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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6화 (126/172)

126화

‘깜짝이야.’

담력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외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가장 처음 보인 건 새까만 머리카락.

아무리 흑발이라고 해도 빛과 부딪치면 어느 정도는 밝은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저 머리카락은 아예 빛을 죄다 빨아들이는 것 같다.

머리카락은 심지어 엄청나게 길었다.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몇 미터는 거뜬히 넘을 듯하다.

당연히 머리카락은 몸뚱이를 타고 흘러내려, 살짝 고인 물 위에 해초처럼 펼쳐져 있었다.

앞머리조차 정돈하지 않아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언뜻 드러난 체형은 생각보다 왜소했다.

겉모습으로 판단할 존재는 아닌 것 같지만, 일단은 꼬맹이였다.

“손님이 온 건 근 40년 만인가…….”

느릿한 어조에 딱히 적대적인 기색은 없었지만.

내 본능은 이 마법사와 조우한 이후, 계속 경종을 울려댔다.

‘이거… 뭔가 엿 된 것 같은데.’

나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철혈공과 아사드가 지닌 절대자로서의 위압감이나.

마왕 같은 신적 존재와 대면했을 때 느껴진 경외감.

그 둘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압박감이 이 마법사한테서 느껴졌다.

일단 나는 예를 갖춘 채 고개부터 숙였다.

“저는 루안 배드니커라고 합니다.”

내 정중한 자기소개에도 마법사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육체에… 배드니커의 피가 흐른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 몸이 지금 알고 싶은 건 하나. 어떻게 문제를 전부 푼 거지. 단순히, 영특하다고 맞힐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는데.”

어조 자체가 어눌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꼭 대화 자체를 오랜만에 하는 사람처럼.

‘40년 만의 손님이라고 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닌가?’

어쩐지 내 직전에 방문한 손님은 철혈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위압적인 태도는 아니고, 겁박하려는 기색도 없었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나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평소 잊힌 시대,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흐음.”

마법사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델락 놈, 처음 듣는 자식 얘기를 꺼낼 땐 드디어 미친 건가 싶었는데……. 그래. 최소한의 역량은 갖춘 놈이렷다.”

“…….”

철혈공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부르던 사람과는 몇 번 만났지만, 이렇게 대놓고 힐난하는 존재는 처음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마법사님이 지하도서관의 사서가 맞습니까?”

“그러한 직책도 맡고 있지.”

마법사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한 다음 서책의 산 위에 앉더니 손을 뻗었다.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던 책 한 권이 창백한 손에 빨려 들어갔다.

마법사는 책을 팔락팔락 넘기며 말했다.

“도서관의 출입은 네가 먼저 요청했다고.”

“네.”

“뭘 찾느냐.”

“마왕에 대한 정보입니다.”

이것까지는 철혈공에게 듣지 못한 모양인지, 책을 읽던 마법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마왕.”

“네.”

“네 실력으로 입에 담을 존재가 아닌 듯한데.”

그렇겠지.

내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니, 마법사가 말했다.

“아직 어려도 [위대한 가문]의 혈통이라는 것이냐?”

딱히 그렇지는 않다.

물론 이번 수련회에서의 일로 악마와 교단이란 것들에게 학을 떼게 됐지만…….

별개로 현재 내가 마왕의 정보를 얻으려는 이유는 대사형 때문이다.

“시기상조의 지식보다 위험한 건 없지만… 너는 내가 준비한 문제를 풀어 총 35점을 얻었다. 즉, 이곳에서 35점 가치만큼의 서적을 대여할 수 있단 뜻인데.”

‘아하.’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거였구나.

눈앞의 마법사는 단순히 침입자를 골리기 위해 어려운 문제를 준비했던 건 아닌 듯하다.

물론 문제를 틀릴 때마다 눈알이니 손가락이니 했던 걸 감안하면,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35점으로는 총 몇 권의 책을 대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네가 찾는 책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각 서적마다 가치가 천차만별이니까.”

마법사는 연극이라도 하듯, 한쪽 손을 우아하게 뻗으며 말했다.

“이곳은 금서禁書의 무덤. 네가 찾는 마왕과 관련된 서적 또한 물론 보관되어 있지만, 그 위험성은 금서 중에서도 특히나 높다. 가장 가치가 낮은 서적도 최소 10점은 써야 할 터.”

“…….”

“아이야, 배드니커의 피를 이었다면 너 또한 무인이겠지. 네가 얻은 점수는 쓰기에 따라 실전된 연단법이나 가공할 힘을 가진 무술서 또한 얼마든지 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마왕의 서적을 원하느냐?”

“그렇습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솔깃할 말이었지만, 나는 딱히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좋다. 어떤 마왕을 찾고 있느냐.”

“무채색의 마왕입니다.”

“바라는 정보는.”

“전부.”

그러자 마법사가 곧바로 대꾸했다.

“부족하다.”

“예?”

“아이야, 너는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마법사가 손을 휘저은 순간, 괴이한 빛무리가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단순한 반딧불이처럼 보이기도 했고, 영산에서 본 도깨비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든 그 정체불명의 빛 덕분에 주변이 좀 더 밝아졌고… 나는 비로소 이 공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곳에 보관된 서적의 개수는 총 20만 하고도 3만여 권에 이른다.”

“아…….”

나는 이 지하공간이 내 생각 이상으로 넓다는 사실을 한눈에 깨달았다.

옅게 고인 물 위로 은은하게 떨어지는 푸르스름한 빛줄기는 꼭 달빛이 내려앉은 한밤중의 호수 같았다.

“-적은 수는 아니지. 그중에서 무채색의 마왕에 관한 책은 잘 추려도 1,000권이 넘을 터. 최소 10점으로 계산해도 대여엔 일만 점이 필요한데, 네 점수는 고작 35점이다. 턱없이 부족하단 뜻이지.”

“음.”

내 생각보다 훨씬 책이 많이 보관된 장소였다.

여기서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사형……. 무채색의 마왕에 대한 정보는 무엇부터 요구해야 할까?

인상착의나 성격, 특징, 배운 무공과 사용하는 무기까지…….

공교롭게도, 이 세상에서 대사형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나일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있는 정보를 무시할 수는 없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건 백노광의 첫 번째 제자인 제일무극검 하루이지, 무채색의 마왕이 아니니까.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살짝 화제를 바꿨다.

“마법사님은 혹시 신수에 대해서도 잘 아십니까?”

“그건 왜.”

“가주님께 신수 계약에 대해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러니 다섯 마리의 신수를 말씀하셨고, 저는 뱀을 골랐죠.”

“왜 뱀을 골랐지.”

“…그나마 저랑 잘 맞을 것 같아서요.”

살짝 돌려 말하니, 마법사가 침묵했다.

나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듣기로 뱀에 대해서도 마법사님이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계약을 주선해 주실 수 있습니까?”

“…큭큭큭.”

그 순간 마법사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고, 나는 티 나지 않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여태까지 보인 나른하고 초월적인 분위기와 달리, 지금 웃음엔 선명할 만큼의 악의가 느껴졌다.

“델락이 그렇게 말하더냐?”

“네.”

“달리 덧붙인 말은.”

나는 철혈공과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흑요정 쿠세트 이후, 뱀과 계약을 맺은 자는 한 명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대로다. 나는 누구와도 계약할 생각이 없어.”

“…….”

나는?

그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말씀은…….”

“델락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스으으…….

언뜻 보이는 입가가 초승달처럼 쭉 찢어지더니, 해초처럼 떠다니던 머리카락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출렁였다.

촤아악-.

머리카락은 곧 수십 마리의 뱀이 됐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뱀 무리는 길쭉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나를 에워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보석 산맥 때부터 뱀 새끼들과 지독하게도 얽힌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나의 이름은 리세라디고스 올 하이무드. 가장 짙은 어둠을 유영하는 사룡蛇龍이자, 창천을 가로지르던 칠색七色조차 물들이지 못한 흑천黑天의 마도사.”

“…….”

리세라디고스란 이름을 들은 적 있지만.

지금 내가 그보다 더 주목한 건 이 존재의 미들네임이었다.

올.

내가 알기로, 그 미들네임이 허락된 건 이 넓은 대륙에서도 단 하나의 종족뿐이다.

이제는 대륙에서 사라진 종족이자 배드니커의 선조.

“흑요정…….”

그러니까 눈앞의 마법사는…….

마법사이자, 신수이자, 흑요정인 존재라는 뜻인가?

‘뭐 이런 잡종이-.’

리세라디고스가 말했다.

“계약에 대해선 됐고, 마왕에 대해서 다시 묻도록 해라.”

어쩐지 귀찮은 불청객을 대하는 태도다.

계약에 대해서 좀 더 파고들까도 했지만, 어찌 됐건 내 목적도 신수보단 마왕이었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

“혹시 서적을 대여하지 않고, 마법사님이 알려 주실 수는 없습니까?”

“무슨 뜻이냐.”

“본디 올바른 사서의 책무란 관리하는 도서관의 서적을 모두 읽는 데서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 마법사님이 이곳에 있는 모든 서적을 읽었다고 확신합니다.”

“뭘 근거로.”

할 거 더럽게 없는 곳처럼 보이니까 책이라도 왕창 읽으셨겠지… 하는 본심은 숨긴 채, 나는 대답했다.

“다름 아닌 가주님이 [지하도서관의 사서]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가주님의 기준은 엄격합니다. 한낱 몸종이라도 기준에 부합 못 하면 절대 인정하지 않으시지요. 그런 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법사님을 사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델락의 안목을 믿겠다는 것이냐.”

“제가 알기로 가주님이야말로 배드니커에서 가장 공명정대한 분이십니다.”

여기서부턴 살짝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혹 마법사님께서 제가 필요한 서적의 정보를 정리해서 말씀해 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

잠깐 침묵하던 리세라디고스가 픽 웃었다.

“혓바닥이 매끄러운 놈이로구나. 여태까지 이곳을 방문한 모두가 금서에만 정신이 팔렸는데…….”

“…….”

“내가 아닌 사서란 직업을 존중하다니……. 배드니커답지 않기도 하고, 좀 재밌군.”

촤아악…….

그리고 나를 노려보던 흑색 뱀들은 다시금 머리카락이 돼서 물 위에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느껴졌던 압박감도 씻은 듯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그럼 내 독단과 편견으로 무채색 마왕에 대한 정보를 말해 주마. 딱 35점 치 정보를 말이야.”

“말씀을 듣다가 의아한 점이 있으면 좀 더 깊게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도록.”

리세라디고스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무채색의 마왕은 가장 독자적인 마왕이다. 전신을 감싼 칠흑의 갑주甲冑 때문에 누구도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형태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가장 인간에 가깝지.”

갑주.

지옥에서 마주쳤을 땐 보지 못했는데, 평소엔 그런 걸 입고 다니는 걸까.

“지옥에서도 세력을 형성하지 않고, 영지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걸로 알고 있다. 또 무채색의 마왕을 숭배하는 파벌은 더 이상 교단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더군.”

나는 살짝 놀라서 물었다.

“그 말은… 교단과 완전히 개별적인 세력이 됐다는 뜻인가요?”

“그렇지는 않다. 서로 간에 교류는 적지만 접점은 남아 있고, 교주의 명엔 어느 정도 따르는 기색을 보이니까……. 다만 다른 파벌처럼 적극적이진 않단 거지.”

“음…….”

“무채색의 마왕을 따르는 파벌은 세력이 가장 작고, 은밀하다. 교인 이상으로 찾기 힘든 자들이지. 마왕과의 관계 또한 일방적인데, 설령 제사장이라도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는 없다더구나.”

내 생각 이상으로 귀중하고, 가치 있는 정보가 연이어 튀어나왔다.

‘일단, 그 수는 적지만 대사형을 따르는 교단도 있다는 뜻이구나.’

내게 있어 대사형은 아직도 대사형이다.

그런 사람을 신神으로서 숭배하는 단체가 있다고 하니, 대단히 복잡한 심정이 됐다.

‘…한 번은 만나 보고 싶은데.’

물론 일반 교인도 찾기 힘든데, 그 수가 가장 적고 은밀하다는 무채색의 교인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어쩐지 대사형과 본격적으로 맞닥뜨리기 전에 한 번은 마주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근거 따위 쥐뿔도 없는 예감이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옥에서 보았던 탕타타를 떠올리며 물었다.

“다른 마왕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마왕이란 존재가 대체적으로 그렇지만.”

“그럼 혹시 무채색의 마왕의 목적도 알고 있습니까?”

“지금으로선 밝혀진 바가 없다.”

“음…….”

“마지막으로 현재 무채색의 마왕이 머무는 장소 말인데.”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것까지 말해 준다고?’

게다가 이어지는 마법사의 말은, 앞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선사했다.

“무채색의 마왕은 현재 영산靈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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