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우리 쪽 영도들 대부분이 굳은 가운데, 나는 의외로 저 말이 자만심의 발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허언이 아닌데?’
단적으로 이쪽에서 저놈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헥토르나 카론 정도일 거다.
지금의 나랑 비슷하거나 혹은 한두 살 정도 더 어린 녀석일 텐데, 대체 정체가 뭘까.
“…….”
세렌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지만, 태평하게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다.
그때 바터가 세렌을 불렀다.
“세렌.”
“네,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니……. 이 막 나가는 녀석에게 어울리는 호칭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오빠건 언니건 ‘야.’라고 부를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누님, 거기 계셨습니까.”
종일 무심하게 있던 나비도 살짝 달라진 표정으로 세렌을 보았다.
바터가 말했다.
“세렌, 미리 물으마. 이쪽으로 오지 않겠느냐?”
“저는 지금 수련회의 수료자로서 아카데미로 향하고 있습니다. 시작을 함께 했으니 그 끝 또한 같이하는 게 도리에 맞을 테지요.”
미리 준비된 대본을 읊는 듯한 말투였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바터는 오히려 낮게 웃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럼 이렇게 하자. 나비가 이기면 군말 없이 돌아와라.”
“그건…….”
“오라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너도 어느 정도는 양보해야지.”
“…….”
부드럽지만, 묘하게 강압적인 목소리에 세렌이 드러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이것들 봐라.’
벌써 이긴 것처럼 떠드는 게 거슬린다.
그냥 굿스프링이고 지랄이고, 일단은 좀 패 놓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고… 그 순간 스스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사고방식이 스승인 백노광과 놀라울 만큼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건 좀…….’
자중하자.
이러다 진짜 리틀 백노광이 돼 버리겠다.
나는 원래 선량하고 인내심 깊은 사람인데……. 이게 다 카론 때문이다.
그사이 헥토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오호…….’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했는데, 헥토르는 오히려 침착한 태도였다.
기본적으로 철혈공을 신처럼 숭배하고, 배드니커란 이름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는 녀석이라 의외다.
아마 속은 나보다 훨씬 뿔이 나 있을 텐데……. 이 말인즉슨, 이놈이 이제는 속내를 숨기는 법도 배웠다는 뜻이었다.
조금 과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수련회가 헥토르 인생의 분기점은 아니었을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몰라볼 정도로 성장한 걸 보면 말이다.
“대신 싸우는 건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그 말에 나비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혼자 싸우겠다고?”
“그래.”
“배드니커의 수련회는 성적을 매긴다고 들었는데, 그쪽은 몇 위지?”
“2위다.”
“1위는 누군데.”
“카론 우드잭.”
“오.”
그 말에 나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곧 카론을 찾고 미소를 지었다.
다분히 호전적인 미소였다.
“하이드 경의 독남 말이군. 소문은 나도 많이 들었지. 당신이라면 충분히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
카론이 특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나 말해 두지. 헥토르 배드니커는 대인전만큼은 나보다 강하다.”
“뭐?”
“대인전, 만큼은.”
카론이 재차 강조했지만, 나비의 시선은 헥토르를 향해 있었고.
헥토르는 순순히 자신을 인정한 카론을 보며 의외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카론은 왠지 모르게 나를 보며 보이지 않게 엄지를 세웠다.
“…….”
뭐 어쩌라고.
아무튼 줄줄이 다른 놈을 보는 상태라, 꼴이 아주 우스웠다.
어쩐지 나도 다른 녀석을 보며 이 흐름을 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
“뭐, 좋아. 정말 그 정도 수준이라면 시시하지는 않겠네.”
나비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일단 둘 다 진검이었지만, 당연히 목숨을 건 비무는 아니고 심한 상처를 입어서도 안 될 거다.
배드니커와 굿스프링이라서 그렇다.
“…….”
“…….”
조금 경사가 진 비탈길.
두 영도가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곧바로 전투가 시작했다.
선공한 건 헥토르였다.
한 발자국 내디딤과 동시에 발검을 마친 헥토르는, 즉시 짐승 같은 기세를 흩뿌리며 나비와의 거리를 좁혔다.
“응?”
내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카론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중얼거렸다.
“못 보던 걸음걸인데…….”
“가문에서 새로 배운 것 같군.”
몇 번이고 말했다시피 철혈공은 상벌에 엄격하다.
수련회에서 2위란 성적을 거둔 헥토르에게도 뭔가 콩고물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어쨌든 헥토르의 보법은 빨랐다.
내 뇌천보만큼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속도를 낼 수 있는 종류인 것 같다.
그 속도는 나비의 예상보다도 빨랐는지, 순식간에 치달은 헥토르의 검에 조금 급하게 대응하는 모양새가 됐다.
카캉!
칼이 맞닿은 순간, 나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못한 실력이 아니란 걸 깨달은 것.
직후 나비 굿스프링의 태도에서 방심의 기색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정하는 게 빠른데?’
실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예상 밖의 사태를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비의 나이는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실전 경험은 카론만큼이나 풍부할 것 같다.
다른 점이라면, 대부분 늪지대에서 머물며 사냥과 생존에 허덕였던 카론과 달리 나비 굿스프링은 대인전의 스페셜리스트로 보였다.
아마 수련회 전의 헥토르였다면 속수무책으로 패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육체 능력은 저놈이 우위이긴 하지만…….’
그게 신기하다.
체격이 좋은 것도, 근골을 타고난 것도 아닌데 완력이나 순발력이 이상할 정도로 뛰어나다.
비무였기 때문에 마나는 쓰고 있지 않지만, 저런 놈이니만큼 마나 보유량도 규격 외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굿스프링의 조커 카드 같은 녀석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헥토르가 밀릴 이유는 없다.
아무리 대단해 봤자 영도 수준이었고… 헥토르는 수련회 내도록 수렵선생과 싸웠다.
빠악.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
나비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순간, 헥토르의 칼자루가 나비의 손목을 찍었다.
챙그르르……. 순백색 검이 땅에 떨어진 순간, 헥토르의 칼끝이 나비의 목젖을 겨냥했다.
순식간에 결판이 난 것이다.
“더 하겠나?”
그 순간이다.
으득, 나비의 표정이 바뀌며 전신에서 어떠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은월의 가호를 두른 세렌과 흡사한 느낌이다.
‘신수?’
그 순간 바터가 버럭 외쳤다.
“나비-!”
“……!”
막 기운을 끌어 올리던 나비가 깜짝 놀랐고, 집중되던 기운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바터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대련은… 우리의 패배네. 인정하지, 헥토르 공자. 못 본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군.”
헥토르는 검을 꽂지 않은 채 바터를 보며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실례지만, 바터 경.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는 게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검을 맞대지 않고 정확한 성장 척도를 확인할 수는 없지요. 저는 방금 대련에 전력으로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나비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지만, 헥토르는 개의치 않는 어조로 말했다.
“귀 가문의 나비 공자가 이리 말했지요. 합공도 좋고, 연전도 좋다고.”
“그런데.”
“제 경지가 아직 일천하여 감히 바터 경이 합세한 합공까진 감당할 수 없을 듯하지만…….”
그리고 헥토르는 오랜만에, 과거 그 재수 없던 시절처럼 입가를 비틀었다.
“연전이라면 어렵지 않을 듯한데, 어떠신지.”
‘크… 잘한다. 우리 형님.’
나는 받은 대로 정확히 되갚아 주는 헥토르의 고풍스런 어휘에 엄지를 세우고 말았다.
그야말로 귀족다운 처세였다.
헥토르의 시선을 받은 바터의 얼굴도 살짝 굳었지만, 곧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 두지.”
“아쉽군요.”
그제야 헥토르가 깔끔하게 납검했다.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본 가문의 영애를 잘 부탁하겠네. 또한 어차피 가는 길이 같으니, 제도까지 함께하는 건 어떤가 싶네만.”
“그러시지요.”
“배려해 줘서 고맙군.”
“별말씀을.”
“그럼 이만 가보겠네.”
그리고 바터 굿스프링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그 와중에 나비 굿스프링은 끝까지 헥토르를 노려보긴 했지만 말이다.
풍부한 대인전 경험과 달리, 감정을 숨길 만한 처세술은 갖추지 못한 듯하다.
‘무슨 목적이었을까?’
일단 세렌이라는 명목이 있긴 했지만, 어쩐지 저놈들이 들러붙은 진짜 이유는 달리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렌을 꺼낸 건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달까.
물론 아직은 심증뿐이지만…….
이번 제도행에 반갑지 않은 동행자가 늘었단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눈 딱 감고 때려 패고 싶었지만.
저쪽에서 먼저 시비 걸지 않는 이상에야, 내 쪽에서 깽판을 치기도 애매하다.
이미 헥토르가 배드니커로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으니까.
‘빠르면 사나흘이면 제도에 도착할 테니까 뭐.’
그때까지는 별일 없겠지?
* * *
굿스프링의 마차로 돌아온 직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나비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놈이 주제도 모르고 형님까지…….”
“됐다. 그보다 상처는?”
바터가 제법 세게 걷어차인 정강이 쪽을 가리키며 물으니, 나비가 대답했다.
“살짝 멍이 든 것 같긴 한데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나.”
“…….”
나비는 입을 다물더니 살짝 힘겨운 어조로 말했다.
“다시 붙으면, 제가 이깁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네 이빨을 드러낼 건 헥토르 배드니커 따위가 아니잖느냐. 최소 히이로 배드니커, 혹은 네로 배드니커가 상대여야 할 터.”
“그래도-!”
“억지를 부릴 셈이냐? 이번 일엔 내 말을 복종하라고 아버지도 말씀하셨을 텐데.”
“…….”
가주인 하템 굿스프링이 언급되니, 나비는 즉각적으로 입을 닫았다.
바터는 막내의 얼굴을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 화풀이 정도는 괜찮겠지.”
“화풀이요?”
“방금 헥토르와 싸울 때, 카론 우드잭의 옆에 있던 백금발의 영도를 보았느냐?”
나비가 살짝 기억을 더듬더니 대꾸했다.
“아, 있었죠. 뭔가 불량하게 생긴 놈이.”
“그 소년도 배드니커의 핏줄이다.”
“네? 하지만 그놈은 금발이었는데요.”
배드니커의 혈족은 대부분 흑발을 타고난다. 그들의 선조가 흑요정이라서 그렇다.
바터가 담담히 말했다.
“제 어미 쪽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놈이겠지. 너도 소문쯤은 들어 봤을 거다. 배드니커의 무능아.”
“아-.”
나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님과 약혼했다던 그 새끼요?”
“맞아. 덤으로 가문의 보검을 갖다 판 문제아지. 루안 배드니커란 이름이다. 화풀이 상대론 제격이야.”
“안 그래도 한번 두들겨 패 주고 싶던 놈이긴 한데……. 뒷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런 얼간이라도 일단은 배드니커잖아요.”
바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드니커의 형제자매는 사이가 좋지 않아. 특히 헥토르 배드니커는 철저한 실력주의자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루안 배드니커를 거의 혐오하고 있지. 사교계에선 유명해.”
“아.”
“물론 그렇다고 재기하기 힘들 만큼의 장애를 안겨선 안 돼. 적당한 명분도 필요하겠지.”
“명분…….”
“각 가문의 막내끼리 교분을 다질 겸 가볍게 겨뤘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더는 따지지 못할 터.”
나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하! 그거 딱 좋네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말했다시피 너무 과해선 안 된다. 네겐 자제심이 부족해.”
“하하. 알고 있다니까요.”
나비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소년처럼 환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