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굿스프링의 현 가주인 하템 굿스프링은 철혈공처럼 자식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내는 아니다.
위대한 가문의 혈통이니만큼 교단 척살에 주력하긴 하지만, 배드니커처럼 적극적이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니고.
정치적 위치?
황실이나 중앙 귀족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그 또한 배드니커의 견제를 위해서지 달리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럼 하템 굿스프링의 숙원은 무엇인가.
이 남자가 바라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배드니커를 뛰어넘는 것.
불과 수십 년 전까지 배드니커는 [몰락하는 명문가], [지고 있는 해], 속된 말로는 퇴물로 불리었다.
별개로 굿스프링의 위세는 황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높았고.
지금은 아니다.
물론 그 관계가 역전됐다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 굿스프링을 배드니커의 위에 두는 자는 제국민 중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 반대면 몰라도.
이것이 시대의 흐름인가?
아직까지는 건재하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굿스프링은 저물게 되는 것일까.
하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오직 단 한 명의 인물 때문에 만들어졌다.
철혈공 델락 C. 배드니커.
역사상 최대 개수의 가호 획득, 보석수 토벌, 아카데미 조기 졸업, 최연소 나이에 가주 직을 계승, 황실로부터 미들네임의 하사, 이명을 얻은 공작, 악마 사냥, 제사장 척결까지…….
그 폭발적인 행보는 뭇사람의 이목을 끌었고, 처음엔 공포만 느꼈던 자들 또한 얼마 안 가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철혈공 델락은 가주라 하기엔 너무 자유로웠고.
영웅이라고 하기엔 과할 만큼 잔혹했으나.
별개로 그 활약만큼은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덧 그가 가진 악마에 대한 무한한 증오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군중들도 알게 된 것이다.
저 잔혹한 인물의 손길이 자신들에게 향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실히 철혈공이 가진 천성적인 카리스마는 흉내 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 나의 시대에 배드니커에게 역전당했으니, 은퇴 전까지는 그 과실을 반드시 바로잡겠다.
이것은 가문의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하템 굿스프링의 말버릇이었다.
그러한 분위기의 영향일까.
굿스프링의 구성원 대부분은 배드니커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말이다.
* * *
때려 패면서 깨달았다.
이상할 만큼 튼튼한 놈이라고.
선천적인 강골이랄까?
보기 드물게 이런 녀석이 있다.
의아한 점은, 보통 이런 근골을 가진 남자라면 훨씬 체격이 듬직해야 한다는 점인데.
나비의 체격은 아직 성장기란 걸 감안해도 왜소한 편이었다.
어쨌든 튼튼하단 건 분명한 사실이라서, 나도 안심하고 때려 팼다.
별개로 고통에 대한 내성은 없는 것 같았지만 사실 의외는 아니다.
당장 헥토르와의 대련에서도 정강이뼈를 걷어차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빈틈이 생겨서 패배했으니까.
“…….”
“…….”
나는 바위에 앉은 채 정좌하고 앉은 나비를 내려다봤다.
밤바람이 한번 분 순간, 부르르 몸이 떨린다.
“춥냐.”
“아, 아님다.”
“그럴 만도 해. 겨울이 거의 끝나가긴 해도 아직 밤공기는 차거든. 여긴 호수 근처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네, 네엡…….”
나는 가만히 나비의 얼굴을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벌써 부기가 빠지고 있다.
가호는 아니고, 이 녀석이 가진 신체적인 특징 같다.
“나비야.”
“넵…….”
“너희한테 뭔가 구린 속셈이 있단 건 알아. 세렌 운운한 건 단순 구실에 불과하단 거 말이야.”
“…….”
“그 사정까지는 안 물으마. 사실 크게 궁금하지도 않고. 난 배드니커이긴 하지만, 가문 간의 암투 같은 건 관심 없거든.”
사실을 말하자면, 교단이라는 적이 있는데도 가문 간에 견제나 하고 자빠진 굿스프링이 더없이 한심하긴 했지만…….
이놈도 자기 가문에 자부심을 가진 것 같으니, 그런 속사정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버터란 놈은 보호자로 임시 동행한 거고, 저쪽 영도 놈들이 실제로 따르던 건 너지?”
“그, 그렇슴다…….”
“곧 제도에 도착할 텐데, 남은 시간 동안은 피차 조용히 지내자고. 평화롭고 쾌적한 제도 여행 마차. 좋잖아.”
“조, 좋슴다…….”
나는 나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몇 살이야?”
“…열넷임다.”
“나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네. 말 편하게 해도 돼.”
“아, 아님다.”
“진짜 괜찮다니까.”
“저도 진짜 괜찮슴다……! 이게 편함다……!”
나비가 어쩐지 맛이 간 말투로 대답했다.
저쪽이 편하다는데, 억지로 강요할 필요는 없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아무튼 이제 가도 좋은데, 좀 돌아다니면서 부기만 빼고 들어가라. 괜히 버터한테 의심 사지 말고.”
“…….”
“뭐 해. 가도 좋다니까.”
나비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때려 팼나? 다리 쪽은 안 건드렸는데.
“형님은… 정말로 강하시네요.”
형님?
왠지 모르게 카론이 생각나는 말투다.
나비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굿스프링 대부분이 장남인 히이로 배드니커에게 주목하고 있었는데, 철혈공은 오히려 그걸 이용해 비수를 숨기고 있었던 거군요. 역시 무서운 분입니다.”
그새 헐었던 입안도 다 회복된 건지, 말투도 멀쩡해졌다.
저 정도면 거의 영산에서 염화제일공을 수련하던 나 정도 재생력 같은데.
“…뭔 비수씩이나.”
“아뇨. 제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건 바터 형님 이후로 처음이에요. 설령 신수의 힘을 최대로 개방해도 이길 것 같지 않아요.”
“그러냐.”
나비가 갑자기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형님 정도의 사내가 있다면, 제가 무리해서 데려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데려가다니. 세렌 말이야?”
“맞아요.”
나비의 어조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형님께서 힘을 감추는 것엔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요? 그러니 저는 오늘 본 걸 잊도록 하겠습니다.”
“…….”
사실 내 입장에선 나비가 바터에게 보고하든 말든 큰 상관이 없지만…….
굳이 고르자면 아직까진 좀 더 숨기고 있는 편이 좋긴 하다. 귀찮은 날파리가 안 꼬일 테니까.
“대신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세렌을 잘 부탁한다, 뭐 그런 거야?”
“…그렇습니다.”
의외는 아니다.
바터는 몰라도, 이 녀석이 세렌을 보는 눈엔 호의가 가득했다.
“글세……. 딱히 내가 따로 안 챙겨 줘도 혼자 잘 헤쳐 갈 녀석이야. 동생이니까 잘 알겠지만.”
“그렇긴 하죠. 그래도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 녀석한테 여러모로 빚을 졌지.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면 도와줄 테지만, 과하게 간섭할 생각은 없어.”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비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려는 모양이다.
나는 오늘은 밤공기를 좀 더 마시고 싶은 심정이라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루안 형님, 부디 세렌 언니를 잘 부탁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비의 기척이 멀어졌고, 그때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름달이었구나.’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는, 그제야 잔잔하게 흐르는 수면을 보여 줬다. 꼭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홀린 듯 호수를 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언니?”
* * *
이튿날부터 굿스프링의 영도들이 부쩍 얌전해졌다.
더 이상 음습하게 시비를 걸거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게 된 것.
나비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갑자기 왜 저래?”
“뭔 일 있나……?”
“역시 무시가 답이야. 이쪽이 쭉 반응이 없으니 지친 거라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영도 놈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내게 묘한 시선을 보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헥토르와 카론, 세렌이었다.
“…….”
나는 그 녀석들의 눈빛을 무시했다. 상황을 설명하기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난 신수의 힘을 단련하는 데에 재미를 붙인 상태, 한번 감을 잡으니 진도가 쭉쭉 나갔다.
“대단히 뛰어난 재능입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최연소로 상승의 경지에 이르실 수도 있겠어요.”
빈말 따위 하지 않는 아르잔이 진심으로 감탄한 걸 보면, 리세가 편의를 준 부분을 빼더라도 내 속도가 빠르긴 한 것 같다.
아.
그리고 신수화로 정확히 내 모습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알게 됐다.
“동공 이외에도 머리카락이 조금 까맣게 물들었습니다.”
“음?”
“피부도 살짝 구릿빛이 되셨고요.”
“으음…….”
“아마 단계가 높아질수록 좀 더 선명해질 겁니다.”
검은 머리에 구릿빛 피부, 쭉 찢어진 동공이라니……. 공교롭게도 고대 흑요정의 특징을 빼다 박았다.
리자드맨이 된 것까지는 아니지만, 딱히 긍정적인 변화는 아닌 것 같은 느낌.
“나도 너처럼 뿔이나 돋아났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멋지잖아.”
내 투정에 아르잔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이후론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시간이 흘렀고…….
본가를 떠나고 딱 일주일.
우리는 마침내 제도에 입성했다.
* * *
남부에서 용병 노릇을 하던 시절.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노래가 있다.
새벽의 도시.
늘 희망이 손짓한다네.
황혼의 도시.
암흑조차 달아난다네.
내일의 도시.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네.
제도!
오오. 제도여-.
영원하고 불멸할, 신혼晨昏의 도시여…….
남부 어느 술집을 가든 들을 수 있었던 노랫소리.
잔뜩 취한 음유시인과 용병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부르짖던 노래.
남부에서 그런 노래가 유행하게 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국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위험한 땅이니만큼, 특히 제도를 동경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귀족이긴 했지만, 제도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 노랫말을 들으며 은밀한 동경심을 키웠다.
그리고 직접 두 눈으로 본 제도는, 그때 수백 번 들었던 노래를 완전히 잊을 만큼의 충격을 줬다.
“와아…….”
“장관이구나.”
아직도 그 넓이가 짐작 가지 않는 나비의 숲보다 훨씬 넓지 않을까?
압도적인 위용의 적갈색 성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진 도시는, 내 좁은 식견으로 볼 때 국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커 보였다.
제법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봐도 끝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
사방을 둘러싼 성벽은 높이는 물론, 두께도 생전 보지 못할 만큼 두터웠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강줄기가 하나의 장관을 이뤘다.
황혼강.
듣기로 노을이 질 때쯤의 저 강은, 가장 값비싼 와인보다 아름다운 빛깔을 낸다고 한다.
황가의 상징이 적발이니만큼, 이 나라에서 기본적으로 붉은색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색이고, 그다음이 태양을 상징하는 주황색이다.
그 때문에 제국을 대표하는 칠색의 대마법사도 적색赤色 마법사가 수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어쨌든 우리는 언덕길을 내려갔고, 얼마 안 가 웅장한 제도의 성문 입구에 다다랐다.
웅성-.
성문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우리는 당연히 일반 시민이 이용하는 곳을 쓰지 않는다.
이래 봬도 대부분 귀족가의 핏줄이라서 그렇다.
성문을 지나쳐 도시에 발을 들였다.
“이, 이렇게 큰 도로는 난생처음 봐.”
에반이 놀란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배드니커의 마차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이 도로를 지나는 게 넉넉했다.
아마 다른 도시에서 이 정도 크기의 마차가 지나가면 사방의 이목이 쏠렸겠지만…….
이 도시의 시민들에겐 그리 놀라운 광경도 아닌지, 딱히 주목을 끌지도 못했고.
그나마 배드니커의 문양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추, 축제 기간인가? 사람이 너무 많잖아!”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한 일주일은 헤매겠다…….”
“저건 뭐야? 맛있어 보이는데……!”
“앗! 방금 거인족이 지나갔다!”
제도엔 생전 처음 발을 디딘 촌놈들.
에반과 카리스, 미르, 팜은 거의 창문에 철썩 달라붙은 채 눈알을 굴렸다.
반면 헥토르나 세렌, 샤를, 제로스 같은 고위 귀족은 익숙해 보였고…….
카론은 처음 제도를 내려다봤을 땐 놀란 듯했지만, 지금은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어느 쪽이었냐면…….
“카리스! 대가리 좀 치워 봐! 와. 저 건물 10층은 그냥 넘겠는데?”
굳이 말하자면 촌놈 쪽.
어쩔 수 없다.
말했다시피, 나도 제도에 오는 건 처음이니까!
처음 제도에 오면 그야말로 눈이 돌아간다던데,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아카데미고 뭐고, 한 일주일 제도 관광이나 진득하게 하고 싶을 정도.
물론 배드니커의 마차는 북적북적한 도시 풍경을 뒤로한 채 도로를 내달렸다.
그렇게 도시 내부를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슬슬 촌놈들도 창문에서 떨어져 비교적 진정했을 때쯤…….
[연자여.]
오랜만에 무신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곳은 어디인가? 익숙한 기척이 느껴지는데…….]
어쩐지 요즘 들어 말을 거는 빈도가 늘었다는 느낌을 받으며, 내가 대꾸했다.
‘제도입니다.’
[제도…….]
무신이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무명왕이 잠든 땅이 이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