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당연하지만, 나는 암흑교단의 소교주를 한 명 알고 있다.
에반 헬빈.
제사장 후안이 수련회에서 일대 재앙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인 녀석.
사실 에반의 정체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잠재적인 위협 정도?
물론 소교주는 위험한 존재지만.
웬만한 일로 에반이 각성할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나는 후안이 신이 나서 떠들어 댄 말을 떠올렸다.
- 에반 헬빈은 일반적인 교인과는 다릅니다. 평범한 교인은 봉인한 기억을 되찾을 때 매개체를 부숴야 하지만, 소교주는 죽음으로써 각성하지요.
- 그리고 당신은 그로 하여금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줬군요. 하하! 에반 헬빈은 최고의 소교주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즉 에반이 소교주로 각성하기 위해선 죽음이라는 열쇠가 필요불가결하다는 뜻이고…….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소교주로서의 포텐셜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에반의 정체에 대해 떠들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는 그랬는데…….
‘음…….’
올더슨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이 마법사가 보인 솔직한 태도, 호감 가는 언행과 별개로 나는 이자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다.
다짜고짜 에반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단 뜻이다.
게다가 에반의 정체를 아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스스로가 소교주인지도 모를 에반에겐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레오네가 소교주를 찾는 이유도 모른다.
‘아오…….’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러한 고민, 고찰과는 맞지 않는 성미라 짜증도 살짝 났다.
나는 머릿속을 환기하듯 화제를 바꿨다.
“레오네는 왜 죽었습니까?”
“그녀는 아카데미 졸업 이후 곧장 헤로스에 입관했는데, 어느 날은 델락과 둘이서 S급 임무를 받았지. 분명 어려운 임무였지만, 그 둘의 활약이 대단했기 때문에 걱정하는 이는 없었네. 하지만… 복귀한 건 델락뿐이었지.”
“…….”
소교주는 죽음으로써 각성한다.
만약 그 임무에서 레오네가 죽었다면, 곧장 소교주로 각성하여 철혈공을 공격했고… 결국 철혈공은 레오네를 자신의 손으로 다시 죽인 게 아닐까?
물론, 이건 전부 내 망상이다.
애초에 레오네는 에반과 달리, 자신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둘 중 하나겠구만.’
올더슨이 누누이 말한 것처럼 그냥 레오네란 인간이 특별한 것이거나…….
혹은 이미 한 번 죽었거나.
올더슨이 낮아진 어조로 말했다.
“레오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델락일 게야. 둘은 같은 학년이었는데, 아카데미에선 잘 어울려 다녔지. 여기서부턴 내 추측이지만, 레오네는 델락에게 내게 말한 것 이상의 정보를 말해 준 것 같네.”
“가주님은 교단에 대해 유난히 빠삭한 면이 있으셨죠.”
최고의 악마 사냥꾼이 되기 위해선 단순히 강한 것만으로 안 된다.
사냥감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알아야겠지.
만약 철혈공이 레오네의 호감을 사서, 그녀에게 교단에 대한 핵심적인 정보를 다수 입수했다면…….
철혈공이 유난히 교단 토벌로 많은 공을 세운 것도 이해가 간다.
나는 슬쩍 말문을 돌렸다.
“만약 제가 소교주를 확보해서 데리고 온다면, 학장님께선 제게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그건 방금 내 혼잣말에 대한 대답인가?”
올더슨이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을 농담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자네의 실력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교인을 색출하는 건 숙련된 이단심문관에게도 어려운 일이야. 하물며 소교주는 일반 교인은커녕 제사장보다 더 베일에 싸인 존재. 젊은 혈기를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웬만하면 시간 낭비는 말게나.”
무시한다기보다 철부지 애송이를 잘 타이르는 말투였다.
사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난 스스로를 조금은 드러낼 필요성을 느꼈다.
“학장님, 저는 나이에 비해 교단과 제법 얽힌 적이 많습니다. 이미 교인 몇 명을 제 손으로 처리했고-.”
나는 살짝 뜸을 들이며 말했다.
“최근엔 제사장까지 죽였지요.”
“…….”
올더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허.”
이윽고 차갑게 변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지금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고 있는가.”
쉽게 믿지 않을 걸 안다.
나라도 이런 애송이가 제사장을 죽였다는 말을 들으면 의심부터 할 거다.
“저는 배드니커입니다.”
“뭐?”
“가주님이 세운 업적에 존경심을 품고 있죠. 교단과 관련된 일로 거짓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단 뜻입니다.”
“…….”
“정 못 믿으시겠으면 나중에 가주님께 직접 여쭤보셔도 좋습니다.”
“…으음.”
올더슨이 입을 닫았다.
당연히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덤덤한 태도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심지어 철혈공까지 언급했으니까.
이러한 사실과 별개로 믿기 힘든 얘기인 건 분명해서, 일단은 이 정도 반응을 끌어낸 것만으도 성과다.
잠깐 망설이던 올더슨이 말했다.
“확실히… 자네는 교단에 대해 해박한 듯 보였으니, 덮어놓고 부정하기는 어렵겠군. 보상에 대한 얘기였지. 반대로 묻고 싶군.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이 있나?”
얘기가 빨라서 좋다.
나는 곧장 본론을 밝혔다.
“사실 이 아카데미에서 사람을 한 명 찾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마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더군요.”
“음.”
올더슨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 넓은 대륙에 마경이라 불리는 곳은 제법 많지. 자네가 찾고 있는 마경은 어디인가?”
“영산.”
단어만으로 껄끄러운 지명을 입에 담았다.
어쩐지 내 세상에서, 이 단어를 꺼내는 것 자체가 무언가 죄를 짓는 듯한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
그리고 올더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영산에 대해 알고 있구나.’
사실 칠색의 대마법사라면 당연히 알 거라 예상하긴 했다.
“누구를 찾는지 알 것 같군……. 하지만 그와 만나는 건 상당히 어려울 걸세.”
“이유가 있습니까?”
“자네가 찾는 이는 아마 역사지리학 교수인 알렉일 텐데, 그는 기본적으로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네.”
역시 교수였구만.
“직접 찾아가는 건…….”
“추천하지 않네. 문전박대당하겠지.”
“성격이 좀 괴팍한 편인가 보군요.”
“딱히 그렇지는 않네. 정확히 말하면… 현재 제정신이 아니지.”
“……?”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건가?
내가 재차 물었다.
“그럼 만날 방법은 아예 없는 겁니까?”
“한 가지 있네. 그의 수업에 참석하는 것이지. 알렉 교수는 한 달에 두 번씩 수업을 여니까.”
“음……. 수업이 적네요. 인기 없는 과목인가 봅니다.”
올더슨이 쓰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수업이 적은 건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야. 알렉 교수는 지금 재활 과정을 겪고 있네.”
“재활이요?”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판단하게. 아무튼, 역사지리학 수업을 듣는 건 쉽지 않을 게야.”
“뭐 시험이라도 봐야 합니까?”
그렇다면 큰 상관이 없다.
내겐 잊힌 무신이 있으니.
그러나 올더슨은 고개를 저었다.
“역사지리학 수업은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네. 그 때문에 수업을 듣기 위해선 역사학과, 지리학과에서 따로 학점을 따내야 신청이 가능해지지.”
“학점을 따내는 데에 얼마나 걸립니까?”
“평균적으로 반년 정도.”
“전 3개월 뒤면 여길 떠나야 하는데요…….”
“그렇지.”
나는 대놓고 말했다.
“학장 권한으로 어떻게 해주실 수 없습니까?”
“방법이 없지는 않네.”
올더슨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뭔가 싶어서 보니 책과 나무가 새겨진 패牌였다.
“본교의 학생증일세. 다만 일반적인 건 아니고, 특대생을 의미하는 [책]과 [나무]가 새겨져 있지.”
“특대생?”
올더슨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자네를 특대생으로 추천해 주겠네.”
“오…….”
“특대생이 뭔지 아는가?”
“아뇨.”
“…카르텔 아카데미의 특대생이란 단순히 학비만 면제받는 위치가 아닐세. 가장 높은 등급의 기숙사인 자색관을 제공받고, 아카데미 내부 상가에서도 무상으로 물품을 구매할 수 있지. 그러나 가장 큰 권리는 원하는 모든 수업에 조건 없이 참석할 수 있단 점일세.”
“아하.”
나는 이해했다.
“물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일세. 카르텔 아카데미의 교수 권한은 강한 편이지. 한번 수업에 받아들인 학생이라도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제적하는 게 가능해.”
“음…….”
“알렉은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이니, 그의 눈 밖에 나지 않게끔 주의해야 할 걸세.”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네. 나는 이 길로 철혈공에게 사실 확인을 해볼 건데, 만약 자네가 했던 말 중에 하나라도 틀린 게 있다면…….”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올더슨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학장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슬슬 가봐야겠네요.”
“아직 5층이 남았는데 도전하지 않을 셈인가?”
“클리어하면 뭐 있습니까?”
“다시 한번 보물을 선택할 권한이 주어진다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괜찮습니다. 아. 4층의 보상으로 챙길 걸 아직 안 챙겨서요.”
“음. 천천히 고르게. 그리고…….”
어쩐지 올더슨이 억지로 미소 짓는 얼굴을 했다.
“…가위는 잘.부.탁.하.네.”
“옙…….”
“혹시 사용법을 모른다거나, 소지하고 있는 게 부담스러우면 언제든 내게 말하고.”
“알겠습니다.”
당장 그럴 생각은 없지만, 일단 말은 그렇게 해뒀다.
어쨌든 올더슨이 떠났고,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나저나 뭘 골라야 할까.’
딱히 필요한 건 없고.
그렇다고 무신을 또 부르는 것도 그렇다.
그냥 아까 보았던 선홍옥이었나, 그 보석이나 챙길까 싶었는데.
[저게 괜찮아 보이는군.]
의외로 무신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되물었다.
‘어떤 것 말입니까?’
[저 가면 말일세.]
“음……?”
이건 무슨 가면일까.
거창한 디자인은 아니고, 대부분 하얗고 외뿔이 달린 디자인이었다.
‘꼭 귀신 같군요.’
[린찰족麟巀의 가면이네.]
‘린찰족?’
[동쪽 초원에 있는 소수 민족이지. 수는 적지만 역사가 오래돼서 온갖 창의적인 주술을 알고 있지. 가면에 새겨진 붉은 문양은 린찰족 고유의 문양일세.]
‘오호…….
나는 가면을 보며 물었다.
’이 가면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변이의 힘일세.]
‘변이라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건가요?’
[그러하네.]
생각보다 더 쓸 만한데?
적어도 다른 갑옷이니 무기니 하는 것보단 훨씬 괜찮은 듯하다.
‘좋아.’
이걸로 낙찰.
나는 린찰족의 가면을 품에 챙겼다.
* * *
탑을 벗어나니, 선선한 밤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날이 많이 풀렸구나.’
지긋지긋한 겨울도 드디어 끝장이랄까.
올겨울엔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었다. 곧 날도 따뜻해지니만큼, 당분간은 좋은 일만 있었으면 싶지만…….
어째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오셨군요.”
“케이안?”
탑 앞의 가로등 아래 케이안이 서 있었다.
“날 기다린 거야?”
“그렇습니다.”
“이거 미안한데……. 심심했겠어.”
내 말에 케이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아카데미는 오랜만이라 좋은 눈요기가 됐습니다.”
“아하.”
“일단 숙소로 가시지요. 짐은 모두 옮겨 두었고, 갈아입으실 옷 또한 챙겼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갈아입을 옷이라니……. 그 환영회인가 뭔가 때문에?”
“알고 계시군요. 그렇습니다.”
“불참하면 안 되나? 좀 피곤한데.”
사실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지만, 그런 시끌벅적한 곳에 가는 건 딱 질색이라 핑계를 댔다.
그러나 케이안은 조금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환영회는 이번 편입생의 입학회 같은 개념입니다. 참가하지 않으시면 아카데미의 입학 또한 인정되지 않겠지요.”
“음…….”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듣기로 학생회 인원과 교수 몇 명이 전부라더군요.”
그럼 그나마 낫긴 하네.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선 어떤 과목을 희망하십니까?”
“일단은 역사 쪽.”
“의외군요. 틀림없이 무학 쪽을 지향하실 것이라 예상했습니다만.”
“여기 교수들이 가문 대사범들보다 잘 가르치진 않을 것 같아서. 아카데미는 이론 쪽이 특기라니까 그쪽을 배워야지.”
“그렇군요.”
나는 비록 수련회를 절반 이상 빼먹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사범의 가르침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수렵선생과 생존선생의 수업은 머지않은 시기에 맞이할 교단과의 전투에서도 제법 도움이 될 거다.
나는 케이안과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탑 재밌더라.”
“어떤 점이 말입니까?”
“안쪽에 역대 등반자의 순위 같은 게 있었어. 가주님 이름도 있었고 카엘라란 이름도 봤어.”
케이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 또한 아카데미에 재학했었지요.”
“졸업은?”
“못 했습니다. 애초에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2년 다닌 것도 기적이었지요.”
“그런가.”
나는 케이안을 보며 기습하듯 물었다.
“레오네를 알아?”
“…….”
케이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나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는 태도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대화의 흐름상, 만약 몰랐다면 곧바로 부정하는 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케이안도 눈치챘을까.
이 노인은 금방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인님께선 정말 방심 못 할 상대시군요.”
“별말씀을.”
케이안이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가주님은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셨을 겁니다.”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발언.
긍정적인 의미일까, 부정적인 의미일까.
잘 모르지만, 나는 물었다.
“혹시, 그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든가.”
내 말에 케이안이 낮게 웃었다.
“그 당시 가주님은 열두 살이었습니다.”
“열두 살도 연애할 수 있지 뭐.”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실제로 가주님께선 젊었을 적 대단히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노골적인 화제 전환이었지만, 나는 응해 주기로 했다.
“그렇구만. 참고로 난 어때 보여?”
“연애 경험이 있으신 것 같지는 않군요.”
“어째서 그런 심한 말을.”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이라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연애에 흥미는 없으십니까? 아카데미엔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재가 많습니다. 제가 알기로 남녀 간 교제를 금지하는 교칙도 없고 말입니다.”
“내가 좀 바빠서.”
“확실히 그리 보이긴 하군요.”
“그래도 누군가는 바쁜 내 모습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연애 경험이 있으신 것 같지는 않군요.”
“…….”
같은 말이라도 두 번 들으면 뼈가 시릴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경은 인기가 많았나 보네.”
케이안은 내 말에 대꾸 없이 빙긋 웃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댄디한 미소였다.
와… 얄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