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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4화 (124/172)

124화

“야, 정신 차려.”

“어흡.”

나는 고개를 털었다.

하마터면 망나니 루안 배드니커로 복귀할 뻔했다.

“돈 말고도 확인할 게 있으니까 봐 봐.”

그러고 보니 방엔 가죽 자루 이외에도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칼자크의 말대로 다가가서 슬쩍 뚜껑을 열어 보니…….

“이건…….”

범상치 않은 느낌의 은백색 갑옷이 보였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뱀 가죽 중 특히 질이 좋은 걸로 만든 갑옷이다. 근사하지?”

“음…….”

칼자크가 내 떨떠름한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표정이 왜 그래?”

“저랑 상성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나는 갑옷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대꾸했다.

얼음을 매만진 것처럼 차갑다.

이 갑옷. 방어력은 둘째 치고, 풍기는 냉기가 범상찮다.

극양의 무공을 다루는 내겐 적합하지 않은 장비란 뜻이다.

“이거 그냥 팔아도 되려나요?”

“돈 주고도 못 구할 물건이라 아깝긴 한데, 네 거니까 어떻게 하건 네 맘이지.”

칼자크는 그리 말하더니, 상자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갑옷이 별로라면 이건 어떠냐.”

“뭡니까?”

“벨트.”

뱀 가죽 벨트라…….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제 취향은 아닌 것 같-.”

“디자인이 아니라 기능을 봐라. 이거 갖고 다니면 제법 편할 거야.”

“어떤 점이요?”

“기본적으로 냉기를 두르고 있어서 착용하고 있으면 여름에 시원해.”

“생각보다 실용적이군요.”

“게다가 엄청 질기고 단단해서, 유사시 채찍처럼 써먹을 수도 있고.”

칼자크가 그리 말하며 벨트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짜악! 제법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얼음 조각이 부스스 떨어졌다.

“봐. 죽이지?”

“방금 길이가 늘어난 것 같은데…….”

“그것도 기능 중 하나지.”

“흐음.”

채찍이라.

칠죄검이 있긴 하지만, 보조 무기로 써먹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상대의 허를 찌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손맛이 찰질 것 같다.

“그거 좋네요.”

“이거라도 맘에 들어서 다행이군.”

칼자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어흠……. 케이안 경? 잠깐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으신가?”

“그러지요.”

케이안이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순순히 떠났다.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다.

쿵.

이제 방엔 나와 칼자크 둘만 남은 상태.

나는 무언가 결심한 듯 날 보는 칼자크를 보며 선수를 쳤다.

“됐습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사과할 생각 아니었어요?”

“…….”

칼자크가 침묵하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맞아. 내 병신 짓 때문에 다 망칠 뻔했잖냐.”

“그렇긴 하죠.”

“…….”

일부러 장난을 쳤는데도 반응이 없다.

어울리지 않는 시무룩한 태도에 오히려 내 쪽에서 김이 새 버렸다.

“미안한 건 알겠는데 굳이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까?”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에요. 칼자크는 산맥에서 절 구해 줬잖습니까.”

“하지만, 그건-.”

“그때 상황이 어쨌니, 그편이 가장 합리적이었다느니. 그런 얘긴 됐고요. 그때 졌던 목숨 빚을 이번에야말로 치렀다고 칩시다.”

“너는 그걸로 된 거냐?”

“목숨 빚은 목숨 빚으로만 갚을 수 있잖습니까.”

칼자크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군. 그건 남부 용병들이 떠드는 격언인데…….”

그러고 보니 이 양반도 용병 출신이었다.

말투를 보니 대사범이 되기 전엔 남부에서 굴렀던 듯하다.

뭘 숨기랴.

영산에 끌려가기 전,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게 그 시궁창이었다.

“…일단은 알겠다.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 말해라.”

“뭐든요?”

“그래. 뭐든.”

“…….”

가벼운 남자긴 한데, 이런 걸로 농담할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생각났는데, 제 링소드는 어떻게 됐습니까?”

“미안. 부쉈어.”

“그건 갚으십쇼.”

칼자크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후안 선생 말인데요.”

“…….”

칼자크의 몸이 멈췄다.

“처음부터 맛이 간 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마왕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녹색 혀의 마왕, 탕타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 네……! 일전의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 제, 제가 심장을 요구하니 인간이 울부짖더군요……. 다, 다른 것이라면 뭐든 줄 수 있다던데… 그, 그럴 순 없죠. 워, 원래 값진 걸 잃었을 때의 표정이… 가장 재밌잖아요……?

나는 후안 선생을 동정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마왕에게 죽은 것도 자업자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적 감상과는 별개로, 이 진실은 칼자크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냐.”

칼자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고개가 살짝 떨궈졌다.

진실을 전해 줬으니 어떻게 판단할지는 스스로의 몫일 것이다.

“고맙다, 루안 배드니커.”

떠나기 직전 짤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억눌린 목소리였으나, 나는 모른 체했다.

* * *

이튿날 아침.

나는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 좋다.”

불편하고 좁아터진 영도 동의 침실에, 춥고 불편한 야외 취침만 하다 간만에 침대다운 침대에서 푹 잤다.

나는 개운한 심정으로 즉시 운공한 다음, 목 관절을 풀며 방을 나섰다.

“아,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어어.”

처음 보는 하녀가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 밖에도 뭔가 소철당이 북적거리는 느낌이다.

어젠 늦은 밤이라 다 자고 있었던 걸까?

슬쩍 보니 하녀, 하인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복도를 닦고, 창틀을 닦고, 화분에 물을 닦고 있었다.

“기침하셨습니까, 도련님!”

“좋은 아침입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인들은 내가 지나갈 때면 하던 업무를 멈추고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마주친 하녀들도 죄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본가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천차만별의 태도다.

새삼 내 처지도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

‘이러면 밥 먹으러 본채까지 안 가도 되려나.’

그런 생각과 함께 1층에 있는 식당을 향했다. 음식은 차려져 있지 않지만, 입맛 돋는 냄새가 풍겼다.

숙수로 보이는 사내가 오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곧 식사가 나올 겁니다. 가리는 음식이 있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요.”

“맛만 있으면 다 잘 먹어.”

“잘 알겠습니다.”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케이안이었다.

“좋은 아침이야.”

“일어나셨습니까.”

케이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식전에 차 한 잔 어떻습니까? 숙취에 좋은 생강차가 있습니다.”

“좋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케이안이 푸근한 미소와 함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다도茶道를 즐기는 걸까?

이 강직한 노인의 옆얼굴에서, 처음으로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다.

“여기 있습니다.”

“음.”

향부터 맡은 다음, 찻물을 살짝 들이켰다.

“미안. 훌륭한 차 같은데, 말재주가 없어서 표현을 못 하겠네.”

“그 말씀이야말로 극찬입니다.”

잠시 후 숙수가 음식을 내왔고, 나는 간만에 느긋한 마음가짐으로 아침을 먹었다.

“도련님은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식사가 끝난 다음, 케이안이 내게 물었다.

나는 식후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아카데미에 갈까 싶어.”

“그렇습니까. 그럼 휴식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겠군요.”

“응?”

“제도로 향하는 마차는 1주일 뒤에 출발할 겁니다. 특별 교육 과정의 일정에 맞추려면 그때 가셔야겠지요.”

“1주일이라……. 적당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영도 중에선 누가 가는지 알아?”

“글쎄요. 신청은 출발 직전까지 받기 때문에 계속 변동이 생길 겁니다. 일단 최대 인원은 10명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0명이라…….

과연 저 수가 모두 채워질지도 궁금하다.

“만약 그 이상으로 신청자가 몰리면?”

“수련회의 성적으로 끊습니다.”

배드니커다운 해결 방식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배도 채웠으니, 밖에 나가서 가볍게 몸이라도 풀어야겠다.

“다른 영도들은 어떻게 됐어?”

“절반 이상이 오늘 아침에 떠났습니다. 남은 이들은 배드니커를 통해 헤로스에 입관하거나, 혹은 아카데미로 향하겠지요.”

“저택 1층 객실에 머물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뭐들 하고 있는지 한번 구경이나 할까.

아카데미로 가는 녀석들이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케이안을 대동한 채 소철당을 나섰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아직 시린 늦겨울 날씨.

아직은 삭막한 배드니커의 정원을 거닐고 있자니, 어쩐지 막 피어난 꽃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올 즈음엔 아카데미에 있으려나.

“하압!”

그때 커다란 기합성이 귓전에 닿았다.

정원 너머에 있는 연무장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 두 명이 보인다.

카론과 헥토르다.

“겨루는 건가?”

“그런 듯하군요.”

“오호.”

세상에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게 없다.

카론은 단검 두 자루를 다루고 있었고, 헥토르의 무기는 당연히 검이다.

슬쩍 봤을 때 우세해 보이는 건 헥토르 쪽. 뜻밖의 결과는 아니다. 동굴에서 겨뤘을 때 깨달았다.

이제 대인전 능력만큼은 확실히 헥토르 쪽이 우위다.

교전은 오래 이어지지도 않았다.

시종일관 밀리던 카론이 찰나의 방심으로 단검 한 자루를 놓쳤다.

헥토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카론을 제압했다.

“…….”

카론이 까득 이를 갈더니, 남은 한 자루의 단검도 내팽개치듯 놓았다.

사실상 패배를 시인한 것이다.

“좋은 대련이었다.”

헥토르가 무뚝뚝하게 말하며 납검했다.

지켜보고 있던 영도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샤를의 목소리가 유난히 큰 것 같다.

헥토르가 땀을 닦으며 살짝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순간, 샤를이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염병을 떠네.

카론은 검을 주운 채 연무장에서 퇴장했는데, 공교롭게도 걸어오는 쪽이 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비틀거리며 걷던 녀석이 날 보더니 흠칫 몸을 떤다.

“넌…….”

“좋은 아침.”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나는 주먹을 들며 다시 말했다.

“좋은 아침.”

“조, 좋은 아침.”

이 새낀 아침 인사 하는 법도 모르는 건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의아하다.

가끔 보면 미르 이상으로 상식이 없어 보인단 말이지.

“대련 잘 봤다. 아주 속절없이 털리던데?”

“…….”

“속이 뒤집히지? 수련회 전만 해도 헥토르보다 네가 훨씬 강했을 텐데.”

대놓고 비아냥거리니 카론이 나를 노려봤다.

그러한 눈빛을 받으며 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스승님을 닮은 걸까.

몇 대 쥐어 팼다고 굽신거리는 놈보단, 이렇게 끝까지 눈빛이 살아 있는 놈이 좋다.

“…내 특기는 사람과 싸우는 게 아니다. 사냥이지.”

“그러시겠지. 그런데 그 잘나신 사냥 실력도 얼마 안 가 따라잡힐걸.”

“뭐라고?”

나는 대꾸하지 않고 지나가라는 듯 턱짓했다.

카론은 주먹을 말아쥐더니 나를 홱 지나쳤다.

‘잘 다듬으면 쓸 만할 것 같긴 한데.’

카론도 여러모로 의아한 점이 많은 놈이긴 하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다.

‘지하도서관.’

지금 본가를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즉 아카데미로 떠나기까지 앞으로 1주일.

그 기간 내로, 반드시 찾아야 한다.

* * *

임시라고는 해도, 소가주란 직책이 편하긴 하다.

이 넓은 땅을 제집처럼 돌아다녀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참. 우리 집 맞지.”

가끔 시간이 날 땐 본가에 머무는 영도 놈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같이 밥을 먹었다.

덕분에 아카데미에 가는 놈들이 누군지 대략이나마 알게 됐다.

그 밖의 시간은 당연히 지하도서관 탐색.

본채는 물론이고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별채, 사용인들이 쓰는 숙소와 창고까지…….

건물이란 건물은 싹 다 뒤졌지만, 지하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찾지 못했다.

그나마 사용인 숙소 같은 곳엔 지하 공간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창고로 쓰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사흘째 되는 날에 결론을 내렸다.

“이거 직접 발로 뛰어서 찾는 건 불가능하겠구만.”

이제 남은 수단은 수소문.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건 하녀장이다.

수련회 전, 지하도서관을 찾을 때 내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던 그 하녀장 말이다.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 다만,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지요.”

하녀장은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도련님, 지하도서관이라 해서 반드시 건물을 통해야 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

나는 살짝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부턴 건물만 뒤지는 게 아니라, 가문 장원을 전체적으로 탐색했다.

혹시 통로가 [나비의 숲]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냥 포기하는 게 맞다.

숲이 얼마나 넓은데.

‘그래도.’

난 묘한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숲이 아닌 장원 어딘가에 반드시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이틀 뒤…….

“…….”

마침내 찾았다.

출입이 금지된 후원 너머, 담장 없이 곧장 숲과 이어지는 장소.

공교롭게도 지난번에 철혈공과 만난 오두막 근처였다.

오두막 뒤쪽엔 우물이 있었는데, 수원이 메마르고 오래 방치된 우물이었다.

즉, 이 우물은 사람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통로다.

스으으-.

날씨도 많이 풀렸는데, 어쩐지 밑에선 서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으음.”

역시 직접 가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목덜미를 매만지다, 우물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탓.

“…….”

우물 자체는 좁았지만, 밑의 공간은 훨씬 넉넉했고 정면엔 우둘투둘한 흙길까지 파여 있었다.

사람 두셋 정도는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큰길.

유심히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토굴은 아니었다.

‘뚫린 지 좀 된 길 같은데.’

저벅-.

일단은 나아간다.

혹시 모르니, 뭐가 튀어나오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 긴장감을 끌어올린 채로.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서 갈림길이 나왔는데… 갈림길 중앙엔 뜬금없이 팻말까지 꽂혀 있었다.

가장 기괴한 건 팻말에 적힌 문구였다.

[1. 다음 중 배드니커의 신수神獸로 올바른 것을 고르시오. (1점.)

① 사자 ② 늑대 ③ 사슴 ④ 올빼미

※주의사항※ 오답 시, 손가락 하나.]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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