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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8화 (128/172)

128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추측이 들어맞았다고 확신했다.

저주나 악마 계약, 사령술에도 견문이 있다고 말한 건 방금 리세 본인이었고.

거기에다 아사드가 일전에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다.

- 내가 수호하는 건 본가 저택과 숲의 중앙부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의 관리자는 다른 사람이지.

- 그게 누굽니까?

- 리세라디고스.

- 내가 가문 겉면의 수호자라면, 그 녀석은 뒷면의 수호자다. 숲지기이자 지하도서관의 사서이기도 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의아한 점이 많은 장소였습니다. 아마도 마법사님은 후원 전역에 마법을 전개하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한밤중이라고 해도 배드니커 본가 근처에서 언데드가 돌아다닐 수는 없다.

리세 또한 가문의 수호자라면, 그 언데드는 당시 정황상 우리 편이었을 것이다.

교단의 침입을 눈치챈 리세가, 나름대로 보낸 지원군 말이다.

나는 승부수를 띄우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상의 마법은 쓰지 않으셨죠.”

“그 이상의 마법?”

침묵을 지키던 리세가 처음으로 물었다.

나는 마법사의 머리카락 너머, 가려진 눈동자를 직시하며 신중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저택 전체, 혹은 숲을 감쌀 만큼 큰 범위로 마법을 설정하지는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실질적으로 숲에 결계를 형성한 건 아사드 님이었습니다.”

꽈앙……!

그 순간 두툼한 서적 한 권이 내 귀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할 의사가 없단 걸 깨닫고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빨랐다.

몸을 긴장시키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반응하지 못했을 정도로.

“두 번 다시…….”

리세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앞에서… 그 역겨운 놈의 이름을 꺼내지 마라. 알겠느냐?”

“…실례했습니다.”

아사드와 사이가 좋지 않나?

그러고 보니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은 것 같기는 했다.

설마 이 정도로 뒤틀린 사이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 숲에 형성된 결계 말인데, 가문 녀석들 대부분이 몬스터를 통제하기 위해 친 줄 알고 있지? 실은 아니야.

- 리세라디고스 때문이다. 그 녀석의 봉인 겸 감시랄까.

‘아.’

그런가.

‘리세는 이곳에 봉인당한 처지였구나.’

그리고 그 봉인을 직접 했거나, 혹은 감시하고 있는 게 아사드다.

이쯤 되면 사이가 좋은 게 이상할 지경이다.

“아이야.”

“루안입니다.”

그래도 영산 시절에 서른 넘게까지 나이를 먹었는데 아이란 호칭을 계속 듣기엔 거북하다.

“그래, 루안. 너는 마법에 대해 알고 있기는 한가?”

“무슨 뜻입니까?”

“그 역겨운 놈이 숲에 결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건, 딱히 그놈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숲 곳곳에 숨긴 유물 덕분이지. 네가 말한 방식을 우리 마법사가 몰라서 쓰지 않는 것 같으냐? 너는 그에 있어 가장 커다란 문제점을 빼놓고 떠들고 있구나.”

물론 나는 리세가 말하는 문제점을 알고 있다.

“비효율적이다.”

리세가 말했다.

“이 토굴 전체에 마법을 거는 것,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웬만한 마법사에게도 난해한 작업이다. 나라면 물론 이 저택 전체에도 마법을 걸 수 있다. 그 거슬리는 은둔자 놈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하지만 숲 전체라? 너는 [나비의 숲]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느냐?”

“…….”

“네가 말한 건 칠색七色의 마도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겠지요.”

“…이 몸과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리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나는 위축되지 않고 말했다.

“실례지만 마법사님은 자연 앞에서도 효율을 논합니까?”

“뭐?”

“폭우나 눈발이 휘몰아칠 때, 자연은 내릴 장소와 그러지 않아야 할 장소를 구분 짓지 않잖습니까.”

“이 리세라디고스와 순리順理에 관한 문답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다만 자연의 흐름을 마법에 적용시킬 수만 있다면 효율이란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리세가 멀뚱히 나를 보는 듯하더니 툭 내뱉었다.

“단순히 마나를 받아들여서 가공한다는 뜻은 아닌 듯하군.”

“산과 바다에 깃든 마나란 거의 무제한에 가깝습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마법사라도 그 만분의 일도 품에 담지 못하겠죠. 그 마나를 온전히 쓸 수만 있다면 마법의 규모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다. 네 이론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폭풍이나 해일로 적만을 멸해 버리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어.”

“전혀 다릅니다. 신에게 기도하거나 천운에 맡기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것은 갈고닦을 수 있는 기술이며, 실은 그보단 학문에 더 가까운 분야입니다.”

그러자 리세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문? 너는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법을 다른 말로는 마도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뻔뻔하게 내뱉은 다음 말을 이었다.

“무지한 자들은 자연에 법칙과 규율 따위가 없다고 말합니다. 실은 반대죠. 자연만큼 철저히 규칙이 우선시되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식견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할 뿐. 제가 말씀드릴 분야란.”

“…….”

“그런 자연의 순환이나 만물의 이치를 해석한 뒤, 법칙을 이용하는 것.”

나는 리세를 보며 말을 마쳤다.

“그것이 바로 기문둔갑奇門遁甲입니다.”

- 기문둔갑의 근본은 수비守備에 있답니다.

기문둔갑의 달인이었던 둘째 사저가 철선鐵扇을 매만지며 말했었다.

- 최초에 이것을 만든 자들의 목표란, 기본적으로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통해 신선神仙이라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라 그렇지요.

- 아하.

- 즉 수련에 방해되지 않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지형을 조종하는 게 시작점인 셈이에요.

사실 지금 내가 지껄이는 내용이 무슨 대단한 진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세상의 마법사라면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다.

지식의 차이가 아닌, 환경의 차이로 생길 수밖에 없는 충격이다.

당연하지만 마법이 만들어진 대륙과 술법이 만들어진 세상은 전혀 다르다.

단순히 사람 사는 곳이라 동일시할 수 없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륙엔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넓은 땅덩어리에 수십 가지나 되는 종족이 바글댔고, 파생 종족까지 합치면 그 몇 배가 된다.

그놈들 모두가 개별적인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니 기본적으로 갈등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지금에야 교단이라는 공공의 적과 대륙 유일의 국가로 인해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마법이라는 분야의 시작점이 어떻건, 결국엔 파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됐다.

반대로 기문둔갑의 시작점은 분쟁을 피하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나는 이것에 대한 기초를 둘째 사저한테 배웠는데, 만약 사저에게 이 세상의 마법 체계에 대해 가르쳐 줬다면 제법 놀랐을 거다.

리세 또한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

침묵이 생각보다 길다.

여전히 기분 나쁜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은커녕 눈동자도 보이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고 싶어도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침묵을 호조로 여겼다.

당장 나를 석실로 처넣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잠시 후 리세가 말했다.

“…자연에 분포된 마나의 흐름을 살짝만 비틀어서 식을 짜고, 술자에게 유리하게끔 상황을 조종한다.”

조종보다는 조성이 더 정확한 단어겠지만, 리세가 마법사인 걸 감안하면 어폐가 있는 건 아니다.

놀랍게도 리세는 이 짧은 순간 만에 술법을 마법사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불가능하다.”

리세가 잠깐 멈칫하더니,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반복해서 말했다.

“그래. 불가능해.”

“어떤 점이요.”

“마나를 육체에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뜻대로 다루기 위해서다. 육체에 저장하지 않은 마나는 가공할 수 없고, 가공하지 않은 마나는 다룰 수 없다. 이것은 절대 법칙이다.”

“다루는 게 아닙니다. 이용하는 것이죠.”

“그것에 차이가 있느냐?”

어쩐지 리세의 말투가 다소 누그러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마나를 받아들이되 가공은 하지 않는다면요? 육체를 천연의 마나가 지나는 통로로써 사용하는 것입니다.”

“단지 통로로 사용한다고?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정해진 순서로 마나를 배열하지 않으면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아. 마법이 발현할 일도 없다는 뜻이지.”

“가공하지 않고 단지 배열시키는 겁니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요. 가령 배출구를 손가락으로 한정한 다음 움직인다면,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마나를 재배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나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내가 원래 알고 있는 기氣와 진법에 대한 개념을, 이 세상의 마나와 마법을 기준으로 치환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허공에 놓인 마나는 얼마 가지 않아서 흩어질 텐데.”

“그러니 술법을 구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환경입니다. 가령 안개가 짙은 장소라면 공간 밀도가 높기 때문에 흩뿌린 마나가 쉽게 움직이지 않겠죠. 삼림이 빼곡한 숲이나 바다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선인들의 주거지가 주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깊숙한 곳이었던 이유기도 하다.

“그렇다면 환경 그 자체를 파괴하면 그 술법이란 것도 자연스레 풀리겠구나.”

“맞는 말씀입니다만, 애초부터 산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라면 미로에 가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와 리세의 대화는 논쟁의 형태가 되었다.

리세는 집요하게 술법의 단점을 찾으려는 듯 물어뜯었고, 나는 그 공격을 대부분 흘렸고, 때때로 받아들였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 보이는구나. 우선 네가 말한 그 술법이란 걸로는 파괴행위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위력은 현저히 떨어지겠지. 위력을 높이기 위해선 마나를 인공적으로 가공해서 그 순도를 강제로 높여야 하니, 여전히 그 방식은 효율과는 거리가 멀다.”

놀랍게도 리세는 그 짧은 설명만으로 술법의 대략적인 특징에 대해 파악한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대꾸했다.

“방패 또한 때에 따라선 무기처럼 휘두를 수 있겠지만, 과연 그 용도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애초에 기문둔갑의 근본은 수비입니다.”

리세는 대꾸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아까 전보다 훨씬 긴 침묵 끝에 입을 연다.

“그래.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음을 내가 인정하마.”

아무래도 이건 내숭 같다.

애써 태연한 척, 덤덤한 척하려는 기색이 은연중에 보였다.

“그런데 의아하구나. 너는 이러한 것들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가호와 관련된 일이라서 더는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나는 시치미 뚝 떼고 미리 준비한 핑계를 댔다.

“…음.”

리세는 침음을 한번 더 내더니, 한숨과 함께 말했다.

“가호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제 그 기문둔갑이란 걸 직접 보여 다오.”

“네? 그건 안 되겠는데요.”

“뭐? 어째서?”

리세가 살짝 조급한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애초에 기문둔갑을 쓰지 못해요.”

사람에겐 저마다 적성이란 게 있고.

내게 술법의 재능은 없었다.

물론 조건만 갖춰지면 그럭저럭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사저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대기를 움직인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다.

“쓸 수 없다면 방금 말한 것들은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모두 네가 지어낸 것들일 수도 있잖느냐.”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게 제 상상의 산물이라고요?”

“…….”

그게 불가능하단 것쯤은 리세가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애송이의 망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채 말했다.

“저는 이 지식을 이론으로만 접했습니다. 그 이상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죠. 하지만 마법사님이라면 다를 겁니다.”

이 말은 진심이다.

기문둔갑은 사람의 인체 내부에서 조작하는 염화제일공과 다르다.

아마도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려면 우선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에 대해 깊게 이해해야겠지.

나로선 무리다.

그럴 시간도 없고, 애초에 내 길도 아니다.

하지만 리세는 스스로도 말했고, 내가 직접 확인했듯이 대단한 수준의 마법사다.

그녀라면 이 세상에서도 기문둔갑을 사용할 수 있는 고유의 방식을 찾을지도 모른다.

“저는 새로운 마법을 알려 드린다고 했습니다. 가르쳐 드리는 게 아니라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모두 말씀드렸어요.”

“…….”

나는 할 말을 마친 후 가만히 리세를 바라보았고…….

이윽고 리세의 입이 열렸다.

“거래는 성립됐다.”

리세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중간부터 이 대답이 나올 확률이 높을 거라 생각하긴 했으나-.

역시 사람 마음이란 게 확답을 들어야 놓이는 법이란 말이지.

아무튼 상대는 마법사라 그렇다.

‘갑자기 말을 바꿀 수도 있고.’

물론 그런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괴짜인 건 분명했으나 이 마법사한테 광기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현기賢氣를 느꼈으면 느꼈지.

이건 좀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르는데, 팔을 자른다거나, 혓바닥을 뽑겠다거나…….

돌이켜 보면 다소 과장스럽던 위협 또한 실은 허세가 아니었을까?

마법사니까.

‘음…….’

용병 시절에 마법사 놈들한테 워낙 데었기 때문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마법사 혐오 기질이 있단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게 지하도서관의 재방문을 허락하마. 또한… 흑사룡黑蛇龍으로서 너와 계약해 주겠다.”

“…….”

갑자기 우호적이게 구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한다.

그게 방금까지 팔을 자르니, 혀를 뽑겠니 어쩌니 했던 상대라면 더욱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언가 조건이 있을 것 같은데…….”

“있지.”

그리고 리세가 나를 보더니 찬찬히 미소 지으며,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루안, 내 제자가 돼라.”

“어… 싫어요.”

“…….”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리세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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