인 두 명이, 무슨 생각에선지 수련회 막바지에 동맹을 맺었다.

그 둘은 나비의 숲을 이 잡듯 뒤지며 영도들의 공이란 공은 다 뺏고 다녔는데…….

‘카론은 몰라도 헥토르 님이 왜?’

샤를은 그 모습에서 의문을 느꼈다.

영도들의 모든 공을 뺏고 다닌다는 건 등수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뜻인데-.

1위 자리에 있는 카론이라면 몰라, 마지막 시험으로 반등을 노리던 헥토르에겐 내키지 않는 전개일 것이다.

하지만 둘은 한 치의 불화도 없이 사이좋게 숲을 누볐다.

모종의 동질감이라도 생긴 것처럼 말이다.

목격한 영도의 증언에 따르면, 그 둘은 티격태격하긴 해도 제법 친해 보였다는 듯하다.

“크흠.”

그때 헛기침과 함께 갈색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검선생 칼자크다.

칼자크는 연회 중앙에 준비된 단상 위에 올라선 채로 외쳤다.

“-전 영도는 모두 주목! 지금부터 제61회 배드니커 수련회의 최종 성적을 발표하겠다!”

소란이 가라앉고 자연스레 영도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특별 시험의 점수 산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교관만이 알고 있다.

즉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등수를 확실히 알고 있는 영도는 없다.

‘카론과 헥토르가 공을 죄다 뺏고 다니긴 했지만…….’

‘모르지. 끝까지 안 뺏긴 녀석이 있었을지도.’

‘잘하면 나도 상위 등수를…….’

영도들이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단상 위를 직시하는 가운데, 칼자크가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상위 3인에게는 영웅기관 [헤로스]의 영웅패와 소정의 상금이 지급되지. 그럼 1위부터 호명하겠다! 카론 우드잭!”

이변은 없었다는 건가.

내심 헥토르를 응원하고 있던 샤를은 조금 아쉬웠지만, 귀족으로서 추하게 굴 수는 없는지라 덤덤히 축하해 줬다.

“그리고 2위! 헥토르 배드니커!”

“아.”

샤를이 살짝 놀랐다.

시험 시작 전에 헥토르의 등수는 3위였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반등을 꾀하셨구나.’

1위를 못 한 게 아쉽긴 하지만, 2위도 잘한 거다.

샤를은 감격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에반은 1위 때보다 훨씬 박수 소리가 크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면 3위도 변동이 생겼을 수도 있겠네.”

“그러게요.”

샤를은 3위에 들 만한 인재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제로스, 아니면 신바일 것 같은데.’

카론의 두 측근.

그 둘을 빼면 그나마 세렌 영애 정도?

세렌은 테이블에 홀로 앉은 채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샤를은 살짝 감탄했다.

세렌의 세련된 예법은 6주의 훈련으로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같은 귀족이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우아한 자태.

저걸 보아라.

단순히 와인을 마시는 동작에도 우아함이…….

“3위! 루안 배드니커!”

“넵!”

그리고 단상 뒤에서 명랑한 걸음과 함께 루안이 등장한 순간.

“푸후웁!”

세렌이 마시던 와인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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