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방으로 돌아오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형님?”
“…음.”
짐을 정리하고 있었던 걸까.
헥토르가 얼굴을 절반 정도만 돌린 채 나를 의식했다.
나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얼굴 보기 힘드네. 여태 어디서 잔 거야?”
“…무술관 내부엔 휴게실이 있다. 거기서 며칠 머물렀지.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하다. 한창 몰입하고 있어서 흐름이 끊기고 싶지 않았어.”
“미안할 것까지야. 적당히 하라고.”
“그래.”
나는 잠깐 헥토르의 뒷모습을 보았다.
언뜻 보인 옆얼굴은 살짝 부어 있었다.
“…….”
나도 나름 사람을 패는 데엔 도가 튼 인간이라서 알 수 있다.
저건 단순한 대련으로 생기는 상처가 아니다. 상처만 봐도 사람의 악의가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번이 그랬다.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밤공기도 좋던데, 산책이나 하고 와야겠다.”
“이 시간에?”
“난 원래 밤에 싸돌아다니는 거 좋아해. 형님 먼저 자도 좋아. 정리도 마저 하고.”
“그런가.”
다시 외투를 챙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기 직전, 헥토르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루안.”
“어.”
“고맙다.”
나는 픽 웃으며 문을 닫았다.
“별말씀을.”
* * *
이튿날.
마침내 알렉 교수의 수업 날이 왔다.
요 며칠 동안 하도 싸돌아다닌 덕분에, 이제 아카데미 부지도 제법 익숙해졌다. 물론 아직 못 가본 구역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제는 혼자 다닐 수 있단 뜻이다.
고작 수업 하나 들으러 가는데 케이안, 아르잔을 대동하는 것도 좀 그래서 요샌 혼자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듣기로, 대동한 사용인에게도 수업을 들을 권리는 있다고 해서 둘에겐 관심 있는 분야의 수업을 들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케이안은 웃으면서 정중히 거절했고, 아르잔은 감사를 표했다. 태도를 보니 듣고 싶은 수업이 있었나 보다.
살짝 궁금하긴 했지만, 억지로 캐묻는 것도 멋없는 짓이라 생각돼서 입을 닫았다.
아무리 사용인이라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맞이한 수업 시간.
“아, 안녕!”
“안녕.”
오랜만에 만난 글렌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오늘 목표는 수업이 끝난 뒤 곧장 헤어지지 않고, 이 녀석과 밥이라도 한 끼 하면서 가능하면 연락할 수 있는 창구까지 마련하는 것이다.
물론 다짜고짜 만나자마자 그런 얘기를 꺼낼 수는 없다.
소심한 것과 별개로 눈치는 빠른 것 같으니, 괜히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흠.’
…어쨌든 오늘 강의실은 유난히 조용했다.
뒷좌석을 점령한 탈리스와 그 염병할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인데…….
어제 에반에게 참교육 당하고 콧대가 뭉개졌으니, 한 며칠 정도 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고, 오늘은 강의 시간에 딱 맞게 알렉이 등장했다.
알렉은 착석한 우리 둘을 보더니, 인사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시작하겠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강의가 시작됐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지난번 수업보단 좀 더 성의가 느껴졌고 때때로 시선까지 마주쳤다.
며칠 동안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나는 알렉의 수업에 집중하는 한편, 저 남자를 어떻게 꼬드겨야 탐색 일지를 받을 수 있을지 고심했다.
아무튼.
내가 느낀 변화가 착각은 아니었는지,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 알렉이 이리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혹시 질문할 게 있는가?”
“……!”
글렌이 살짝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태도를 보니 이렇게 질문 시간을 갖는 게 이번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없다면-.”
“교수님은!”
글렌이 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렉의 시선이 글렌을 향했다.
“72교나 태양교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암흑교단을 말하는 것인가?”
“그, 그렇습니다.”
알렉이 특유의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국의 주적이자 종말론자.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뚜렷한 적대 세력이지만, 실은 그 어떤 신비 세력보다 정체가 불분명한 집단이기도 하지. 대답이 되었는가?”
“…교단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여쭤본 게 아닙니다.”
글렌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낯설다.
황자는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교수를 직시했다.
“교수님이 교단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교수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셨지요. 교단의 주된 포섭 방법은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해일을 마주한 뱃사람은 때때로 바다로 몸을 던진다.’. 해묵은 격언이지만, 오늘날 그 의미가 잘못 전달되고 있지. 바다로 뛰어든 자는 공포 때문에 미친 게 아니야. 진짜 이유는.”
“해일이 되기 위해서죠. 그럼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니까.”
글렌이 말을 이어받았고, 알렉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교단의 악의 경전엔 인류가 맞이할 아흔아홉 가지의 종말이 서술돼 있고, 그 비틀린 교리는 듣는 자의 정신을 오염시키지. 그리고 충분히 미친 사람에게 다가와서, 속삭인다.”
- 함께하겠는가?
어떻게 보면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담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교단의 수법은 거기서 한 단계 나아가 있다. 훨씬 음험하고, 악랄하단 뜻이다.
나는 교단이 단순히 공포만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공포 이상으로 잘 다루는 도구가 광기다.
세상에서 제일 피해야 하는 인간은 미친 인간이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미친놈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이다.
따라서, 내 관점으론 암흑교단이야말로 제일 위험한 놈들이다.
“제겐 근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름 아닌 종교를 자칭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믿음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는 집단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글렌이 잠깐 망설이며 물었다.
“교수님, 교단이 정말로 단순한 악일까요?”
“…….”
숨을 들이켜는 소리.
나는 물론이고, 이야기를 듣던 알렉의 눈가마저 날카로워졌다.
“-황자님.”
알렉이 달라진 어조로 말했다.
“이곳 아카데미에서 신분의 고하는 중요치 않지만, 부디 당신의 위치를 좀 더 자각하시길.”
“교수님이라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아카데미에서, 누구보다 제국의 멸망에 확신을 가진 게 알렉 교수님이니까요.”
글렌의 목소리에 점차 열기가 묻어났다.
나는 그 모습에서 영산에 대해 떠들던 알렉의 모습을 엿봤다.
광기를 엿봤다.
“많은 자들이 착각하고 있습니다만, 교단에게 제국 멸망이란 결코 목적지가 아닙니다. 중간 지점이지요. 저는 알고 싶어요. 무명의 제국이 멸망한 이후, 교단은 어떻게 움직일까요? 멸망을 바라는 자들이니 모두 자결을 택할까요?”
“…….”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그들에겐 숨겨진 진짜 목적이 있어요. 저는, 그걸 알고 싶습니다. 설령…….”
글렌이 입을 닫은 채 침묵했다.
휘몰아치던 광기의 폭풍도 살짝 멎었다.
하지만 나도, 그리고 아마 알렉도.
글렌에게서 이어질 말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설령, 교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대앵-.
종소리가 울렸다.
* * *
수업이 끝나고 알렉 교수가 떠났다.
알렉은 다시 사흘 후에 보자고 말했다.
어쩐지 당분간은 꾸준히 수업을 진행할 것 같은 말투였다.
- 오늘 문답은 못 들은 걸로 하겠네.
떠나기 직전 알렉은 그리 말했고… 글렌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또다시 평소의 소심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로 옆에서 모든 대화를 들은 나로선,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이다.
벤치에 앉아 있는 글렌을 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얼어붙은 태양처럼, 무기질적인 태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그 옆에 앉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 교인이냐?”
“…….”
우리는 잠시 나란히 앉은 채 카르텔 아카데미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배움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싹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이 풍경을 그대로 그림에 담아 그리고, 작품명을 [평화]라고 지어도 될 만큼.
글렌이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넌 붉은색을 좋아해?”
“싫어하지는 않지.”
내게 적색이란 태양이나 불꽃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감靈感의 색이다.
물론 글렌은 그런 의미로 물은 게 아닐 거다.
“나는… 싫어해. 실은 엄청 싫어하지. 왜 붉은색이 고귀의 상징이니, 시작의 색이니 떠받들리는지 모르겠어.”
“…….”
“난 내 머리카락이 싫어. 내 눈동자도 싫고, 노을이 진 하늘을 보는 것도 싫어. 내게 있어 붉은색은, 그냥 핏빛이야.”
글렌이 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가 보고 싶어.”
“페리스트 황녀 말이야?”
“아니. 내 진짜 누나.”
글렌이 나를 보며 말했다.
“교인이냐고 물었지. 그럴 리가 있겠어? 하지만, 나는 황실보단 차라리 교단이 옳다고 생각해.”
“왜.”
“배드니커를 알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다 알면서 묻는 건가, 싶어서 슬쩍 옆얼굴을 봤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남들만큼은 알지.”
“철혈공이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가혹하다고,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정말로 가혹한 건 황실이니까.”
글렌이 나를 보며 웃었다.
“있잖아, 루안. 한때 황자가 수백 명 있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어?”
“뭐?”
글렌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 들은 걸로 해줘.”
“…….”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미안. 오늘은 피곤해서 좀 쉴게. 난 적색관 305호실에 머물고 있으니까, 다음에 보자.”
글렌이 그 말을 남긴 채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붙잡고, 추궁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속이 슬슬 뒤틀리는 걸 느꼈다.
‘…아.’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 * *
전에도 말했듯, 나는 딱히 술을 즐기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최근엔 자주 맥주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답답한 일이 많아서 그런 걸까?
아마도 그럴 거다.
용병 생활을 할 때가 딱 그랬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 딱히 나아지지 않는 생활, 죽지 못해 살아갔던 삶을 안다.
가슴은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겁고, 아무리 오래 자도 정신이 개운해지지 않는다.
엿 같은 인생을 잊기 위해선 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해가 질 무렵, [너희 엄마의 나팔 소리]로 가던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고…….
지금 내 꼴을 스승님이 보면 뒤통수를 후려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후우…….”
나는 억눌린 숨을 내뱉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쉽게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술을 처마실 때가 아니라 정리부터 해야 했다.
나는 뜬금없이 길거리 한가운데서 난장판이 된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글렌은 교인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내 생각은 그렇다.
오늘 그 녀석이 보인 모습에서 짐작하자면, 교단에 우호적이라기보단 황실을 증오하는 쪽에 가깝다.
황실이 싫어서, 욕보이기 위해 제국 최대의 적인 교단을 억지로 긍정하려는 듯하달까?
다소 충동적인 태도였지만, 나이대를 감안하면 이상할 건 없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 같지도 않으니, 홧김에 교단에 투신하는 미친 짓은 웬만해선 저지르지 않을 터.
물론 웬만해선, 이다.
사람이 맛이 가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할 건 없다. 속단할 수 없단 뜻이다.
그럼 페리스트 황녀 쪽이 교인일까?
차라리 그쪽이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또 모르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교단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고.
사실 누구나 그럴 거다.
제국민은 물론이고 교단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위대한 가문]이나 [영웅기관 헤로스], [태양교]의 신자들도 교단에 대해선 여전히 대부분 모른다.
그럼 교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누구일까.
“…….”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간만에 열차를 타거나 느긋하게 걷지 않고, 경공을 펼치듯 아카데미 부지를 질주했다.
얼마 안 가서 황색관에 도착했고…….
202호실 앞에 선 다음 문을 두드렸다.
“네?”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곧바로 문이 열렸다.
“어, 루안?”
에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카리스와 같은 방을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마침 이 녀석밖에 없는 것 같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교단과 관련해서 좀 묻고 싶은 게 있어.”
“교단? 갑자기?”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진한 태도였지만,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상관은 없는데… 왜 하필 나한테?”
“암흑 교단의 일이라면 소교주한테 물어봐야지.”
“…….”
에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급진적이지는 않고, 페이지를 넘기듯 느릿한 변화였다.
인간의 낯짝이란 참 신기하다.
이목구비의 미세한 위치나 생김새, 크기로 인상이 천차만별로 바뀌는 점도 그렇지만…….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곤 한다.
에반의 미소는 분명 내가 아는 그대로다.
상쾌하다, 온화하다, 따뜻하다……. 그러한 표현이 어울릴 듯한 햇살 같은 미소란 뜻이다.
그러나 소교주라는 말을 듣고도 실실 웃는 모습은, 내가 알던 에반 헬빈에게선 결코 나올 수 없는 태도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에반이 웃는 낯으로 방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올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