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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29화 (129/172)

129화

리세의 표정이 굳은 만큼, 나도 나대로 당황한 상황이다.

‘이게 뭔 일이래.’

왠지 모르게 이번 삶은 나를 가르치려는 작자들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리세의 제안은 칼자크나 주니앙보다 훨씬 뜬금없다.

상대가 마법사라서 그렇다.

나와 큰 접점이 없는 분야의 달인 말이다.

“아무래도 너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표정을 추스른 리세가 말했다.

“이 리세라디고스는 여태껏 단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았다. 이것은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식을 배우게 될 기회란 뜻이지. 내 가르침에 충실히 따른다면, 그래. 어렵지 않게 가주 자리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

“괜찮습니다.”

“…….”

그러자 리세가 처음으로 외견에 걸맞은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걸 갖지 못할 때 보일 법한 불만투성이 얼굴 말이다.

“뭐가 불만이지?”

“저는 마법에 딱히 흥미가 없어요.”

“네가 무인의 길을 지향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인과 마법사, 둘 다 마나를 다뤄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 않나. 이 몸이 줄 수 있는 조언 또한 아예 무가치하지는 않을 터.”

“그래도 괜찮습니다.”

“…….”

벌써 세 번째 거절에 리세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서적의 산 위에 앉은 채로 신경질적으로 발을 휘적거렸다.

찰박, 찰박……. 물이 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의아해져서 물어보았다.

“왜 갑자기 절 제자로 삼으려는 겁니까?”

“단순한 호기심이다.”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한데요.”

“흥. 솔직히 말하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

“확답은 못 드리지만, 생각은 좀 더 해보겠지요.”

그래도 거절하겠지만.

그러자 잠깐 고민하던 리세가 말했다.

“…원래 배드니커의 핏줄 중 한 명쯤은 제자로 거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난 긴 세월 동안 눈에 차는 녀석이 없었지. 단 한 명도.”

“그래요? 제 형제자매들 재능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재능이라……. 내 눈에는 여전히 차지 않지만, 그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에 들지 않아. 이것은 상성의 문제니까.”

“상성이요?”

“그렇다. 상성이란 딱히 누군가와 연애하거나 친우를 사귈 때만 중요한 게 아니지.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상성이 있다.”

“…….”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스승인 적이 없었지만.

이 순간 왠지 모르게 리세의 말이 이해가 갔다.

나는 백노광을 존경하지만, 그분이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일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델락의 다른 자식 중에선 여러모로 특이해.”

“어떤 점이 말입니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그놈을 무작정 숭배하지 않는 점이랄까.”

“…….”

딱히 철혈공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리세는 그 사실을 정확히 꿰뚫었다.

“또한 토굴에서 열 가지 문제를 모두 풀었다는 건 나와 관심 분야가 정확히 겹친다는 뜻이지. 그 문제는 내가 멋대로 뽑아서 만든 거니까.”

“음…….”

“거기에 네가 설명한 기문둔갑이란 기술도 흥미롭고, 내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배짱도 높이 샀다. 머리도 나쁘지 않은 듯하니 내 가르침에도 잘 따라올 것 같았고.”

“…….”

리세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었으나, 어쩐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추측한 이유는 리세의 태도에 있다.

나를 보지 않고 먼눈을 하고 있고, 괜히 다리를 팔딱거리며 물장구를 친다.

나를 본체만체하며 책을 읽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의 리세는 내게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지만, 지금은 제자로 거둘 만큼의 호기심이 피어난 상태…….

그런데도 굳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다면 감추는 게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심리전은 장기가 아닌가?’

리세는 최소 수백 년을 산 흑요정일 테지만, 어쩐지 그 속내가 너무 뻔히 보였다.

이럴 경우 둘 중 하나인데…….

나조차 함정으로 느끼지 않을 만큼 연기를 잘하거나.

그 긴 세월 동안 사람과 교류한 적이 거의 없거나.

일단 긴 세월 이곳에 봉인된 듯하니, 후자일 확률이 더 높았다.

“…본래 스승이 제자를 찾는 까닭이란, 슬슬 쌓은 지식의 전수를 준비하기 위함인데…….”

“그런가?”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닌 듯하군요.”

나는 조심스럽게 다른 걸 제안했다.

“그러니 제자보단 조수는 어떨까요?”

“조수?”

“조수로선 리세 님을 성심성의껏 보좌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기문둔갑에 대한 지식이나 겹치는 관심 분야에 관한 토론, 그 외의 잡다한 심부름도 좋아요. 자주 들르지는 못하겠지만요.”

이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거절하면 어쩔 수 없다.

지하도서관의 지식이 아쉽기는 해도, 나도 마음을 접을 수밖에.

“흐음… 뭐, 나쁘지 않군.”

다행히 리세도 내 타협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 순간 도서관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내 앞에 멈췄다.

투박하게 생긴 열쇠였다.

“지하도서관의 열쇠다. 어느 문이더라도 이걸 꽂으면 지하도서관과 이어지게 되지.”

마도구인 모양이다. 신기하네.

“열쇠 구멍이 없는 문은 어떡하죠?”

“열쇠는 단단하다.”

“……?”

“억지로 쑤셔 박으란 뜻이다.”

“아하.”

즉 이 작은 열쇠에 공간 이동 마법이 새겨졌다는 뜻인데, 나는 손가락에 채워진 반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아사드한테 받은 반지인가? 하!”

정확히 말하면 철혈공한테 받은 거다.

일회용이라 이미 마도구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착용하고 있었다.

“안목이 형편없구나. 그딴 일회성 소모품보다 내가 만든 반지가 100배는 우월하다.”

“마도구 제조에 있어선 마법사님이 아사드 님보다 더 우월한가 보군요.”

“그야 당연하지.”

대충 던진 말인데 어쩐지 반응이 좋다.

나는 리세의 우쭐대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사드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어느 정도 경쟁의식은 가진 모양이다.

“그런데 너… 그 반지를 받았다는 건.”

“네.”

“설마 그놈한테도 제자 제안을 받은 것이냐? 그래서 내 제안을 거절한 거고?”

“그럴 리가요. 그저 마법이 제 길이 아닐 뿐입니다.”

“…….”

내 변명에도 리세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완전히 떨치지 않았다.

리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말했다.

“한 가지 제안이 있다.”

“뭡니까?”

“결코, 절대로, 아사드 놈의 제자는 되지 말거라. 그럼 네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신수 계약을 맺어 주겠다.”

“음…….”

당연히 아사드의 제자는 될 생각이 없다. 애초에 그 양반이 나를 거둘지도 의문이고.

하지만,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했다.

어쩐지 아사드에 관한 화제가 나오면 리세가 평정심을 쉽게 잃는 듯 보여서다.

예상대로 리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떠냐! 신수 계약 즉시 차력借力의 단계까지 허용해 주겠다……!”

“차력이 뭔가요?”

그러자 리세가 오히려 당황하며 말했다.

“너……. 신수 계약을 하러 왔다면서 계약의 단계조차 모르는 것이냐?”

나는 볼을 긁적거렸다.

“제가 가호랑은 별로 인연이 없어서, 별 관심이 없거든요.”

“그래? 소지한 가호가 몇 개지?”

“한 개요.”

“호오…….”

리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괜찮군.”

“……?”

괜찮다니?

이러한 반응은 생전 처음이다.

대다수의 사람, 특히 위대한 가문의 혈통들은 가호를 못 받았다거나, 하나밖에 받지 못한 사람을 비웃고 조롱했다.

내겐 배드니커란 꼬리표가 붙어 있으니 그 조롱의 농도가 더욱 짙었고.

그러나 리세는 딱히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아니다. 진심이 느껴졌다.

내가 그것에 대해 물으려고 고민하는데, 리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응適應, 차력借力, 상승上昇, 일체一體. 이것이 신수와의 계약 단계다. 일반적으로 적응 단계에서 수년의 세월을 거쳐야만, 직접적으로 힘을 빌릴 수 있지.”

“아하.”

“물론 차력 단계에 이른다고 곧바로 내 힘을 쓸 수는 없겠지만,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내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니 리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내가 아사드 밑에 들어가는 게 싫었나 보다.

“좋다……. 그럼 가까이 와라.”

나는 리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리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작았는데, 긴 머리카락과 쌓인 서적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티가 덜 났던 것 같다.

“계약은 어떤 방식으로 맺습니까?”

“손을 내밀어라.”

설마 자르려고?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순간 리세가 손가락을 튕겼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서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앞서 보았던 놈들과 달리 꼬리가 머리카락과 이어져 있지 않은 개별적인 형태의 뱀이었다. 크기도 작고.

“가만히.”

작은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보더니, 내가 뻗은 손바닥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광경은 그다음 순간 벌어졌다.

“……!”

뱀이 흡수되듯, 내 손바닥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직후 손등에 뱀 무늬가 나타났다.

심지어 뱀 무늬는 살아 있는 것처럼 천천히 팔을 타고 올라왔다.

“으음…….”

“가만히 있으라니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는 찝찝함에 당장이라도 일어서고 싶었지만, 억지로 평정심을 발휘했다.

그러자 천천히 올라오던 뱀 무늬는 내 목덜미 주변에서 멈췄다.

우웅-.

이윽고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 순간, 리세가 말했다.

“계약은 완료됐다.”

“…이게 끝입니까?”

“그래. 뱀 무늬가 자리를 잡으려면 몇 주는 걸릴 테니, 그 기간 동안은 무리 마라. 신수의 힘을 끌어 쓰는 방법에 대해선 차차 감이 올 것이다.”

나는 목덜미 근처를 매만지며 말했다.

“…설마 제 몸에 뱀 문신이 새겨진 건 아니겠지요?”

“평소엔 드러나지 않으니 걱정 말도록.”

염병, 새겨는 졌다는 거잖아.

등목 언저리에 새겨진 뱀 문신이라니…….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혀 빼물고 그냥 죽을란다.

“아무튼… 이제 다 끝났습니까?”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또 오겠습니다.”

“…….”

그러자 리세가 대꾸도 하지 않고 멀뚱히 나를 보았다.

“혹시 아직 할 말이 있습니까?”

“…아니. 이만 가봐라.”

“네.”

리세의 축객령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지하도서관을 떠났다.

* * *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또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짧았다.

그래도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는 않은지, 우물을 기어 올라오니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소철당으로 돌아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수확이 생각보다 많다.

대사형에 대한 정보도 구체적으로 확보했고, 신수와의 계약도 맺었다.

그 힘을 어떻게 다루는지, 적응이고 차력이고 하는 단계는 또 뭔지 알아봐야 할 게 있긴 하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다.

즉 이젠 다음 목적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다.

“아카데미라…….”

사실 제국 아카데미 입학서라면 올해… 아니지. 이제는 작년 초쯤에 이미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가호를 받지 못하고, 한창 망나니짓을 할 때 말이다.

일반적으로 아카데미엔 열다섯의 나이에 입학하는 게 관례라서 그렇다.

어머니는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이라도 하길 바라셨지만, 당시 정신이 나가 있던 나는 입학서를 찢고 방에 틀어박혔다.

아무튼, 그 때문에 카르텔 아카데미에 대해선 좀 알고 있다.

명실상부 대륙 최대 규모의 아카데미이며, 기본적으로 3년제. 일반적으로 열다섯에 입학하여 열여덟에 졸업하는 게 관례라는 뜻이다.

총원은 대략 1,000명.

학부는 수십여 개.

위치는 제도.

“그리고… 데려갈 수 있는 사용인은 최대 두 명까지였던가.”

한 명은 물론, 우리의 만능 징수인인 케이안을 대동할 생각이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누구로 할까.

잠깐 떠오른 건 칼자크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사범 정도의 거물을 데려가는 건 좀.

‘칼자크가 거절할 것 같지는 않지만, 너무 눈에 띌 것 같단 말이지.’

그럼 나머지 후보는 누가 있을까?

적당히 철혈기사단 중 한 명을 데려갈까, 아니면 징수인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볼까.

몇 번 얼굴을 맞댄 제인이란 녀석,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치고는 생각보다 유능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철당으로 돌아오니, 하인들이 살짝 놀란 채 나를 맞이했다.

“늦으셨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그동안 우선 씻으시겠습니까?”

“그럴까.”

토굴 속을 돌아다녔더니 몸이 좀 지저분하긴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가서 일단 씻는다. 그렇게 뽀송뽀송해진 채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니, 케이안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응. 별일 없었지?”

상투적으로 물었는데, 케이안이 살짝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가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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