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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47화 (147/172)

147화

알렉의 진심은 충분할 만큼 전해졌지만, 그래도 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더 없습니까?”

“다른 거?”

“예를 들어 탐험 일지라거나.”

“…….”

알렉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기와도 같았던 열기가 차츰 가라앉으며, 방금 보였던 절실한 태도도 안개처럼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알렉 교수는 차분해진 태도로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오늘은 이만 가보게.”

“교수님.”

“사흘 후 수업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이토록 단호하게 말하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내키지 않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뵙겠습니다.”

* * *

마음이 심란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게 좋다.

시선은 눈이 가는 대로, 발걸음은 마음껏, 팔은 흐느적흐느적.

알렉의 실험실을 나선 뒤, 나는 딱히 목적지를 두지 않은 채 아카데미를 누볐다.

하늘을 봐도 아름답고, 강을 봐도 아름다웠고, 잘 닦인 도로나 가로등, 그 너머에 펼쳐진 건물도 예뻤다.

아마 제도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장소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나는 길을 걷다 보이는 적당한 벤치에 앉은 채, 잠깐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대륙 최악의 마경이라는 영산.

생환율 0.1퍼센트 이하, 침입자로 하여금 죽지도, 살지도 못한 꼴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받은 땅.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된 느낌이다.

‘…이래서 직접 알아보라고 한 거구만.’

나는 철혈공의 저의를 이해했다.

때로는 말에 담긴 의미보다,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어쩐지 철혈공이 직접 영산에 대한 위험성을 설명했다면, 이렇게까지 확실한 느낌이 전해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꺾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영산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나도 살짝 미쳐가는 건가.’

혼자 낄낄 웃으며 생각을 정리해 봤다.

알렉은 아마 영산의 탐험 일지를 갖고 있을 거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실험실 안에서 본 마도구와 낡은 출판물, 사진……. 그 밖에도 언뜻 보았던 책과 서류, 비커에 든 용액이나 소재 모를 생물의 육체 일부분까지-.

그 모든 게 크건 작건 영산과 관련되어 있을 거다.

그렇다면 알렉이 제국의 멸망을 입에 담았던 근본적인 연유도 영산이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멸망이라…….’

멸망이 거창한 게 아니다.

육마왕이 완전한 형태로 대륙에 현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멸망의 시작점일 터.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사진…….’

괴물 놈의 면상이 워낙 압권이라 쉽게 깨닫지 못했지만…….

그 사진엔 태양도 찍혀 있었다.

까맣게 물든 태양 말이다.

부자연스러운 일식日蝕, 즉 마왕 강림의 징조.

그렇다면… 영산엔 이미 마왕이 강림해 있는 걸까.

꾸르륵…….

왠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가나 싶더니, 극심하게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어젯밤부터 쭉 굶은 상태다.

‘…일단 뭐라도 좀 먹자.’

이만큼 무식하게 큰 아카데미라면 식당도 한두 곳이 아닐 거다.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다면 금방 갈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고, 탐험이라도 하듯 아카데미를 누비며 식당을 찾았다.

일단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곳이긴 하지만, 이곳은 학생 말고도 사람이 많았다.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나 요리사, 경비, 사용인, 교직원, 이들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보였다.

이 정도면 카르텔 아카데미의 수용 인원은 마을 정도의 규모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거다.

조금 걷다 보니, 실제로 그런 느낌의 거리가 나왔다.

카르텔 아카데미 특유의 과하게 멋들어진 디자인이 아닌,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마을의 거리 같은 느낌.

‘아. 이곳이 상가인가.’

학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거리를 걷는다.

생각해 보니 주머니는 제법 두둑한 상태라서, 마음이 풍족한 상태로 거리를 구경했다.

거리엔 단순히 먹거리만 파는 건 아닌 듯하다.

서점이나 잡화점, 의류점, 심지어 대장간이나 마법 상점도 보였고.

평균적인 물가는 제법 높은 편인 듯하다.

아카데미 재학생 대부분이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해서 거리엔 학생들이 많았고…….

제법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집도 여럿 보였지만.

오늘의 나는 어쩐지 소란스러움을 피하고 싶은 느낌이라, 점점 인적이 드문 장소로 발걸음이 빨려들어 갔다.

그렇게 뒷골목을 전전하길 몇 분, 제법 적당한 분위기의 음식집을 찾았다.

[너희 엄마의 나팔 소리]라는, 다소 해괴한 이름을 가진 술집이었는데-.

어쩐지 작명법이 남부의 술집과 비슷해서 묘한 향수가 일었다.

딸랑-.

“어서 옵쇼.”

괄괄한 목소리가 들렸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위치에 조명도 은은한 편이라, 가게 내부의 분위기는 어둑했다.

내 마음에 쏙 든다는 뜻이다.

나는 적당한 곳에 앉은 다음 말했다.

“여기서 제일 잘하는 밥이랑 술 한 잔.”

“낮에 술은 안 팝니다요.”

“지금 밤 같은데요.”

나는 은화를 하나 튕기며 억지를 부렸다.

주인장은 능숙한 태도로 은화를 단숨에 낚아채더니, 아직 햇살이 쨍쨍한 창문에 커튼을 치며 말했다.

“확실히, 요즘 해가 빨리 지긴 하지요.”

주인장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어떤 음식이 나올까 기대하며 가게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조용하긴 해도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저마다 조용한 태도로 식기를 달칵이며 식사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그 속에서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하나 있었다.

“으븝…….”

입에 소시지를 쑤셔 박고 있던 건 나비 굿스프링이었다.

나비가 씹고 있던 소시지를 다소 급하게 삼키더니 내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딱히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왔는데 설마 선객이, 그것도 아는 얼굴이 있을 줄이야.

‘그나마 친한 녀석이 아니라 다행.’

나는 짧게 대꾸하고 말 걸지 말라는 기류를 팍팍 풍겼지만, 이 녀석은 눈치를 소시지에다 넣고 삼켰는지 내게 다가왔다.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어제 환영식엔 왜 안 왔어요?”

“일이 좀 있었거든.”

“무슨 일이요?”

“그런 게 있단다.”

“그런 게 뭔데요?”

“…….”

그냥 애초부터 눈치가 없는 녀석이었구만.

내가 아무 대꾸 없이 심드렁하게 바라보니, 나비가 그제야 찔끔거렸다.

“…으흠. 그러고 보니 헥토르는 괜찮아요?”

“헥토르 형님이 왜?”

“그야, 어제 그런 꼴을 당했으니까…….”

그런 꼴?

내 의아한 시선을 느낀 나비가 갑자기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요?”

“무슨 일 있었어?”

“훗. 그런 게 있습니-.”

내가 주먹을 살짝 올리자, 나비가 입을 열었다.

“…환영회가 끝나고 바터 형님이랑 잠깐 만나서 겨뤘어요.”

“버터? 그 녀석 아직 안 돌아갔어?”

“바터입니다. 형님은 카르텔 아카데미의 검술학 교수 중 한 사람이기도 해요. 물론 자주 자리를 비우시긴 하지만, 1년 최소 수업 횟수는 아슬아슬하게 채우셔서 그 신분이 유지되고는 있죠.”

“음…….”

“헥토르도 검술학 수업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어서, 강의를 받기 전에 실력을 한번 봐주겠다는 얘기가 됐어요.”

결과는 안 들어도 알겠다.

헥토르는 물론 수련회를 거치며 강해졌지만, 아직 바터에 비하면 힘도 경험도 부족하다.

‘어제 왜 방에 안 들어왔나 싶었더니…….’

좌절이라도 한 걸까?

지금의 헥토르라면 딱히 걱정되지는 않지만, 나중에 낯짝 정도는 확인해 봐야겠다.

“그래서 넌 여기서 뭐 하냐.”

“밥 먹고 있죠.”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난 원래 이런 어둡고 칙칙한 곳을 좋아해.”

“어둡고 칙칙해서 미안하게 됐수다.”

주인장이 그리 말하며, 딱히 기분 나쁘지 않은 얼굴로 내 앞에 술과 음식 그릇을 놔뒀다.

술은 맥주였고…….

그릇엔 닭고기가 들어 있었다. 형태와 냄새를 보니 소스와 와인을 넣고 끓인 조림인 것 같았다.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제법 많이 먹는 편이지만, 이 정도 양이라면 두 그릇 정도면 배가 찰 수도 있겠다.

달칵.

주인장이 빵이 얹어진 접시를 올리며 덧붙였다.

“빵을 찍어 먹으면 더 맛난다우.”

“감사요.”

우선 맥주부터 한 모금 마신다.

술집 분위기 때문일까?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정말 과거 용병질을 하던 시대로 회귀한 것 같았다.

물론 그 열악한 곳엔 살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맥주처럼, 사치스러운 건 없었지만…….

나는 술집 안에 자그맣게 세워진 무대를 보며 말했다.

“음유시인도 간혹 들르나 보네요.”

“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취미로 하프를 좀 치는데, 그때나 쓰지요. 대부분은 취기 오른 얼간이들이 올라가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릅니다.”

그럼 그냥 소품이란 뜻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부 술집 같은 분위기군요.”

“오… 알아보시는군요. 실은 제 아버지가 그쪽 출신이라, 인테리어에 좀 신경 썼습죠.”

실실 웃는 주인장의 얼굴을 다시 보니, 유난히 수염이 많고 코가 컸다.

“난쟁이?”

그것치고는 키가 좀 큰데.

“아버지 쪽만 말입니다.”

“아하.”

혼혈이었군.

딱히 드문 일은 아니다. 나는 웃으며 잔을 흔들었다.

“어쩐지 맥주 맛이 좋더라니.”

“흐허허. 칭찬은 고맙지만, 난쟁이가 양조를 잘한다는 건 편견입니다.”

주인장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안주로 닭고기도 집어 먹었다.

잡내는 없었고, 걸쭉한 소스도 풍미가 깊었다. 주인장 말대로 빵을 찍어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나비가 다시 물었다.

“누님은 어떻습니까?”

“뭐가?”

“또 뭔가 위험한 일을 하고 있진 않나 싶어서요.”

아무래도 세렌의 막무가내식 행동은 가문에서도 유명한 모양이다.

“별일 없어.”

“…그래요? 그럼 다행이지만.”

“그 녀석은 가문에서도 왈가닥이었나 보네.”

내 말에 나비가 낮게 웃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진 않았어요. 제 기억으론 한 열 살? 그때부터 좀 변했는데, 가끔 보면 저도 사람이 아예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요.”

“원래는 어땠는데?”

“굉장히 소심했고, 감정 표현도 잦았죠. 자주 웃었고, 그보다 훨씬 자주 울었고.”

“…….”

나비의 말에, 나는 본가에서 잠깐 마주쳤던 ‘세렌 굿스프링’을 떠올렸다.

- …아,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루안 공자님……?

- 아, 아니면 전 약혼자님?

“있잖아. 너희 누나 말인데-.”

“……!”

그 순간 나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루, 루안 형님……! 저 여기서 본 건 비밀입니다!”

“뭐?”

나비는 대답도 듣지 않고 소시지를 입안에 욱여넣더니, 급하게 가게 뒷문으로 우당탕 나갔다.

그리고 거의 직후 정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

바터 굿스프링이었다.

생긴 것부터 옷차림까지, 화려함으로 치장한 녀석이다 보니 이 허름한 가게 배경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가게 내부를 훑던 바터가 나를 보더니, 눈가에 이채를 띠었다.

“너는…….”

나는 딱히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 술을 마셨다.

“명문가의 일원이 대낮부터 술판이라……. 배드니커는 항상 내게 뜻밖의 일면을 보여 주는군.”

“그쪽도 한잔?”

반쯤 남은 맥주잔을 흔들며 말하니, 바터가 픽 웃었다.

“자네나 많이 마시게.”

“…….”

“그런데 혹시 여기에 내 동생이 있지는 않았는가?”

“세렌이요? 모르겠네요.”

“흐음.”

바터의 시선이 나비가 있던 테이블에 닿았다. 식은 소시지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못 봤다면 어쩔 수 없지. 혹 보게 되면 내가 찾는다고 말해 주게.”

“그럽시다.”

바터가 싱긋 웃으며 떠났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속이 느글거려서, 나는 반이나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다음 외쳤다.

“주인장! 여기 한 잔 더!”

* * *

별사건도, 소란도 없이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거의 방에서만 지냈는데, 수업을 역사지리학 하나밖에 신청하지 않아서 나갈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딱히 지루하지는 않았다.

낮에는 운공에 열중하고, 밤에는 신수의 힘을 단련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잘 갔다.

한창 성장 곡선이 치솟을 시기라 그렇다.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내공을 보고 있자면, 그냥 아예 볕 잘 들고 인적 드문 곳에 1년 정도 틀어박혀 운공만 하고 싶을 정도다.

물론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그럴 수는 없다.

그래도 내내 방에 처박혀 있지는 않았고,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식당으로 기어 나갔다.

그때 영도 놈들과 부딪치면 이런저런 안부와 함께 소식을 들었고…….

…팜의 말에 따르면 수업을 고작 하나만 선택한 건 나뿐이라고 한다.

물론 이 녀석처럼 열다섯 개나 받은 녀석은 없었지만, 비교적 적은 녀석도 네다섯 개쯤은 신청했다는 모양.

사실 평균적으로 수업 일수가 많아도 일주일에 두세 번이니, 저 정도는 해야 알찬 아카데미 생활이 가능하다는 듯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세렌의 말대로 글렌을 감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 왜 이런 곳에 있는 건데?”

“좋은 질문이야.”

나는 오늘도 [너희 엄마의 나팔 소리]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곳 밥값이 싼 편은 아니었지만, ‘열여섯에 부자가 된 루안’에겐 썩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렌도 오늘은 수업이 없다길래, 여태까지의 정보나 교환할 겸 같이 왔다.

“글렌 황자가 머무는 곳을 몰라. 그러기는커녕 연락할 방법도 없지. 그래도 내일 역사지리학 수업이 있으니까, 그때 물어보려고.”

“태평하시군.”

“좀 봐줘라. 그 녀석 묘하게 까다롭단 말씀이야. 황자의 권위는 둘째 치고, 도무지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어.”

그러자 세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까다롭다고? 글렌 황자 정도면 얼마나 말이 잘 통하는 상대인데. 나는… 하. 진심으로 죽을 지경이야.”

“페리스트 황녀였나. 그 사람이 왜?”

“황녀님은…….”

그 순간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찬란한 역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어둠으로 전신을 감싼 듯한 소녀였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보는데…….

가게 내부를 훑어보던 소녀가 어쩐지 연극이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친우- 세렌 굿스프링이 혹시 여기 있는가?”

세렌이 흠칫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황녀님.”

“어머. 있었구나.”

황녀라 불린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품에는 제법 큼직한 인형을 안고 있었는데, 그 인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렴, 데스베리. 이곳에 있을 거라고 말했잖니.”

“…….”

내가 황당한 시선을 보내는 사이, 황녀가 다시 말했다.

“나의 친우 세렌. 근사한 음식집을 소개해 준다고 했었는데, 혹시 여기였니?”

“…그렇습니다.”

“흐음. 축축하고 어두운 곳이구나. 어쩐지 영감이 치솟는 것 같아. 마음에 들어.”

그리고 황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쪽은?”

“…루안 배드니커입니다.”

“어머. 배드니커.”

생긋 웃은 황녀가 인형을 움직이며 말했다.

“들었니, 데스베리? 배드니커래. 너도 인사하려무나. …‘안녕? 못되게 생긴 배드니커! 난 데스베리야’. 후후후. 초면에 그런 말은 실례란다, 데스베리.”

황녀의 품에 안겨 있던 인형이 내게 꾸벅 인사했고… 뒤이어 황녀는 무언가를 바라는 눈으로 나를 봤다.

“…….”

“…….”

“…안녕, 데스베리.”

“후후후.”

만족스럽게 웃는 황녀님.

마침 세렌이 반쯤 죽은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위로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글렌이 선녀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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