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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30화 (130/172)

130화

식당으로 가니, 정말로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적갈색 머리카락과 특징적인 외눈 안경,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을 것 같은 깔끔한 차림새의 주인공은 아르잔이었다.

“주인님.”

얘도 이제 날 주인님이라 부르는구나.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기분 탓인지 안색이 조금 밝아 보인다.

“복귀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인수인계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아냐. 괜찮아.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내가 머물던 변방 저택의 총괄 집사 역할을 하던 게 아르잔이었다.

작은 규모는 아닌 데다, 아르잔의 성격이 워낙 꼼꼼하니 인수인계도 철두철미하게 했을 터.

나로서도 그쪽이 마음이 놓인다.

“어머니는?”

“물론 잘 계십니다.”

아르잔이 대꾸한 다음, 살짝 높아진 어조로 말했다.

“대략적인 상황은 들었습니다. 수련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셨다던데요. 부인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고마워.”

나는 멀뚱멀뚱 아르잔을 보았다.

아르잔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집사는 신수와 계약을 맺었지?”

“네? 아, 그렇습니다.”

역시나.

보석 산맥에서 보인 폭발적인 움직임은 신수의 힘이었다.

“어떤 신수와 계약했는데?”

“녹색 사슴입니다.”

“단계는?”

“상승입니다.”

“오호…….”

상승이라면 세 번째 단계다.

내가 리세의 꼼수로 차력 단계에 즉시 이른다고 해도, 나보다 더 높은 경지라는 뜻.

즉 신수 계약에 있어선 아르잔이 나보다 한참 선배다.

나는 아르잔을 보며 빙긋 웃었다.

“갑작스럽지만, 이제 아카데미에 갈 예정인데 보좌를 부탁해도 될까?”

* * *

이튿날.

오랜만에 새벽녘에 눈이 떠졌는데, 어제는 할 것도 없어 간만에 빨리 취침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창문에 어스름히 내려앉은 달빛을 보았다.

‘서너 시 정도인가.’

아직 해도 안 떴으니 운공하기도 애매하고, 숙면이었는지 더 이상 잠도 안 온다.

그래서 간만에 새벽 공기나 마실 겸 혼자 소철당을 나섰다.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수련회 때를 떠올리며 본가 주변이나 한 바퀴 돌까 싶었는데…….

텅 빈 새벽 연무장엔 선객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수련회 때 미르와 마주쳤던 게 생각났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건 다소 의외의 인물이었다.

카론 우드잭.

‘저 녀석 아직도 본가에 있었나?’

의외다.

아직 배드니커에 남아 있는 녀석들은 죄다 아카데미행을 희망하는 녀석들뿐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카론과 아카데미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압!”

그나저나 이 녀석은 새벽에 뭘 하는 걸까.

달밤에 체조?

나는 잠깐 뜀박질을 멈추고 카론을 관찰했다.

일단 양손에 단검을 들고 있기는 한데… 자발적인 훈련, 혹은 무술을 단련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몸을 휘적거리고 있는 듯하다.

한참이나 단검을 휘두르던 카론이 신경질적으로 욕을 내뱉었다.

“…제기랄!”

카론은 숨을 헐떡이다, 그제야 내 기척을 깨달았는지 홱 나를 봤다.

“넌…….”

“새벽부터 고생이 많으시군.”

카론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정신이라도 나갔는지, 이를 악문 채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달빛이 스친 단검이 서늘하게 번뜩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한가하던 참이니 어울려 주기로 한다.

나는 카론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 오히려 거리를 좁혔다.

“……!”

카론은 목전까지 치달은 나를 보며 급하게 움직임을 멈췄지만, 그사이 오른쪽 손목을 후려쳤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 한 자루가 땅에 떨어졌다.

고통에 경직된 몸뚱이, 다시 말해 빈틈투성이. 즉시 왼팔을 낚아챈 다음 지면으로 내다 꽂는다.

쿵!

나는 바닥에 엎어진 카론의 등을 깔고 앉았다.

“끅…….”

“뭐 잘못 먹기라도 했냐?”

“…….”

카론은 흙바닥에 턱을 처박으면서도 별말 없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더니, 뒤늦게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어?”

“어떻게 하면 너처럼 강해질 수 있지?”

“…….”

좀 신선한데?

여태껏 나한테 이런 걸 물은 놈은 없었는데.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볼을 긁적거렸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내가 네 나이 땐 훨씬 약했으니까.”

“너 몇 살이냐.”

“열다섯… 아니, 이제 열여섯.”

“나는 열여덟인데?”

카론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도 난감한 심정이다.

‘과거 열여덟의 루안 배드니커가 얼마나 병신 같았는지 말할 수도 없고…….’

답답할 노릇이구만.

이럴 땐 화제 전환이다.

“무슨 일 있었냐?”

그러자 카론이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어딘가 포기한 어조로 말했다.

“…수련회가 끝나고, 헥토르 배드니커와 쭉 대련했다. 총 마흔다섯 번.”

카론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모두 패했지.”

“…….”

“오늘은 대련 요청을 거절하더군. 그래서 말했다. 이제 날 이기게 됐으니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거냐고. 그랬더니…….”

* * *

“…작작 해라, 카론 우드잭.”

헥토르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패배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쭉 재도전하는 의기는 높이 사겠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대련 속에서도 네놈에게선 나아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

“아직도 이번 수련회에 참가했던 영도 대부분이 너보다 약하다. 네가 전에 했던 말처럼 나 또한 대인전이나 검술 이외의 부분은 너한테 밀리겠지.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성장했다. 한스 밴더 같은 녀석조차 수련회 전과 비교하면 폭발적으로 성장했단 말이다.”

헥토르가 카론을 노려보며 말했다.

“수련회 전이나, 후나… 변하지 못한 건 네놈뿐이다, 카론 우드잭.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

“네게 있어 배드니커의 수련회는 대체 무엇이었던 거냐?”

카론은 실로 오랜만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 * *

나는 속으로 헥토르의 일침에 감탄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서 그렇다.

그리고 낙담한 듯한 카론을 보며 묻는다.

“헥토르를 이기고 싶냐?”

“그래.”

“그 방법을 배드니커의 핏줄인 나한테 묻는 거고?”

“…그렇다.”

“음.”

나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네.”

“…….”

“재능은 네가 헥토르보다 뛰어날 거야. 그런데 이번 수련회에서 형님이 너보다 훨씬 폭발적으로 성장했지. 이유가 뭘까.”

“…모르겠다.”

“나도 몰라.”

그러자 카론이 황당한 듯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모르니까 네가 진 거야.”

“그게 무슨…….”

“헥토르한테 같은 걸 물으면 또렷한 대답이 나올걸. 형님은 강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

“아직 어설프긴 해도… 독자적인 무학을 세운 거지.”

카론이 입을 닫았다.

그리고 약간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내게도 그 무학이란 걸 가르쳐 다오.”

“병신 같은 소리를 하는구만. 무학을 어떻게 가르쳐 주냐? 사람마다 가치관이 전혀 다른데.”

“…….”

카론은 이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멍청한 놈은 아닐 텐데도, 이렇게 이 녀석은 때때로 상식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나는 카론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지금 느껴지는 위화감을 전에도 몇 번 느낀 적 있다.

“널 가르친 건 네 아버지냐?”

“…….”

“좋은 스승은 아니군.”

그러자 카론이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뛰어난 선생이셨다……!”

“계속 말해 봐.”

“항상 내게 최적의 방식을 가르쳐 주셨다……! 강해지는 방식, 살아남을 방식, 삶의 목적까지……! 그 덕분에 난 죽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즉 네가 고민할 틈조차 주지 않고 답만 가르쳐 줬다는 거잖아. 이 병신아, 그게 왜 좋은 스승인데? 다른 건 몰라도 목적만큼은 제자가 스스로 찾게 놔뒀어야지.”

“뭐……?”

“난 하이드 우드잭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무슨 용도로 널 가르쳤는지는 알겠다. 넌 제자 같은 게 아니라 대용품이야.”

나는 카론의 뒤통수를 툭툭 치며 말했다.

까드득.

카론이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일어서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어림도 없지.

난 코웃음을 치며 엉덩이에 더욱 힘을 줬다.

“끄으윽…….”

“…….”

그리고 나는 스스로가 생각보다 화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저마다 화내는 포인트가 다르다.

부모 같지 않은 부모의 행태에 특히 분노하는 사람이 있고, 늙은 부모를 부려 먹는 자식 놈에 열불 터지는 놈도 있다.

무학과 같다.

각자 살아온 인생이 다르기 때문에, 화를 내는 지점도 다른 것이다.

그리고 나란 인간이 가장 열불이 터지는 건 이런 경우였다.

스승 같지도 않은 스승을 봤을 때.

“…스승이란 작자가 네가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목적지를 강요했다면 그건 가르침이 아니라 주입이다. 넌 한참 잘못 배웠어. 답을 몰라서 고민하는 것조차 과정의 일부인데, 지금 네 꼴을 봐라. 인생의 첫 방황을 맞이하니 길 잃은 꼬맹이처럼 아무것도 못 하잖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답만을 가르쳐 준다면 스승과 답안지가 다를 게 뭐란 말이냐.”

지도 없이 평생을 살았던 놈은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일단 걷고 본다.

반면 늘 길을 알던 놈이 한번 지도를 잃어버리면 이런 꼴이 된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우는 거지.

시야가 좁기 때문이다.

반면 시야가 넓으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시간을 짐작할 수 있고, 별의 위치로 방향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지도가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카론일 거다.

그러니 이 녀석은 불쌍한 놈이다.

사냥과 생존의 전문가였지만, 그걸 삶에 적용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남들 다 자는 이 새벽녘부터 연무장에 뛰어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단순무식하게 몸을 굴렸겠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을 테니까.

“앞으로도 쭉 이럴 거냐?”

“…….”

“삶의 모든 순간에서, 방황하는 순간마다 아비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정답을 가르쳐 달라고 찡찡댈 거냐고. 빠르건, 늦건. 인생에서 홀로 서야 할 시기는 반드시 온다.”

“그럼 내가 어떡하면 좋단 말이냐……!”

카론은 여전히 거칠지만, 어딘가 비통한 어조로 외쳤다.

“난, 나는 이렇게 사는 법밖에 모른단 말이다……!”

한숨이 나왔다.

수련회 도중, 이 녀석이 유독 에반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뭐라고 했더라.

분명 레이븐을 고집하면, 상위 3인에 들지 못할 것이라 말했던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녀석이, 당시 성적이 그리 뛰어나지도 않았던 에반에게 그런 말을 한 게 놀라웠는데…….

이 녀석에 대해 조금 깊게 알게 되니 이유를 알겠다.

카론은 에반을 부러워하고 있던 것이다.

에반은 밥을 먹을 때, 쉴 때, 자기 전에도 입버릇처럼 말했으니까.

자신이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어떡할까.’

그냥 이대로 무시하고 가는 게 내 성미에 맞는 일이다.

애초에 카론이란 녀석은 수련회에서 딱히 호감 가던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대화를 좀 나누니 이 녀석도 과거의 나 못지않게 불쌍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카론의 아버지, 하이드는 이 녀석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깔려 있던 카론도 급히 일어선 다음, 다시 나를 경계했다.

꼭 경계심 많은 들개 같은 모습이다.

“카론아.”

“…뭐냐.”

“강해지는 방법이 궁금하댔지.”

“…그렇다.”

“그럼 내가 어떻게 강해졌는지 가르쳐 주는 수밖에 없겠군.”

나는 주먹을 쥐며 카론에게 다가갔다.

카론이 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뺘, 뺨을 맞는 거라면 이제 됐-.”

“아냐. 실은 스승님께선 뺨은 잘 안 때리셨어.”

화륵-.

내 주먹에 화기가 일렁거렸다.

“마침 내가 오늘부터 이틀 동안 할 게 없거든? 그러니까… 내 밑에 새로운 사형제가 들어왔다는 마음가짐으로 정성들여 다져 줄게.”

카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 *

이틀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다른 놈은 몰라도, 아마 나한텐 그랬을 것이다.

월요일 아침.

해가 뜬 직후, 영도는 마침내 제도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게 마차야……?”

“저택… 같은데…….”

말도 안 되게 커다란 마차를 보며 지방 촌놈… 즉 에반과 카리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나도 놀랐다.

저택까지는 오버지만, 웬만한 집 한 채 정도 사이즈에 끌고 있는 말도 평범한 놈보다 두 배는 컸다.

“이걸 타면 제도까지도 금방이겠어.”

“그래도 1주일은 걸릴걸?”

물론 장거리 이동이란 변수투성이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날씨로, 도중에 폭우라도 만났다간 사나흘 지체되는 건 일도 아닐 거다.

“난 그냥 이 마차에서 평생 살아도 될 것 같아…….”

“동감한다.”

아무튼 널찍한 마차 내부였다.

10명은 무슨, 20명까지 넉넉히 수용할 크기였는데, 내부엔 우리 영도밖에 없어서 그럭저럭 떠들썩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물론 무게 잡기 좋아하는 녀석들은 다른 칸에 있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

헥토르나 세렌 같은 녀석 말이다.

“제도에 가면 가고 싶은 데가 한두 곳이 아니야.”

카리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검술 도장이나 마탑, 7종족과 21영웅의 역사관과 각종 미술관에, 제도에서만 열리는 공연까지… 햐.”

“제국 최대 규모의 출판사도 있어! 나의 꿈, [엠파이어 저널]! 게다가 제도엔 열차라는 게 있는데, 그걸 타면 도시 북부에서 남부까지 한 시간이면 간다더라!”

특히 들뜬 건 카리스와 팜이었다.

이 두 녀석은 영도 중에서도 제도에 특히 로망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루안, 넌 형님이랑 약혼자 쪽으로 안 가고 왜 여기 있는 건데?”

“전 약혼자라니까. 그리고 저쪽은 너무 따분해.”

헥토르는 대화 상대로 썩 적합한 상대는 아니다.

수련회로 가는 마차에서도 둘이 있었는데, 할 말이 없어서 깜빡 잠들 정도였으니.

세렌은 좀 낫지만, 그 녀석도 남 앞에선 언동에 주의하는 기색이라 놀리는 맛이 없고.

“그래. 형님이 이곳에 있는 게 편하시다고 하시잖나.”

“…….”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두둔하니, 말을 꺼낸 카리스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영도들 전부가 괴상한 시선을 보냈다.

그 모든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며…….

“뭘 쳐다보는 거지? 형님에게 불만이라도 있나?”

카론 우드잭이 불퉁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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