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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45화 (145/172)

145화

- 개인적으로 3황자인 글렌 님을 추천하마. 4황녀인 페리스트 님은 교류를 즐기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

헥토르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는 편이다. 대충 이름이 다섯 글자가 넘으면 헷갈리기 시작하는 느낌인데…….

이유는 잘 모른다.

그냥 애초부터 나란 놈이 그렇게 생겨 먹은 거겠지.

변명을 하나 대자면, 글렌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외우기 쉬운 편도 아니다.

황자의 이름치고는 너무 무난하잖아.

‘음…….’

그런데 헥토르 말고도 그 이름을 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잠깐 생각하던 나는, 다행히 이번에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5위. 글렌 스칼렛. 81점.]

수행의 탑 순위에 그 이름이 박혀 있던 걸 봤다.

아마도 순발력의 방이었을 거다.

‘역대 등반자 중 5위 정도라면, 제법 치는 녀석이라는 뜻인데.’

그럼 방금 열차에서 보였던 모습은 뭘까.

실력에 비해 소심한 녀석인 걸까.

아니면 내숭을 떠는 걸까.

전자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나 뭐 불경죄 같은 거 받는 건 아니겠지?”

“뭐 좀 실수했어?”

“딱히 그러진 않았는데, 반말을 좀 했지.”

“카르텔 아카데미의 학생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위치야.”

“휴우…….”

“물론 그렇다고 황족한테 반말을 찍찍 내뱉는 미친놈은 없겠지만.”

염병.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세렌이 나를 보고 슬쩍 웃더니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글렌 황자님은, 직접 봤으니 알잖아? 권위를 앞세우시는 스타일은 아니야.”

“음…….”

“마침 잘됐군. 이렇게 된 거 황자님은 네가 좀 맡아 줘라.”

“맡으라니?”

“별건 없고, 동태를 지켜봐 달란 뜻이야.”

나는 황당한 시선으로 세렌을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황족을 감시하란 거야?”

“도와준댔잖아.”

세렌이 살짝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감시까지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걸로 충분해.”

“세간에선 그걸 감시라고 한단다.”

“…….”

세렌이 입을 닫았다.

“정확히 뭘 중점으로 보면 되는데?”

“…딱히 그런 건 없어. 그냥 너 하던 대로 대하면 돼. 친해질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다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해 주면 돼.”

이상한 일이라…….

의외로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글렌은…….”

“님.”

“…글렌 님은 이미 이상한 녀석이었는데.”

나는 세렌을 보며 말했다.

“즉 이상한 놈이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니까, 이상하지 않은 일을 할 때를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래도 이상한 일을 할 때 일일이 다 보고할까?”

“…알아서 해.”

세렌이 냉랭하게 말한 다음, 살짝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부탁 좀 하자. 응? 난 페리스트 황녀님이랑 같은 수업을 받아야 한단 말이야. 몸이 하나밖에 없어서 황자님까지는 감시 못 해.”

자기도 감시라고 말하면서.

어쨌든 그제야 이 녀석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럼 너 혹시 글렌 님이 어떤 수업을 듣는지 알아?”

“물론 미리 알아 놨지. 역사지리학이야.”

이런 기막힌 우연이.

그러고 보니 열차에서 대화할 때, 글렌 또한 역사지리학 수업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눈치였다.

‘흠.’

세렌의 반응이 재밌어서 좀 빼는 척했지만… 사실 글렌과 친해지는 건 나로서도 나쁠 게 없다.

어쨌든 무명왕릉으로 가기 위해선 황족과 친분을 터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글렌이 대체 무슨 비밀을 품고 있는지도 신경이 쓰이고.

‘설마 황족이 교인인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간, 진짜 제국은 끝장이다.

대사범 후안은 물론이고, 전에 가정했던 올더슨 학장이 교인인 것보다 훨씬 커다란 사건이 될 거다.

이 나라에서 황족은 단순히 권력의 정점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가진 상징성과 다섯 왕의 ‘붉은 혼’을 계승했다는 정통성까지-.

제3황자라면 정치적 입지는 낮을 수 있어도, 그 상징성까지 퇴색되는 건 아니다.

“일단은 알겠어.”

내 대꾸에 세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물러났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영도 놈들이 접근해 왔다.

“뭐야. 무슨 이야기 했어?”

“수업 얘기를 좀 했지. 자기랑 선택 과목 겹치면 죽여 버리겠대.”

“……!”

한순간에 살해 협박을 하게 된 세렌이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못 본 척했다.

“그나저나 어제 환영회는 잘 마무리했어?”

“아. 끝내줬어. 고기가 입에서 녹아내리더라. 뭣보다 악단에 있던 가희가 무진장 예뻤는데-.”

나는 카리스의 호들갑을 한 귀로 흘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 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몇 명이 비어 있었다.

“헥토르랑 에반이 안 보이네?”

“어? 헥토르 님은 너랑 있는 거 아니었어?”

“나?”

“둘이 같은 방이잖아.”

내 룸메이트가 헥토르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방엔 아무도 안 왔어.”

“그래? 피곤하시다고 좀 빨리 떠났는데.”

“음.”

그렇게 말하니 신경이 조금 쓰이긴 했지만, 애초에 어딜 가서 맞고 다닐 놈은 아니라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에반은?”

“검술 수업이 아침부터 있어서 아까 떠났어. 그러고 보니 내 말 들어 봐, 어제 그 녀석이 주스인 줄 알고 실수로 술을 몇 잔 마셨는데,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느끼하게 굴더라니까?”

“오호…….”

그건 재밌었겠는걸.

못 봐서 조금 아쉬울 정도다.

‘근데 에반이 술에 약했던가?’

살짝 의문을 느낀 순간, 팜이 다가와서 말했다.

“루안, 너도 과목 정했으면 빨리 신청해. 시간 얼마 안 남았어.”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늘 수업이 바로 있다고요?”

“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교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역사지리학의 이번 달 마지막 수업이기도 하네요. 놓치면 3주는 수업을 못 들을 거예요.”

“음… 그럼 바로 신청됩니까?”

“물론이에요. 수업 시작까지는… 오전 9시. 이제 30분밖에 안 남았으니 서둘러야겠군요.”

“…네?”

“이론관 108호실로 가시면 됩니다. 수고하세요.”

“잠깐. 거기가 어디-.”

“…….”

교직원은 내 말을 못 들은 척, 충혈된 눈으로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라 일단 교무실에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카리스가 말했다.

“신청은 끝났어?”

“하긴 했어.”

“그래? 그러고 보니 넌 과목이 뭐냐?”

“역사지리학.”

“…너랑 너무 안 어울리는데?”

나는 동감하는 의미에서 살짝 고개만 끄덕거렸다.

팜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그거 하나밖에 안 했어?”

“일단은 그래.”

“아깝다……!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울면서 몇 개나 뺐는데!”

“총 몇 갠데?”

“열다섯 개!”

카리스가 내 곁에 와서 속삭였다.

“쟤도 제정신은 아니야.”

“다 들리거든? 그리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너희가 이상한 거야! 카르텔 아카데미의 입학비가 얼마인 줄은 알아? 나 같은 궁상맞은 집안 출신은 꿈도 못 꿀…….”

“알았어, 알았어.”

카리스가 팜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럼 루안,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 그다음엔 아카데미 구경도 좋고. 아까 교직원이 말하던데, 열차를 탄 채로 부지를 한 바퀴 돌면서 전체적으로 소개해 준다더라.”

“좋긴 한데, 곧 수업이 시작한대서 빨리 가봐야겠다. 이거 놓치면 이번 달은 수업이 없다더라고.”

“음. 아쉽네.”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 혹시 이론관이 어딘 줄 아냐?”

“으음.”

“그을쎄……?”

주변에 있는 다른 녀석들도 모르는 기색이다.

“다른 사람한테 물어야겠구만. 아무튼 난 가본다.”

“그래. 나중에 봐.”

영도 녀석들을 뒤로한 채 일단 본관을 나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만만해 보이는 녀석을 찾고 있는데, 의외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저, 저기……!”

글렌이었다.

이 녀석은 쭈뼛거리는 기색으로, 마치 나를 기다리듯 서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니 어설프게 웃었다.

“아, 아하하……. 여, 역사지리학 수업을 신청하려는 것 같아서……. 괘, 괜찮다면 내가 강의실로 안내해 줄까 싶은데…….”

…그러니까.

이 얼빵한 놈이 황자고.

저 커다란 빵모자 밑엔 황족 특유의 선홍색 머리카락이 숨어 있단 건가?

내가 빤히 보니 글렌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시, 실은 나도 역사지리학 수업을 듣거든…….”

“그래요? 그럼 부탁 좀 합시다.”

내가 존댓말로 대꾸하니 글렌이 살짝 움찔하며 말했다.

“…갑자기 왜 존댓말을.”

“황자님이라면서요? 제가 몰라봤습니다.”

“…….”

그러자 글렌이 입술을 꾹 깨물며, 드물게도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

“…….”

“그냥, 하던 대로 대해 줘.”

딱히 어려운 요구는 아니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까? 알았어. 수업까지 30분밖에 안 남았으니 빨리 가자고.”

“…어, 어? 으응.”

글렌이 황당한 눈으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다행히 이론관은 본관과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느긋하게 걸어서 15분 정도?

노면마차를 탈 것까지도 없단 뜻.

위치를 들으니 그렇게 급한 상황은 아니라서, 나와 글렌은 천천히 걸어갔다.

글렌은 다시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그, 루안은 혹시 역사나 지리 쪽에 관심이 많아?”

“없으면 역사지리학 수업을 왜 골랐겠어?”

“그래? 잘됐다…….”

글렌이 살짝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사, 사실은… 지금 역사지리학 강의실은 좀 이상한 분위기거든…….”

“이상해? 뭐가?”

“몇몇 불량한 학생들이 수업 공간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휴게실로 쓰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빤히 보니 글렌이 말을 이었다.

“108호실엔 수업이 거의 없거든. 학생들이 땡땡이치기에 최적의 장소란 거지…….”

“교수가 뭐라 안 하나?”

그러자 글렌의 눈빛이 살짝 슬퍼졌다.

“알렉 교수님은 수업에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으셔. 원래는 무척이나 열정적인 분이라고 들으셨는데…….”

“음.”

“…어쨌든, 강의실엔 무서운 선배님들도 많으니까 조심해. 아, 아마 내 옆에 있으면 웬만하면 못 건들 거야. 응.”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아무리 소심하다고 해도 황자는 황자니까. 함부로 건들 만큼 간 큰 녀석은 없겠지.

어쨌든 우리는 곧 이론관에 도착했고, 108호실 안으로 들어섰다.

“…….”

문을 연 직후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순간, 나는 과거 남부에 있던 술집에 들어온 줄 알았다.

방 안엔 거북한 술 냄새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초를 얼마나 피웠는지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환기도 안 시키나?

어쨌든 시야가 뿌연 상태라 내부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일단은 계단식으로 된 구조였고, 가장 위쪽엔 열댓 명의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얼굴이 좀 삭은 걸 보니 저놈들이 글렌이 말한 ‘무서운 선배님’들인 것 같다.

저놈들은 이쪽을 보고도 딱히 아무런 반응 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콜록…….”

글렌이 연초 연기가 거북한지 기침했지만, 창문을 열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저 새끼들이 미쳤나.’

아무리 소심하다고 해도 황족인데, 이게 뭔 짓거리인지 내 상식으로선 이해가 안 간다.

더 놀라운 건, 글렌도 딱히 아무 말 없이 강의실 앞에 쭈그려 앉았다는 거다.

다들 정신이 나갔다.

내가 보기엔 저놈들도 미쳤고, 글렌도 미쳤고, 이 꼴을 방관하고 있는 알렉 교수도 미쳤다.

그리고 난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행동을 했다.

창문으로 간 다음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아……!”

글렌이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방 내부의 거북한 연기가 그제야 빠져나갔다.

이제야 좀 살겠네.

“…….”

끝단에 앉은 덩치 큰 놈이 나를 노려본 순간, 이 공간에 ‘예의’와 ‘범절’을 흩뿌리고 싶단 생각이 치솟았지만…….

곧 수업이 시작할 텐데 이곳에 피바람을 불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글렌의 옆에 앉았다.

“루안…….”

“왜.”

“으음. 아무것도 아니야. …노트 빌려줄까?”

“감사.”

나는 글렌에게 여분의 노트와 필기구를 받았다. 혹시 뭔가 메모할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음.”

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간 9시 10분.

수업 시간이 이미 10분이나 지났는데, 교수란 작자는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사정이 생겨서 좀 늦는 걸 수 있으니 좀 더 기다렸지만…….

분침이 30분을 가리킬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늦게 오시나?”

“오, 오늘은 좀 더 늦으시네…….”

애초부터 자주 늦는다는 뜻이다.

쉽게 풀리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어째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이는 느낌이다.

“으음…….”

그런데 글렌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쩐지 꼬물거리는 듯한 느낌.

“화장실 마렵니.”

“아, 아니…….”

“다녀와.”

“음. 하지만…….”

글렌의 시선이 살짝 뒤를 향했다.

저놈들과 날 같은 공간에 놔두는 게 신경 쓰이나 보다.

‘내가 뭔 애도 아니고.’

아님 내 인상이 의외로 유약한 편인가?

“괜찮다니까. 어차피 교수님도 곧 올 거 아냐?”

“…그렇긴 하지.”

망설이던 글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금방 갔다 올게.”

후다닥 뛰어가는 걸 보니 많이 참은 모양이다.

나는 손을 흔들며 글렌을 배웅했고…….

드르륵-.

글렌이 떠난 순간, 의자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다수의 기척이 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못 보던 얼굴이네?”

가장 눈에 들어오던 곰 같은 놈이 못생긴 얼굴을 내게 바짝 당기며 물었다.

“1학년 같아 보이는데… 맞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그럴걸.”

편입생이긴 하지만, 일단 우리는 죄다 1학년으로 처리돼 있을 것이다.

“그럴걸?”

곰탱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미소를 싹 지우더니 나를 노려봤다.

“야, 머리 허연 놈. 너 어디 가문이냐?”

“…….”

※ 본 회차에 다소 놀라실 수도 있는 삽화가 포함되어 있으니 독자님들께선 감상 시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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