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탑 내부는 별세계였다.
발을 들인 즉시 공기가 바뀐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기온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부를 밝히고 있는 건 횃불이었는데.
훅-.
화르륵…….
기이한 점이라면, 무슨 장치라도 해놨는지 저 혼자 꺼졌다 타오르는 걸 반복한단 것이었다.
벽면은 습기를 머금은 동굴처럼 우둘투둘했는데, 그 때문에 도무지 건물 내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의아한 건 다수의 문이었다.
똑같이 생긴 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었던 것.
[무지개의 층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첫 번째 규칙※]
[이 층수에선 대화가 금지됩니다.]
[어길 시, 페널티.]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팻말.
‘…인상이 좋기는 개뿔.’
취소, 취소, 또 취소다.
오히려 겉과 속이 다르단 점에서 아사드나 리세보다 훨씬 음흉했다.
어쨌든, 나는 마법사란 자들의 성향을 알고 있어서 즉시 주둥아리를 닫았지만…….
참 희한한 일이다.
분명 이곳에 모인 건 증명된 엘리트들일 텐데, 멍청이 보존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말하면 뭐 어떻게 된다는 거야?”
어떤 놈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입을 열었던 영도가 그대로 사라졌다.
“……!”
“……!?”
“……! ……!?”
“힉-.”
영도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어떤 놈은 반쯤 새어 나온 비명을 급히 틀어막기도 했다.
사라진 놈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그래도 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살짝 궁금해진 나는, 은은한 어둠을 틈타서 신수화를 사용했다.
싸한 기운이 두 눈동자에 집중된 순간, 나의 기감은 1층은 물론이고 탑 바깥까지 확장됐다.
‘바깥에 있었구만.’
강제로 퇴출된 것이다.
쫓겨난 녀석은 창백해진 얼굴로 탑의 문을 강하게 두드렸지만, 열릴 기색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내부에선 저놈이 문을 두드리는 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말이다.
살짝 소름이 끼쳤다.
비록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니까.
‘나라면 저항할 수 있으려나.’
잘 모르겠지만…….
바깥으로 이동할 때, 내게 정확히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직접 느껴 봐야 감이 올 것 같았다.
시험하기엔 리스크가 크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대화]의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야?’
예를 들어, 종이 같은 곳에 적어서 의사를 교류하는 건 가능할까?
전음傳音 같은 방식은?
정령이나 소환수를 이용한 2차 소통이나, 상대에게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가호는 또 어떻고.
“큼…….”
그때 누군가 목을 풀며 시험해 봤다.
누군가 했는데 카리스였다.
일부러 소리를 낸 것 같은데……. 아까 전 녀석처럼 강제로 퇴장당하는 느낌은 안 들었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 그 사실에 용기를 얻은 걸까.
“아, 안 쫓겨나는군……?”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영도들이 깜짝 놀라서 카리스를 보았다.
…….
…….
“……!”
이번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설마 방금 저걸 혼잣말로 치는 건가?
영도들이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차, 참으로 개 같은 곳이군…….”
“으, 으음. 어떻게 해야 올라갈지 생각해야겠군……?”
“방문이 너무 많은 게 의심스럽군!”
“너희들은 어느 문으로 갈 거군? 앗.”
번쩍!
이상한 어투로 말하던 놈이 다시 한번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병신…….’
나는 한심한 눈빛을 한번 보낸 다음, 다시 앞을 보았다.
‘의외로 대화라는 전제가 좀 느슨한 편인 것 같고…….’
[뱀의 눈]으로 방문을 보았지만, 탑 바깥까지 꿰뚫어 봤던 이 힘으로도 저 너머에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 하나는 알게 됐다.
내부를 밝히고 있는 횃불.
이건 진짜 횃불이 아니라, 횃불 모양의 마도구인 듯했다.
이것도 [뱀의 눈] 덕이었는데, 이 눈을 쓰면 사물의 온도까지 시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꺼졌다 타올랐다 반복하는 횃불.
저 횃불의 온도는 손으로 만져도 될 만큼 낮았다.
무슨 의도가 숨어 있는 걸까?
어찌 됐든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먼저 성큼 앞으로 나아간 건 우리의 나비 굿스프링이었다.
‘설마 벌써 수수께끼를 푼 건가.’
영도들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나비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문을 벌컥 열었다.
“……!”
그리고 우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됐다.
벽면에 있는 다른 문이 갑자기 열린 것이다.
“어……?”
그리고 그곳에서 걸어 나온 건 나비였다.
“저, 저게 뭔…….”
말하는 걸 주저하고 있던 영도들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긴 하다.
한쪽 문에선 나비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와 몇 칸 떨어진 다른 문에선 문을 열고 나온 나비의 정면이 보였으니까.
“어어…….”
아마 나비도 이 꼴을 보고 있는 영도들만큼이나 당황스러울 거다.
어쨌든 저 얼빠진 모습을 보니, 수수께끼를 푼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문부터 열고 본 것 같다.
어쨌든 나비를 시작으로 다른 영도들도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 녀석들은 닥치는 대로 문을 열기 시작했고, 곧장 다른 문을 통해 나왔다.
그러다 때때로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쿵!
“악!”
“뭐야!?”
들어가려던 놈과 나오려던 녀석의 머리가 부딪친 것.
“……! ……! ……!”
“……!? ……!”
물론 대화를 해선 안 되기 때문에, 부딪친 두 녀석은 표정과 몸짓으로만 자신이 얼마나 화났는지 표현했다.
나는 살짝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잠시 후 위화감을 느꼈다.
‘인원이 조금 줄었네?’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마구잡이로 문을 열던 녀석 몇 명이 사라졌다.
그중에선 우리 쪽의 팜과 카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수께끼를 푼 건가?
팜은 몰라도, 카리스가 나보다 빨리 풀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순간이다.
누군가가 나를 휙 지나쳤다.
나풀거리는 백발…이 아니라, 은색의 머리카락.
세렌 굿스피링이다.
이 녀석은 혼란스러워하는 영도들 사이를 도도한 걸음으로 지나가더니, 그대로 어떤 문을 열었다.
이 순간 나는 시야를 확장하여 문 전체를 눈에 담았으나, 세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단계로 나아간 거구나.’
다른 생각 없는 녀석과 다르다.
그 얼굴, 그 태도.
아마 세렌은 이 수수께끼를 푼 것 같다.
혹은…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거나.
아무튼 신수화를 계속 쓰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평상시의 시야가 됐는데… 위화감을 느낀 건 그 순간이다.
‘음?’
문의 색이 아까와 살짝 달라진 듯하다.
주변이 워낙 어둑해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주황빛을 띠고 있었다.
화륵…….
착각이 아니다.
횃불이 한 번 꺼졌다 밝혀진 순간, 그 색이 다시금 바뀌었다.
이번엔 노란색이다.
나는 문의 색이 횃불의 점멸에 따라 변화한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
나는 방금 세렌이 들어갔던 문의 색을 떠올렸다.
적색.
그리고 이 층의 이름은 [무지개의 층].
“음…….”
슬슬 감이 올 것 같은데?
저벅.
나는 문의 색이 다시금 적색으로 돌아왔을 때 움직였다.
* * *
문을 연 직후, 세렌을 반긴 건 새로운 방이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벽면에 열 개가량 문이 있었지만, 다른 점은 주변에 영도가 한 명도 없다는 점.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두려울 만도 하지만, 세렌은 딱히 겁먹지 않았다.
그리고 횃불의 일렁임에 따라 미세하게 변화하는 문의 색상에 주목했다.
‘주황색.’
지금이다.
세렌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다시 방을 마주했으며, 이번엔 노란색인 순간에 문을 열었다.
이게 바로 [무지개의 층]의 수수께끼다.
횃불이 점멸함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문.
타이밍을 맞춰 빨주노초파남보, 정해진 칠색七色의 순서대로 일곱 번 나아가면 끝인 것.
간단하다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탑 내부가 워낙 어두운 데다 색의 변화도 극적이지 않아 쉽게 깨닫기 힘들 거다.
물론 이 수수께끼는 시작일 뿐이다.
탁-.
보라색 문을 닫은 다음, 세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앞엔 팻말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엔 이리 쓰여 있었다.
[무한의 계단.]
‘…진짜는 이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하면, 세렌은 지금 자신이 이 계단을 주파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여기서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아카데미에서 쫓겨난다.
그것만큼은 사양이었기 때문에, 세렌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 * *
헥토르 배드니커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무지개의 수수께끼는 그에게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불과 15분 만에 풀었으니 말이다.
스스로는 알지 못하겠지만, 서른여 명의 영도 중에서도 두 번째로 빠른 속도였다.
1위가 세렌인 걸 감안하면 실제론 제일 빨리 문제를 푼 것과 다를 바 없다.
직후 나타난 계단.
[무한의 계단]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계단을, 헥토르는 오르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째 말이다.
‘이상한데…….’
헥토르의 육체로, 한 시간 동안 탑을 오르면 진작 꼭대기에 다다랐어도 이상하지 않다.
더 확실히 말하면 왕복을 두세 번은 했을 시간.
그런데도 이 원형 계단은 끝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법이군.’
헥토르는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정확히 마법이 계단에 어떤 작용을 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진짜로 계단의 개수가 무한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길이 있는 걸까.
혹시 이것도 수수께끼일 수 있어서, 헥토르는 생각나는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전력으로 질주하듯 계단을 오르기도 했고, 옆에 있는 벽에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마지막은 역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는데, 이건 괜한 시도였다.
족히 몇만 계단은 오른 것 같은데, 내려갈 때는 순식간에 입구에 다다랐으니까.
“큭……!”
오기가 치솟은 헥토르는, 더 이상 내려갈 생각을 버리고 뚝심 있게 계단을 올랐다.
약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때.
헥토르의 전신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전력으로 질주하느라 마나는 진작 동이 난 지 오래다.
‘아니. 평소에 비하면 마나가 훨씬 빨리 바닥난 것 같은데…….’
그것도 이 계단의 힘일까?
“허억, 헉…….”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
허벅지와 종아리가 터질 듯이 뜨겁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헥토르는 그 대신 위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포기할까 보냐…….”
* * *
“크하하하…….”
올더슨이 도무지 교육자라고는 볼 수 없는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올더슨의 걸작 시리즈 그 첫 번째인 [마나를 먹는 계단]이다……!”
[마나를 먹는 계단]은 올더슨이 직접 설계한 장치로써, 오르는 자의 마나를 동력으로 끝이 없는 계단을 생성한다.
즉 끝이 안 보이는 계단 높이에 압도당해서 마나를 쓰는 순간, 올라야 할 계단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뜻이다.
물론 마나를 쓰지 않아도 계단은 어마어마하게 길다.
최소 오만 계단은 올라가야 하니까.
그러니까 1층의 진정한 클리어 조건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오만 개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이러니 [수행의 탑]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지…….’
지켜보던 교수들이 개고생하며 탑을 오르는 영도들에게 딱한 시선을 보냈다.
대부분의 영도들이 이미 녹초가 됐다.
포기한 영도도 꽤 보였고 말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빛을 발하는 인재들은 있었다.
“카론 우드잭. 확실히 군계일학입니다. 오르는 속도가 범상치 않아요. 기초 체력도 영도 수준이 아니고.”
“속도만 봤을 땐 나비 굿스프링이 가장 빠를 겁니다. 벌써 계단을 절반이나 올랐으니까요.”
“헥토르 배드니커의 끈기도 대단합니다. 체력은 진작 한계일 텐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여요.”
올더슨이 흡족하게 수염을 쓸어내렸다.
공들여 준비한 탑이니만큼, 이런 식으로 적절히 활약을 해주는 영도가 있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올해 편입생의 수준은 상당하군! 그러고 보니 입학생 중 [무지개의 층] 1위 기록이 얼마였지?”
“6시간 13분 27초입니다.”
올더슨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편입시험이 시작하고 이제 막 세 시간이 지난 채였다.
“호오… 그렇다면 저 중에서 신기록이 나올 수도 있겠군.”
올더슨이 즐거운 얼굴로 쭉 펼쳐진 화면을 보았다.
바로 이거다.
저 표정, 저 고통, 저 절박함…….
젊은이들의 고뇌 섞인 얼굴은 언제나 올더슨에게 활력이 되어 줬다.
“크헤헤헤…….”
처음 나타났을 때의 인자한 표정은 찾을 수 없는 얼굴.
교수들은 학장을 못 본 체하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나쁜 건 아니다.
올더슨은 객관적으로 봐도 훌륭한 학장이었고, 충분히 존경해 마땅한 인물이었다.
괜히 황실의 인정을 받고 칠색의 칭호를 받았겠나?
하지만…….
‘…역시 마법사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졌다니까.’
그나마 마법사치곤 저게 멀쩡한 편이란 게 웃지 못할 진실이긴 하다.
지금 벌이고 있는 짓에도 어떤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말이다.
그때였다.
“어…….”
꼼꼼한 성격상, 구석진 화면까지 모두 확인하던 몰란드 교수가 멍한 목소리를 냈다.
두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기를 몇 번.
지금 보이는 게 헛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직후, 몰란드가 학장을 불렀다.
“저기… 학장님?”
“오! 몰란드 교수. 마침내 쿠키를 찾았는가? 홍차가 좀 식긴 했지만, 이 정도야 내 마법으로 금방 데울 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몰란드 교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한의 계단] 완주자가 벌써 나왔는데요……?”
툭, 올더슨 학장의 얼굴에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