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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31화 (131/172)

131화

나는 카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억!”

카론이 그대로 엎어지더니 말했다.

“갑자기 왜 때리는 겁니까……?”

“그냥.”

“그냥……. 아, 아니지. 이것도 모종의 의미가 있을 터. 내가 한번 고민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틀 전에 너무 심하게 쥐어 팬 탓일까? 머리가 살짝 돌아 버린 듯하다.

나는 황당한 시선을 보내는 영도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요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사실 깊게 떠올릴 것도 없었다.

그냥 가르치고, 조언하고, 때려 팬 게 전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을 가르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가 가르침에 소질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를 훈계하거나, 조언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가르침이 거창한 게 아니란 걸 알지만, 별개로 말이란 놈에 담긴 무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위로를 받은 미르 자이언트가 결과적으론 죽었던 것처럼, 반드시 선의 섞인 말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행위가 잘못된 것일까?

내가 뱉은 말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게 무섭다면 평생을 벙어리로 살아야 할 거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라 또 그럴 자신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뭐든 적당한 마음으로 임하기로 결심했다.

카론도 적당한 마음가짐으로 대했다.

적당히 가르치고, 적당히 조언하고, 적당히…는 아니고 좀 과하게 때려 팼지.

그랬더니 이 녀석 나름대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생긴 듯했다.

‘아니, 잠깐만…….’

나도 날 쥐어 팬 백노광을 결과적으로 스승으로 모시게 됐으니까…….

나한테 종일 처맞은 카론이 날 형님으로 삼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가?

‘과연 스승님…….’

나는 오늘도 위대하신 나의 스승, 백노광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걸 발견한 느낌이 됐다.

* * *

제국에 이름이 없는 것처럼, 제도에도 이름이 없다.

어차피 대륙에서 수도首都라고 할 수 있는 도시는 제도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냥 제도라고만 부른다.

제도로 향하는 열 명의 인원은 꽉꽉 채워졌다.

그 구성원을 지금 나열하자면…….

우선 카론과 헥토르, 그리고 나까지 상위 3인방에.

회귀 전 나와 같은 조였던 에반과 샤를, 미르가 더해졌고.

거기에 쭉 제도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팜과 카리스가 포함.

나머지는 모종의 목적을 품고 있는 듯한 세렌. 마지막 인물은 카론의 친구이자 거상의 후예인 제로스 실베르까지…….

의외로 나와 접점이 있는 녀석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시점에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회귀 이후엔 샤를, 미르와 딱히 깊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헥토르나 세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내 대화 상대는 주로 에반이나 카리스, 팜, 심지어 카론이었다.

실제로 마차에서 말이 제일 많은 것도 이 녀석들이었다.

여행이 시작하고 겨우 이틀이 지났을 때.

“슬슬 산적이 나오지 않으려나?”

어김없이 카리스가 미친 소리를 꺼냈다.

“산적? 뭔 산적.”

“넌 소설도 안 봐? 우리 이제 강해질 만큼 강해졌잖아. 개같이 굴렀으니까 이제 적당한 상대를 쥐어 패면서 우리의 강함을 확인할 흐름이라고.”

카리스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상대로 산적이야말로 제격이야. 소설에서도 그랬어.”

“무슨 소설을 봤길래.”

“10년 만에 귀환한 기사님.”

“…퍽이나 재밌어 보이네.”

팜이 비아냥거렸고, 에반도 한심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산적이 배드니커의 문양을 보고 잘도 습격하겠다.”

그렇긴 하다.

아직 완전히 배드니커의 영역을 벗어난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이 근처에 산적이 있긴 하려나.”

“산적이야 항상 있지.”

내 혼잣말에 대꾸한 건 제로스였다.

카론이 나를 따르게 됐기 때문일까.

이 녀석도 요 이틀 동안 부쩍 나와 얘기를 많이 나눴다.

사실 나도 5,000골드란 거금을 굴릴 방법을 찾고 있던 차라, 거상 집안의 후계자와의 친분은 나쁠 게 없었다.

“그래도 최근 제국 정세가 나쁜 편은 아니니 우리가 습격당할 일은 없을 거야.”

“아하.”

나는 제로스의 말을 쉽게 이해했지만, 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 정세랑 산적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의외로 제로스는 미르에게 담담히 설명해 줬다.

“보통 나라가 혼란스럽고 굶주리는 이들이 많으면 평범한 백성도 약탈자가 되곤 하지. 그러한 자들에겐 분별력이 없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습격한다는 뜻이지.”

“으, 으음…….”

“반대로 이런 안정기에 도적질을 하는 자들은 보다 전문적이지. 귀찮아질 것 같은 상대는 건들지 않아. 그 정도 분별력도 없었다면 진작 다 토벌당했을 테니까.”

“…이해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미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마차 여행을 하며 깨달은 건, 본가에 남은 열 명의 녀석들이 나름대로 친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녀석들도 특히 친한 무리는 따로 있긴 했지만, 다른 무리라도 서로 이름 부르며 얘기를 나눌 정도는 됐다.

나는 아마 그 이유가 헥토르와 카론의 암묵적 관계 개선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일단 리더 격인 두 녀석이 서로를 더는 껄끄럽게 여기지 않게 됐으니, 나머지 녀석들도 쉽게 말문을 튼 것일 테지.

‘겉도는 건 이제 세렌 한 명인가.’

마차 칸막이 사이엔 작은 창문이 있었고, 그 너머에 있는 세렌의 모습이 살짝 비쳤다.

“…….”

세렌은 등받이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창문 바깥을 보고 있었다.

참 희한한 녀석이다.

하루에 거의 한두 마디밖에 안 하는 것 같은데,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터.

가끔 혼잣말 같은 걸 중얼거리긴 하지만.

‘잊힌 신인가.’

별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세렌은 제단에서 잊힌 신과 접선했을 거다.

악마를 섬멸하고, 마왕을 몰아냈던 그 북풍한설의 권능 말이다.

덜컹……!

그 순간이다.

급작스럽게 마차가 멈췄다.

물론 워낙 큰 마차이니만큼, 체중이 쏠릴 일은 없었지만 마침 물을 마시던 미르는 갑작스럽게 세수를 해버렸다.

“어풉!”

“뭐, 뭐야?”

당황하는 영도들 사이로 카리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사, 산적이다……!”

“뭐어?”

“마침내 이 호걸 카리스의, 영웅으로서의 화려한 데뷔가-.”

“앉아, 미친놈아.”

나는 카리스를 진정시킨 다음, 마부석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 산적인가?

“뭔데? 무슨 일이야?”

그러자 마부로 보이는 남자가 난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런데 그 눈동자가 앞이 아닌, 힐끗 뒤를 향했다.

영도 중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곧 마부의 시선이 세렌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 마부의 시선의 의미, 마차가 멈춘 이유를 동시에 깨달았다.

제법 넉넉한 비탈길을 막아선 커다란 마차가 보였다.

배드니커의 거뭇한 마차와는 상반되는 하얀색 마차에, 이끌고 있는 말도 죄다 백마다.

그리고…….

마차에 새겨져 있는 데이지(Daisy)의 문양.

딱히 세상 돌아가는 꼴에 관심 없는 나도 알고 있는 문양이다.

굿스프링의 문양.

“…….”

슬쩍 뒤를 보니, 세렌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마차는 심지어 상당히 컸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차 문이 열리며 사람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내린 놈들의 공통점은 일단 이쪽과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건데…….

“아, 혹시…….”

어느새 곁에 다가온 팜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뭔 상황인지 알겠냐?”

“으응… 아마 증명식을 마친 영도들이 아닐까 싶은데.”

“증명식은 또 뭐야?”

“그러니까… 배드니커의 수련회 굿스프링 버전?”

“그런 게 있었어?”

“있지.”

마지막 말에 대꾸한 건 팜이 아니었다.

어느새 칸막이를 건너온 세렌이 나를 지나쳤다.

평소보다 두 배는 차가운 얼굴, 세 배는 싸늘한 목소리에 팜이 찔끔거렸다.

“그런데 저놈들이 왜 갑자기 길을 막는 거야?”

“글쎄. 아마 굿스프링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묘하게 대꾸한 세렌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마차에 내린 인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와…….”

팜이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만큼 잘생긴 놈이었다.

품위와 격식을 전신에 두른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나이는 헥토르보다 두세 살 더 많은 정도?

즉 장성한 사내였다.

‘재수 없게 생겼네.’

특히 눈이 아플 만큼 휘황찬란한 금발은 내가 싫어하는 요소 중 하나다.

저렇게 생긴 놈들은 대부분 버터를 바른 것처럼 느끼하더라.

편견이지만.

“실례합니다. 배드니커의 영도 여러분들, 저는 바터 굿스프링이라고 합니다.”

“와… 진짜 이름이 버터네.”

“버터가 아니라 바터야.”

세렌이 질린 얼굴로 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덧붙였다.

“…우리 첫째 오빠인 바터 굿스프링.”

“아.”

즉 굿스프링가의 장남이라는 건가?

나는 살짝 묘한 눈으로 바터를 보았다.

바터는 어쩐지 후안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그쪽의 인솔자는 누굽니까?”

“이, 인솔자……?”

팜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린 딱히 인솔자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번에 아카데미로 가는 인원은 영도 열 명에 마부, 길잡이, 밥을 준비하는 사용인 몇 명이 전부다.

가혹한 게 아니라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련회가 끝난 순간부터, 어디서든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실제로 나비의 숲에서도 일주일을 굴러먹던 놈들이니, 여행에 딱히 불편할 건 없었다.

“누, 누가 나서지?”

“카리스는 어때? 제일 삭았잖아.”

“성적순으로 끊으면 카론 아니야?”

내가 그리 말하며 카론을 보니, 이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 있는데 내가 리더 노릇을 할 수는 없지요.”

염병하네.

어쩔 수 없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막둥이로서의 눈동자로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

헥토르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형님, 믿고 있었다고.”

“…그래.”

헥토르는 반쯤 포기한 눈으로 나를 지나친 다음, 바터의 앞에 섰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바터 경.”

“아- 헥토르 공자. 오랜만일세.”

말투를 보니 안면이 있는 것 같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헥토르는 수련에 꾸준히 집중하는 한편, 인맥 관리에도 대단히 많은 신경을 썼다.

배드니커의 핏줄 중에선 이례적인 행보였지만, 어쨌든 우리 가문 자체가 가진 힘이 막강하다 보니 관계를 맺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그러고 보니 황실과도 제법 끈이 있었지, 저 녀석.’

여러모로 다재다능한 둘째 형님이 되시겠다.

“그나저나 경은 뭐야? 네 오빠 기사야?”

“굿스프링의 국화기사단의 단장이야.”

“제법 강한가 보네.”

“…진짜 모르는 거야? 2년 전 무술대회에서 히이로 배드니커를 상대로 비겼잖아.”

“오.”

그건 살짝 놀랍다.

히이로 배드니커는 현역 영웅으로 활동하고 있을 만큼, 이미 완성된 인재라서 그렇다.

실제로 내가 본 히이로와 네로는 헥토르와는 격이 다를 만큼 강했다.

즉 저 바터란 놈의 실력이 헥토르보다 몇 수는 위라는 뜻이다.

헥토르가 살짝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별것 아닐세. 보아하니 그쪽도 카르텔 아카데미를 향하는 듯한데, 긴 여행이 될 테니 동행이나 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그 말에 내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쪽도?”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증명식을 마친 굿스프링 쪽 영도도 아카데미에 가나 봐.”

“아. 원래 그랬어?”

“아니……. 일단 난 금시초문인데.”

팜이 힐끗 세렌을 보니, 이 녀석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서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보완할 수 있을 테고. 어떤가?”

“호의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흐음. 그런가.”

픽 웃은 바터가 말했다.

“그쪽에 우리 가문의 말썽꾸러기가 있지?”

“그렇습니다.”

“비록 배드니커의 수련회를 거쳤지만, 세렌은 우리 가문 사람이니 이만 데려가겠네.”

“마음대로 하시지요.”

헥토르가 그리 말하고 덧붙였다.

“단, 세렌 영도의 의사부터 확인해야 하겠지만요.”

“…….”

그 말에 바터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나비.”

누군가의 이름인가?

특이하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그 순간 굿스프링 영도들 사이에서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흐릿하고 무표정한 인상이다.

뭘 쳐다보고 있는지 모를 시선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바터를 보고도 딱히 동요하지 않았던 세렌이, 이 나비란 녀석의 등장엔 살짝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이 아이는 우리 가문의 막냇자식일세.”

그러자 뒤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굿스프링의 귀재……!”

“나비 굿스프링이라면, 굿스프링의 미래라 불리는 인재잖아.”

“가호도 받지 않은 채로 각종 무술대회를 휩쓸었다던데…….”

“차기 가주라는 소문도 들었어.”

뒤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나도 귀재鬼才란 단어에서 기억이 떠올랐다.

나비 굿스프링.

저 녀석 또한 훗날의 영웅으로, 세렌 이상의 위명을 얻게 되는 녀석이다.

‘그나저나 나비라니…….’

바터 굿스프링, 나비 굿스프링……. 가주의 작명 센스가 의심스럽다. 세렌의 이름이 멀쩡한 게 신기할 지경인데, 설마 이 녀석도 본명은 엄청 웃긴 게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바터가 말했다.

“공자,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괜찮다면 본 가문의 부족한 막내에게 한 수 가르침을 줄 수 있겠는가.”

“이곳에서요? 진심이십니까.”

헥토르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바터가 부드러운 웃음으로 흘렸다.

“너무 그리 정색하지 말게. 그저 가벼운 비무로 생각하면 돼.”

“…….”

과연 가벼운 비무일까?

헥토르는 멍청한 놈이 아니다.

이 비무에 담긴 속뜻을 짐작했을 거다.

그러니까… 이 비무의 승패에 따라 수련회와 증명식, 어느 가문의 시스템이 더 뛰어난지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나비란 놈이 말했다.

“배드니커의 천재, 헥토르 배드니커.”

생각보다 더 앳되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당신 한 명으로는 부족해.”

헥토르가 눈살을 찌푸린 사이, 흐릿한 시선이 우리를 훑었다.

“그쪽에서 가장 강한 영도 세 명, 합공도 좋고, 연전도 좋아. 한 번이라도 이기면 그쪽의 승리로 쳐주지.”

“…….”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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