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7화 (127/172)

127화

영산靈山.

설마 이 단어를, 이런 곳에서, 심지어 흑요정 마법사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라고요?”

“영산이라고 말했다.”

리세라디고스는 얼빠져 있는 나를 보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대륙 동쪽 끝에 기이하게 생긴 반도半島 형태의 땅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태산 중 한 곳이지. 아마 현재 대륙 최대의 마경魔境 중 하나로 꼽히고 있을 것이다.”

“…….”

나는 이어지는 말에 살짝 정신을 차렸다.

리세라디고스가 말한 영산과, 내가 알고 있는 영산이 전혀 다른 곳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명이, 좀 특이하군요.”

“듣기로 무채색의 추종자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하더군.”

“…….”

저 말은 아마 진실이 아닐 거다.

이 세상의 영산이 어떻게 생겨 먹은 장소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사형이 머무는 장소의 이름이 영산인 게 단순한 우연일 리는 없다.

즉 산에 영산이란 이름을 붙인 건 대사형이며, 신도란 놈들은 그걸 따라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

‘어째서?’

대사형은 스스로 영산을 떠났다.

처음엔 무언가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만난 바로는 그게 아니었다.

대사형은, 모두 버렸다.

스승과 사형제 간의 인연, 관계, 추억까지 전부. 그 무엇보다 사명을 우선하는 사람이 종종 그런 행태를 보인다.

그랬던 대사형이, 어째서 산의 이름을 영산으로 지은 것일까.

‘…….’

지옥에서 보았던 마왕이 아닌, 기억 속 대사형을 떠올린다.

대사형은 대체로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건 딱히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즐거울 때면 더 크게 웃었고.

곤란할 때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으며.

밥을 먹기 전엔 항상 누군가를 향해 기도를 올렸고.

영산에 머물던 마물, 요괴를 죽인 이후엔 항상 묵묵한 표정으로 참회했다.

설령 하늘 같은 스승님의 말씀이라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맞서 싸웠다.

그래서 나는 스승님 다음으로 대사형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항상 웃고 있는 이유는, 삶을 언제나 즐거움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본디 웃음이란 여유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그러나 나의 세상에서, 무채색의 마왕은 나라를 멸망시켰다.

하나의 나라.

과연 그로 인해 쏟아진 피는 얼마나 될까.

“-자.”

박수라도 치듯, 리세라디고스가 내 주의를 일깨웠다.

“이 정도면 35점에 대한 값어치는 충분히 치렀을 터. 바깥에서 이것에 대해 찾으려면 고서를 최소 수백 권은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 말이 맞다.

아마 오늘의 문답으로, 나는 최소 몇 개월의 시간을 절약한 셈일 터.

다만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한 상황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그런가요? 잠을 설쳤나.”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안개가 낀 머릿속은 쉽게 환기가 되지 않았다.

“볼일이 끝났다면 이만 가보도록.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니 목이 아프구나.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뭐 하느냐. 얼른 가지 않고.”

나는 리세라디고스를 보며 물었다.

“저는 이곳에 또 올 수 있겠습니까?”

“지하도서관은 재방문을 바라지 않는다. 어떤 손님이건 단 한 번만 들를 수 있지.”

그럴 것 같았다.

금서의 무덤이란 거창한 이름이 달린 곳이니만큼, 이곳에 존재하는 건 대부분 위험한 지식일 터.

평범한 사람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그런 지식 말이다.

‘요컨대, 나한테 반드시 필요하다.’

어찌 됐든 앞으로의 내 인생은 교단이란 놈들과 지독하게 얽히게 될 것이다.

거기에 무신이나 칠죄검, 잊힌 시대, 신좌까지……. 알아야 할 것들이 줄기는커녕 점점 늘고 있는 모양새.

그러니 지하도서관의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달리 방법은 없을까요? 전 앞으로도 이 도서관에 종종 방문하고 싶은데.”

“그딴 사항은 계약에 없었다. 꺼져.”

슬슬 말투에 날이 서고 있었다.

축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다시금 일어서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게 뱀의 형체를 갖추기 전에 말했다.

“그렇다면 거래는 어떻습니까?”

“거래?”

“제게 책의 대여를 허락해 주시면, 저도 그에 상응하는 걸 드리겠습니다.”

리세라디고스의 눈동자에 어이없는 빛이 스쳤다.

“너는 거래의 정의에 대해 알고 있느냐?”

“그야 물-.”

“아직 대답하지 말거라. 단어의 개념조차 모를 거라 생각되지는 않으니. 내가 궁금한 건, 아이야. 약관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대체 이 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마법사, 괴팍한 건 분명하지만 어쨌건 말은 통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갑자기 어떻게 바뀔지 몰라서 마법사란 놈들이 피곤하다는 거지만…….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없다.”

이건 거짓말이 아닐까?

애초에 진짜 원하는 게 없다면, 내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과 별개로 이 대화를 이어 갈 이유가 없다.

당장 힘으로라도 내쫓겠지.

물론 앞서 말한 ‘계약’이라는 말로 짐작하건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조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리세라디고스는 날 시험하고 있다.

역시 음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할 만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을 여럿 떠올렸다.

간단하게 돈을 대가로 줄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무려 5,000골드를 가지고 있는 자산가니까……. 아니면 그 돈으로 마도학에 필요한 재료를 대신 가져다줄 수도 있고.

‘하지만…….’

이상한 확신이 든다.

지금 머릿속에 떠올린 것들은 죄다 오답이라는 확신이.

“한번 지껄여 봐라. 단, 만약 대답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무슨 대가요.”

“아직 어리니 목숨까진 빼앗지 않으마. 하지만 오른팔 한쪽은 내놓아야겠지.”

한숨이 나올 뻔했다.

이쯤 되면 내 오른팔에 뭔가 마가 껴도 단단히 낀 것 같다.

케이안에게 힘줄이 잘린 과거, 회귀 직전에 제사장에게 팔이 잘린 게 떠오른다.

나는 반쯤 홧김에 내뱉었다.

“마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

“마법을 알려 주겠다고?”

“네.”

“…학.”

리세라디고스가 얼이 빠진 반응을 보이더니,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하, 학, 하학, 학, 하하하하…….”

나는 잠시 후에 그게 웃음소리란 걸 알게 됐다.

이 마법사는 생긴 것만큼이나 웃음소리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재밌구나, 아이야. 이렇게 웃은 게 얼마 만인지…….”

“…….”

“마법을 알려 주겠다? 수백 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로구나. 아이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배드니커의 뱀 신수시자 고대의 흑요정, 지하도서관의 사서, 그리고 마법사이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

리세라디고스가 흥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야, 다시 묻겠다. 밤하늘의 파수꾼이자 암흑탑의 적법한 주인, 아홉 룬 문자의 창시자인 나 리세라디고스에게 마법을 알려 주겠다고? 너는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목소리에 담긴 분노가 느껴진다.

내가 자신을 모욕했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네.”

이 마법사는 알고 있을까?

나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달갑다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신 마법,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 * *

리세라디고스는 눈앞의 애송이를 보았다.

배드니커의 혈통이라기엔 그 특징이 무척이나 옅다.

일단 거슬릴 만큼 밝은 저 백금발은 흑요정에겐 없는 특징이다. 피부색도 도자기처럼 하얗다.

눈동자 색이 아니라면 배드니커인 줄도 모를 거다.

즉.

이렇게 마주하고 있어도, 리세라디고스의 마음이 흔들릴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희한하군.’

예의는 갖추고 있다.

때때로 놀라는 모습과 당황하는 얼굴에선 경계의 빛까지 엿볼 수 있었다.

리세라디고스를 마주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

차이가 있다면 하나인데…….

‘두려움이 없다.’

이게 가장 이상한 일이다.

리세라디고스는 자신이 풍기는 분위기를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바라서 그렇다.

어지간히 수양 깊은 녀석이 아니라면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터.

그런데 이 꼬맹이는.

이쪽이 제법 공들인 위협을 가하고 있는데도 태도엔 흔들림이 없다.

나이를 보니 이런 경험이 잦았던 건 아닐 테고, 그냥 타고난 성정일까.

“…뭐, 좋다. 한번 말해 보거라. 이 몸이 경험하지 못한 마법이란 것을.”

아무튼.

이 꼬마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하나는 성공했다.

리세라디고스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 말이다.

호기심이라는,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을 끌어냈으니.

그래도 이 애송이가 하나 더 알아야 할 게 있다.

“하지만 알량한 지식으로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라면,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마법사의 호기심을 끌어낸 것은, 경우에 따라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짓이란 걸.

* * *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내가 묻자 마법사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말했듯이 우선은 오른팔을 가져가겠다. 그리고 혀도 자르마. 헛소리나 지껄여 대는 혓바닥은 더는 필요가 없을 테니.”

팔을 자르고 혀도 자르겠다니.

징수인 시절 케이안이 양반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아이야, 너는 쓸데없는 것을 묻는구나. 혹 나를 속일 셈이냐?”

“그럴 리가요.”

사실 알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방금 대화로 확신이 생겼다.

“그럼… 라디리세고스 님.”

“리세라디고스다.”

“리라세디고스-.”

“그냥 리세라고 부르도록.”

“예.”

“미리 말하마. 이 몸은 단순히 마법에만 능한 것이 아니다.”

리세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연금술과 소환술, 정령술은 물론이고 신성력과 저 초원의 소수 민족이나 다루는 원시 주술, 저주나 악마 계약, 사령술에도 견문이 있지.”

나는 이 말에 잠깐 멈칫했다.

“혹 네가 알려 주겠다는 마법이 이 중 하나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미리 말하면 혀까지는 자르지 않으마.”

팔은 자르겠다는 거잖아.

나한텐 그게 그거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건 내가 알려 줄 마법이란, 리세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힘이란 점.

“토굴에 걸어 놨던 마법 말인데요.”

나는 리세의 표정 변화에 주목하며 말을 이었다.

“대단하더군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데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리세는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떤 점이.”

“보통 그러한 종류의 마법은 침입자의 감각을 왜곡시키는 방식을 선호하잖아요? 하지만 마법사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토굴 전체에 마법을 걸었죠.”

전자의 방식을 채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마법으로 시시때때로 토굴을 변화시키는 것보단, 침입자의 인지를 왜곡시키는 마법을 설정하는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법 구체적인 예를 들며 추켜세웠는데도 리세의 반응은 덤덤했는데, 사실 당연한 태도다.

누구든 코흘리개한테 ‘똑똑하시네요.’ 같은 말을 듣고 기분이 들뜨지는 않을 테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마법사님이 대단한 수준의 마법사란 건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이쯤에서 일부러 과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저는 저택 후원 너머에 있는 옛 연무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은 가문의 누구에게도 밝힐 생각이 없었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리세에겐 그럴 필요가 없다.

“조금도 관리되지 않았고, 사람이 드나든 흔적도 없는 곳이었죠.”

“그런데.”

“저는 그곳에서 언데드를 보았습니다.”

이럴 때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게 효과적이라서, 나는 리세를 계속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제게 마나의 흐름이란 필적입니다. 숨기고 싶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죠.”

사실 마나, 즉 기氣를 느끼는 방식엔 저마다 차이가 있다.

- 어떤 자는 색으로 그것을 구분하고, 어떤 자는 감촉으로 느끼지요. 특이한 경우이긴 하지만, 냄새로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특히 예민한 감각을 가졌던 둘째 사저.

- 루안은 기의 흐름이 어떻게 보이나요?

사저는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내게는 그 흐름이 필적筆跡처럼 보인다고.

그리고 내가 언데드를 보고 느꼈던 마나의 필적과 방금 토굴을 지나며 보았던 필적은 같다.

즉.

배드니커에서 언데드를 다뤘던 정체불명의 사령술사는 리세라디고스다.

“…….”

리세가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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