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순간 눈앞의 존재가 인형이란 사실도 잊고 대꾸해 버렸다.
“댁도 제법 치는데?”
“…….”
그러자 레오네가 아무 말도 없이 더욱 짙게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의심이 짙어졌겠지만, 또 저렇게 애매모호하게 웃기만 하니 모르겠다.
그리고 레오네의 정체와는 별개로 오기가 피어났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상대라면, 어떻게든 뭉개 버리고 싶은 게 무인의 심정이다.
‘미안. 조금만 더 버텨 줘라.’
속으로 세렌에게 짧게 사과한 다음, 레오네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일부러 팔뚝에 힘을 주며, 다소 거친 기세로 말이다.
즉 검이 아닌 몽둥이를 휘두르듯 공격한 건데, 칠죄검의 내구도는 상당한 편이라서 이렇게 막 써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레오네는 몇 번 나와 검격을 교환하다, 어느 순간부턴 칼날을 느슨하게 기울이며 내 공격을 흘려댔다.
까앙! 까강!
그리고 난 상대의 방어적인 대응에 화가 난 얼간이를 연기했다.
꼭 분노에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더 거칠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몇 번 그렇게 공격하는 사이, 내 몸에 희미한 자상이 몇 개 생겼다. 레오네의 공방에서도 점차 성의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번 검격이 부딪쳤을 때.
까앙……!
비스듬히 검을 흘리던 레오네가 그대로 밀어붙여 칠죄검을 날려 버렸다.
순간 무기를 놓친 내 상반신은, 아마 상대가 보기엔 완전한 빈틈투성이 꼴이 됐을 거다.
핏, 레오네의 검이 내 목젖을 향했다. 아예 죽여 버릴 셈일까? 의문을 뒤로한 채, 나는 즉시 박투의 태세로 전환했다.
“──!”
레오네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뒤늦게 빈틈이 함정이란 걸 깨달은 듯하다.
‘늦었어.’
무릎에 힘을 푼 순간, 내 신형이 아래로 훅 꺼졌다.
회피라기보다 주저앉은 듯한 모양새였지만, 레오네의 검은 완벽하게 피했다.
그리고 느슨해진 종아리에 힘을 불끈 주며 바닥을 걷어찼다.
꽈앙!
내 몸뚱이가 순식간에 상대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레오네의 턱 아래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맛있어 보이는 빈틈이다.
백일식白日式 제삼초식第三招式.
승화昇火.
빠아악!
깨끗하게 들어갔다.
설령 턱뼈가 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산산이 박살 낼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이상하게 손맛이 별로다.
뼈를 부순 게 아니라, 방패를 후려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심지어 이 녀석, 날아가기는커녕 비틀거리지도 않는다. 고개가 살짝 꺾인 게 전부.
“…….”
그 순간 레오네와 눈이 마주쳤다.
이 녀석은 나를 보며 씩 웃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핫!”
레오네가 내게 왼손을 뻗는다.
쿠우우웅……!
내뻗은 손바닥이 시야를 뒤덮을 만큼 크게 느껴졌다.
금나수의 수법.
방어는 어렵고, 피하기도 늦었다.
맞받아치는 게 최선이란 뜻이다.
백일식白日式 제이초식第二招式.
화륜火輪.
염화에 휩싸인 내 일장과 레오네의 손바닥이 격돌했다. 꽈아앙! 충격의 기파가 사방으로 번졌지만, 우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공방을 시작했다.
유난히 하얀 손을 쳐내며 무릎 차기를 날린다. 팍! 간단히 막혔다. 이 녀석 또한 무릎을 올려 막은 것이다.
“푸핫…….”
그 순간 나도 레오네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호적수를 만난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처음이 아닐까?
무기 없이, 나와 맨몸으로 싸울 수 있는 또래를 만난 건.
이제 이 녀석이 인형이고 아니고는 별 상관이 없다.
나는 이 만남에 감사하며, 들뜬 심정을 몸뚱이로 표출했다.
나의 주력.
그리고 상대의 주력이 일치했을 때의 장점이 있다.
잡생각이나 귀찮은 수 싸움을 고려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싸워도 된다는 점이다.
물론 레오네가 아직 본신의 힘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백일식을 숨긴 채 칠죄검으로 싸웠던 것처럼.
하지만.
“…….”
낄낄 웃는 레오네의 얼굴을 본 순간, 그러한 걱정은 쓸데없는 걸로 느껴졌다.
파파파팍!
권拳, 장掌, 수手, 조爪, 지指, 각脚.
그리고 골骨.
단련한 인간의 육체란 곧 흉기다.
나와 레오네는 초근접한 상태에서 흉기로 상대를 공격했다.
주먹이라는 망치를 휘두르고, 손바닥이란 방패를 들이밀었으며, 손톱이라는 단검을 내찔렀다.
레오네의 손가락이 내 눈알을 노렸고, 나의 주먹은 레오네의 갈비뼈를 부수려 했다.
막혔고, 피했다.
레오네의 무술은 나와 흡사했다. 모든 초식이 치명타란 뜻이었다.
상대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쉽게 공격을 허용할 수 없었다.
이렇다 할 결정타는 터지지 않은 채 오십 초, 백 초, 백오십 초.
마침내 이백 초에 이르렀을 때-.
화악…….
나는 시야가 하얗게 물드는 걸 깨달았다. 기분 좋은 열기가 전신을 내달리며, 전신 기감이 몇 배로 확장됐다.
푸핫, 웃음이 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백화 상태에 진입한 것.
레오네의 동작이 훨씬 느려졌다는 느낌이 든 순간.
빠악!
나의 주먹이 레오네의 안면에 꽂혔다. 쿠당탕……! 승화를 맞고도 꿈쩍하지 않았던 레오네가 속절없이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물론 치명타는 아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네가 퉷 침을 뱉었다. 걸쭉한 핏물과 함께 이빨 조각이 굴렀다.
진짜 인형이 맞나?
“그 모습은 무엇이지?”
레오네도 나에게 의문을 품은 모양이다.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총명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배운 무술.”
“뭐?”
“끝까지 가면 내가 이긴단 거지.”
“아하.”
내 제멋대로인 설명을 이해한 걸까?
레오네가 낄낄 웃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너, 정말로 재밌구나. 그럼 나도 조금 진심을 보여 줄까.”
레오네가 다시 내게 손바닥을 펼쳤다.
다시 금나수?
조금 다르다.
지금 레오네와 나는 족히 열 발자국은 떨어져 있는 상태. 팔을 늘리지 않는 이상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다.
즉 저 녀석은, 지금 뭔가 이상한 수작질을 하려고 한다.
꾸구구국…….
레오네의 손에 거뭇한 기운이 응축된 순간… 나는 그 불길한 기운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알고 있는 기운이다.
‘악기?’
말도 안 돼.
저건 인형이 사용해도, 인간이 사용해도 안 되는 힘이다.
여러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이다.
[레오네-!]
올더슨 학장의 외침이 대련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쩌적.
그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레오네의 손바닥에 그대로 금이 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
내가 여태껏 싸우던 게 사람이 아닌 인형이라는 사실 말이다.
“…쳇.”
꼭 도자기에 금이 간 것처럼 전신을 향해 금이 번졌다.
고통은 없는 걸까?
레오네의 덤덤한 표정엔 아쉬움만이 느껴졌다. 후두둑……. 육체가 붕괴하듯 주저앉는 가운데, 레오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재밌었어.”
“…….”
그리고 손을 흔들며 태연스레 말한다.
“델락에게 안부 전해 줘라.”
“뭐?”
퍼석-.
그리고 레오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는 드물게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뭔-.’
잠깐 세렌 쪽을 봐보니, 이 녀석도 황망한 듯 서 있었는데.
싸우고 있던 철혈공은 레오네처럼 붕괴하진 않았으나, 실 끊어진 인형처럼 기괴한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음.]
그리고 올더슨의 침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형이 폭주를 일으킨 듯하군. 내 불찰이야. 사과하겠네.]
“…….”
[…그와 별개로 자네 둘은 충분히 강함을 증명했네. 4층의 통과 자격은 충분하단 뜻이지.]
그리고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이어졌고.
[축하합니다. 대련의 층을 통과하셨습니다.]
올더슨이 다시 말했다.
[…자네들에게 보물창고의 재출입을 허락하겠네.]
* * *
[대련의 층을 통과한 등반자에겐 다시 한번 『보물창고』의 출입 자격이 주어집니다.]
[보상을 한 가지 선택하십시오.]
대련의 층을 통과하고, 우리는 다시 보물창고로 돌아왔다.
여기서 하나 더 보상을 고를 수 있다지만…….
‘…….’
지금 내 머릿속은 보상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악기가 맞는데.’
착각이 아니다.
이래 봬도 악마를 보고, 제사장과 맞서 싸웠으며, 지옥까지 갔다 온 몸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악기의 기척을 착각할 리는 없다.
악기惡氣.
오직 악마와 악마숭배자만이 다룰 수 있는, 불길하고 사특한 힘.
그 힘의 편린이 인형에게서 발견됐다.
즉.
‘올더슨 학장이 교인?’
헛웃음이 나왔다.
만약 그렇다면 대사범인 후안의 정체 따위는 우습게 느껴질 만큼 일대 사건이고… 그 파급력 또한 비교조차 안 될 거다.
세상에, 칠색의 대마법사 중 하나이며 아카데미의 학장인 올더슨 마르브어가, 실은 교단의 끄나풀이었다니?
“뭐 해?”
“…어?”
문득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세렌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 골라?”
“아.”
“얼굴이 왜 그래? 그 레오네란 인형, 그렇게 강했어?”
세렌이 걱정까지 할 정도면 지금 내 얼굴이 생각보다 심각한 듯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약하지는 않았지.”
“그래? 철혈공은 생각보다 할 만하더라. 물론 나이를 감안하면 정신 나간 수준으로 강하긴 했는데, 가호도 못 쓰고, 마나 운용도 자유롭지 않은 느낌이었어.”
“…….”
말하는 걸 보니 이 녀석은 레오네의 악기를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세렌이 말한 ‘도움’이란 올더슨 학장과는 관계가 없을까?
꼭 그렇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배드니커에서도, 세렌은 미래를 알고 있는 것과 별개로 제사장의 정체까지는 모르는 듯한 눈치였으니까.
나는 일단 어조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있잖아. 혹시 인형도 악기를-.”
“다 골랐는가?”
내 목소리를 끊으며 올더슨 학장이 갑자기 등장했다.
막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세렌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한다.
“저는 골랐습니다.”
“그렇군. 어디 굿스프링 영애의 안목은…….”
올더슨이 세렌의 손에 쥐인 검은색 금속 덩어리를 보더니 놀란 듯 말했다.
“음. 그 골동품을 골랐는가.”
금속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에 얇고 길쭉한 생김새였는데, 내가 일찍이 본 적 없는 특이한 합금으로 보였다.
“20년 전 암시장에서 우연히 입수한 물건이지. 겉보기엔 매끈한 표면을 가진 직사각형의 금속이지만, 내부는 대단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더군.
세렌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설마 이걸 해체하신 겁니까?”
“그러하네. 아, 걱정은 말게. 해체했을 때와 똑같이 되돌려 놨으니까.”
“…….”
“그런데… 혹시 자네는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는가?”
세렌이 살짝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로스트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아서요. 살짝 공부했죠.”
“음. 굿스프링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
올더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어쩌겠나? 자네는 더 등반할 생각인가?”
“아뇨.”
세렌이 고개를 저었다.
“인형과 싸우며 체력을 다 썼습니다. 이 이상 시련을 마주할 자신이 없군요.”
“그렇군. 그럼 내가 곧바로 탑에서 내보내 주겠네.”
“네?”
“지상에 교직원이 있네. 안내에 따라 숙소를 들르고, 곧바로 연회장으로 가면 되겠지. 수고했네.”
“자, 잠깐-.”
슉-.
그리고 다소 갑작스럽게 세렌의 신형이 보물창고에서 사라졌다.
“…….”
“…….”
나는 그 모든 걸 가만히 구경만 했고.
그런 나를 올더슨이 바라보았다.
대단히 복잡한 눈빛이었다.
“…막지 않는군.”
“무얼 말입니까?”
“눈치챘지 않았는가. 내가 억지로 세렌 영도를 내보냈다는 걸.”
“그렇긴 하죠.”
“왜 그냥 지켜보았지? 억지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나눠야 할 얘기가 많지만, 올더슨은 당장의 의문이 우선인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 녀석 많이 지쳤습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이 발생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어요. 그럴 바엔 저 녀석 혼자라도 내보내는 게 낫겠죠. 어차피 세렌은 아무것도 못 봤으니, 입막음할 사람도 저뿐이잖습니까.”
“…허어.”
올더슨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과 대화를 하는 듯하군. 자네는 대체 무슨 삶을 살아온 것인가?”
“…….”
“아니, 이건 혼잣말이었네. 미안허이.”
올더슨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할 말을 고르는 듯한 모습이다.
답답하다.
질질 끄는 대화는 내 취향이 아니라,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올더슨 학장, 당신은 교인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경기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깜짝 놀란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얀 수염이 푸들푸들 떨릴 정도였다.
그렇겠지.
정말 교인이었다면, 이렇게 내 눈치를 보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나도 홀로 생각을 정리하며 여기까진 다다랐다.
“그게 아니면.”
그러니 지금부터 입에 담는 말은 추측이다.
“이 탑에서 악마라도 만들고 있었습니까.”
“…….”
올더슨이 입을 닫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숨을 살짝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정곡을 찔린 듯한 반응이다.
“올더슨 학장. 영웅 지망생으로서, 배드니커의 일원으로서, 무엇보다 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혹시 제정신입니까?”
“…우리는 악마에 대해 무지하네.”
올더슨이 변명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는가? 그들에게 있어 대륙에 사는 모든 지성체는 그저 인간이라네. 7대 종족은 물론이고, 그 파생 종족까지 모두 ‘인간’으로 취급하지.”
“…….”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그렇겠지. 생김새는 물론이고 특성이나 습성, 역사, 문화까지 제각각인 존재들을 하나로 묶는 건 멍청이나 할 법한 짓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오류를 우리 또한 같이 저지르고 있네.”
“무슨 뜻입니까?”
“악마의 종류는 우리 대륙의 종족보다 훨씬 많고 다양하다네. 교인에게 숭배받는 악마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나머지, 우리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악마는 그들의 땅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네. 대륙에 해를 끼치긴커녕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는 놈들이지.”
올더슨의 목소리가 열기가 깃들었다.
“그런데도 우린 그놈들을 한데 묶어 악마라고 부른다네……! 이게 정상적인 사고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생각했네. 악마의 종류가 그토록 다양하다면, 그들의 숫자가 대륙 모든 지성체의 인구보다 많다면, 혹시, 착한 악마도 있지 않을까?”
대마법사란 양반의 헛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는 올더슨을 향해 말했다.
“실례. 농담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악마학에 대해 반평생을 연구했네. 제국에서 나보다 악마에 대해 깊이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세상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훨씬 낫다는 말이 있지요. 올더슨 학장, 당신은 마왕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네.”
그럴 거다.
만약 마왕을 직접 봤다면 저딴 개소리는 내뱉지도 못했을 테니.
“착한 악마라고 하셨지요. 제겐 그게 차가운 불이나 부드러운 돌처럼 들립니다.”
“개소리 집어치워라.”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상대가 대마법사라서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말투에 비아냥이 담기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놈들이 인간을 정확히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가르쳐 드릴까요? 대등한 존재? 당연히 아닙니다. 약자나 피식자. 그 정도만 됐어도 이렇게 극단적이게 말씀드리진 않았겠지요.”
악마에게 인간은 대체 무엇일까.
대등한 존재도, 먹어야 할 피식자도, 길러야 할 가축조차 아니라면.
그놈들은 인간을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장난감입니다.”
“…….”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 위한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장난감을 친구처럼 여기는 아이도 있네.”
올더슨의 말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아까와 달리 훨씬 노골적인 비웃음이 됐는데.
설마 대마법사란 작자가 이토록 유치한 반론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학장님은, 인간과 악마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가?”
“생각은 자유지만 드러내진 마시길. 그딴 정신 나간 생각에 휩쓸리는 얼간이들이 생길 겁니다. 당신의 위치는 가볍지 않아요.”
“정신 나간 생각…….”
이번엔 올더슨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생각이, 철혈공의 생각이라도 말인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