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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50화 (150/172)

150화

에반의 방에 발을 들인 직후였다.

천장 중앙에 새까만 물웅덩이 같은 게 생기더니, 곧 벽면을 타고 검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꼭 붓칠을 하는 듯하다.

좁지 않았던 방은 곧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였는데, 나를 방 안에 들였던 에반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하하하하-.

아련하게 멀리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나는 갑작스런 암전에 뻐근해진 눈을 깜박이며 투덜거렸다.

“날도 좋은데 커튼은 왜 치는 거야. 네가 무슨 어둠의 자식이냐.”

헛소리를 하면서도 주변을 침착하게 둘러봤다.

단순히 벽면에 검은색을 칠한다고 이토록 어두워질 리는 없고……. 에반이 모종의 능력을 사용한 듯하다.

지금 서 있는 공간이 대단히 널찍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내 기감은 좁은 방에 갇히지 않은 채, 사방팔방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나는 암흑 공간을 소리 없이 걸었다.

대략 스무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우측에서 꾸물거리는 어둠이 나를 덮쳐왔다.

쐐애액-!

어렵지 않게 피한 다음 역으로 주먹을 꽂았다. 어둠은 흩뿌려진 먹물처럼 주저앉았지만, 흙탕물을 후려친 것처럼 타격감이 없었다.

그리고 어둠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에반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꼭 동굴 같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싫다면?”

“이곳에 영원히 갇히게 되겠지.”

“그거 무섭네. 물어봐.”

“내가 소교주인 걸 어떻게 알았지?”

“감으로.”

“…….”

“내가 감이 좀 좋은 편이라.”

다시 한번 웃음소리가 들릴 동안, 나는 신수의 힘을 끌어올렸다.

‘…….’

그러나 [뱀의 눈]을 활성화해도 주변의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단순히 어두운 것만이 아니라, 사방의 벽면이 까맣게 칠해진 상태다.

처음에 붓칠을 하는 것 같다고 느꼈던 내 감상은 틀리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밤눈이 좋은 건 의미가 없고, 봐야 할 건 기의 흐름이다.

나는 즉시 두 눈에 화력을 집중해서 화안 상태를 만들었다.

화륵-.

생각해 보니 뱀의 눈과 화안을 병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전개됐고.

예상대로 사방에 휘몰아치고 있는 검은색 기류가 보였다.

혼탁하고 사악한 악기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풀이할 시도조차 못 할 만큼 난해한 진법이었지만…….

‘…….’

둘째 사저의 맹훈련을 받았던 내겐 그리 수준 높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결계의 핵심을 찾았고, 곧장 파훼법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꾸드득-.

주먹을 말아쥐며 진기를 끌어올린다.

내부에서 출렁거리는 내공의 총량은 아직 바다라고 하기엔 한없이 작지만, 그럭저럭 호수라고 할 만한 정도의 크기를 이뤄냈다.

‘이제 쓸 수 있겠는데.’

백일식 초반부의 후반부 초식 말이다.

초반부의 후반부 초식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좀 병신 같기는 한데, 아무튼…….

나는 회귀 이후 백일식 제육초식第六招式까지밖에 쓰지 않았다.

제칠초식第七招式부터 마지막 초식까지, 막대한 내공의 소모는 물론이고 신체 부담도 상당했기 때문에 쓸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괜찮다.

육체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내공 또한 이 정도면 부족한 편은 아니다.

아마 지금 내가 쓰지 못할 초식은 마지막 초식인 제십초식第十招式밖에 없을 거다.

나름 내 필살기라고 할 만한 기술 말이다.

스으으-.

단전에서부터 치솟은 화기가 전신을 감싼 순간, 어둠 너머에 있는 에반이 나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후반부 초식의 최대 단점은 준비하는 데에 다소 시간이 소모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일초一秒 일초一招가 중요한 정면 대결에선 아직 내 뜻대로 펼치기가 어렵다.

파바밧!

어둠 속에서 다수의 손길이 나를 덮쳐왔지만, 내 전신에서 방출되는 강대한 기파에 저절로 튕겨져 나갔다.

나름대로 큰 기술의 단점을 회피하기 위해 머리를 썼다.

힘을 집중하는 시간 동안, 전신으로 화기를 방출하여 염막炎幕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내공 사용이 어마어마해서 여태까지는 쓰지 못한 것이다.

‘지금.’

나는 내공의 집중이 극에 이른 순간 한 발자국 크게 내디뎠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진각이라도 밟은 것처럼 공간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백일식白日式 제칠초식第七招式.

쌍화경雙火勁.

발경發勁의 묘리를 담은 두 주먹이 허공을 후려친다.

꽈아아아앙!

양 주먹이 꽂힌 두 개의 타격 지점.

내부로 전달된 충격은 기파처럼 번지다 이윽고 맞닿는다. 당연히 맞닿은 지점은 구부러지다,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안에서부터 파괴된다.

콰지지지지지직-!

검은색 벽면이 유리창처럼 깨졌고…….

그 너머에 얼빠진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에반이 보였다.

“…이게 뭔-.”

당황한 듯한 에반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에반도 급히 정신을 차리며 검을 뽑는다.

“…….”

그 광경을 본 순간, 나는 의도적으로 공격 속도를 살짝 늦췄다.

까가강!

강기를 휘감은 주먹은 날붙이로 상처 입히기 어렵다. 상대가 검술의 달인이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

심지어 이 방은 그렇게 넓은 편도 아니라, 검술을 마음껏 펼치기에 적합하지도 않다.

에반의 멱살을 붙잡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단 뜻이다.

이 녀석도 급히 내 손목을 움켜잡았지만, 이미 올가미에 잡힌 짐승의 발버둥처럼 의미가 없다.

침대 위로 에반을 내다 꽂는다.

우지끈…….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침대가 주저앉았다.

“쿨럭……!”

에반 또한 거친 숨을 토해냈고.

그사이 이 녀석의 검과 내 칠죄검을 뽑은 다음 목젖 앞에서부터 교차하는 형태로 침대에 꽂았다.

푹!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목이 베일 만큼 아슬아슬하게.

“…푸핫.”

그런데 뜬금없이 이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적지는 않을 텐데 에반은 즐거워 보였다.

아직 남은 수단이 있는 걸까.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내려다봤는데, 딱히 발버둥 치는 기색은 없다.

“…굳이 침대 위로 던져 주다니, 친절도 하셔라.”

“대낮부터 층간소음을 일으킬 수는 없잖아.”

“뭐? 아.”

곧 이 방이 2층이란 걸 깨달은 에반이 자지러지듯 웃었다.

그리고 요사스러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 재밌었다. 이제 죽여도 좋아.”

“…….”

“너, 생각보다 훨씬 재밌는 녀석이었구나. 네 손에 죽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좀 더 발작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싱거운 태도다.

이대로 칼자루를 지그시 누르면 쉽게 목을 벨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는 대신 물었다.

“언제 소교주로 각성한 거야?”

“각성도 알고 있어?”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다치기 싫으면.”

“오. 그 말은 묻는 말에 잘 대답하면 살려 준다는 뜻인가?”

“대답에 따라선 조금 유보해 줄 수도 있지.”

“그럼 질문엔 성실히 대답해 줘야겠는걸?”

에반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각성한 건 어제저녁이야.”

“…어제저녁에 죽었단 건가?”

“맞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지.”

“누구한테, 어떻게 죽었는데.”

이것까지 순순히 대답해 줄 거라 기대하지는 않고 일단 던지고 봤지만.

에반은 의외로 실실 웃는 낯짝으로 대꾸해 줬다.

“교인한테, 방심하다 골로 갔어.”

“교인?”

“뭐, 정확히 말하면 교인이 만든 함정에 죽은 거지만. 충고 하나 하겠는데, 연구 동 쪽은 이미 글렀어.”

나는 킥킥 웃음을 터뜨리는 에반을 보다가, 우선 검 한 자루를 뽑아 줬다.

에반이 살짝 한숨을 흘렸다. 압박감이 조금은 덜어졌다는 태도다.

“다음 질문. 원래 에반은 어떻게 됐지?”

“원래 에반?”

“내가 알던 에반 말이야.”

“아하.”

에반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이미 죽었지.”

나는 에반에게 다가간 다음, 남아 있는 한 자루의 칼을 잡았다.

이대로 내려치면 이 녀석의 무방비한 목은 그대로 베이겠지만.

“…….”

그러지 않고 순순히 검을 뽑았다.

“…뭐야?”

에반이 얼떨떨한 모습으로 목덜미를 만졌다. 꼭 목이 제대로 붙어 있나 확인하는 것 같다.

“죽이려던 거 아니었어?”

“죽일 거였으면 처음에 죽였지. 내가 왜 널 살려 두고 있을까.”

“교단의 정보를 뽑아내려고?”

“그건 겸사겸사고.”

“음……. 글쎄. 모르겠는데.”

“아까 네가 레이븐을 써서 그래.”

에반이 멈칫했다.

“레이븐은 복잡한 검술이야. 어깨너머로 훔쳐본 걸로 곧장 쓰는 건 어려워.”

보통 사람은 위기 상황을 맞이했을 때, 가장 익숙한 움직임을 선보이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에반은 망설임 없이 레이븐으로 대응했다.

의문은 거기서 나왔다.

에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서 네가 알던 에반 헬빈의 모습을 봤으니 당분간 상황을 더 지켜보겠다, 뭐 그런 건가?”

“죽이는 건 쉬워.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이대로 널 없애면 찜찜할 것 같아서 확실히 하려고.”

사실 내가 위화감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물론 소교주로 각성하면서 기존 에반의 기억이나 지식, 경험, 기술을 네가 모조리 흡수한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면 어젯밤의 소란이 말이 안 돼.”

“어젯밤?”

“탈리스를 박살 낸 것 말이야. 네가 그놈을 두드려 팬 건 헬븐 가문이 모욕당했기 때문이었다며? 네가 진짜 소교주라면 가문 따위 어떻게 되든 알 바가 아니었을 텐데.”

“…….”

“이쯤 되면 나도 궁금한데? 너,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인 거냐?”

에반이 픽 웃었다.

“그런 걸 묻다니. 역시 소교주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나 보네.”

“…….”

“좋아. 대답해 줄게. 우선 ‘원래 에반’ 같은 건 없어. 굳이 따지자면, 내가 바로 네가 알던 에반이지.”

이 녀석은 계속 쪼개고 있는 낯짝이라 무슨 말을 하건 가볍게 들렸지만, 이번만큼은 어조가 진지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니 에반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너는 뭐 소교주로 각성하면 기존의 인격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인격이 차지하는 걸로 생각했나 보지? 악령에 씐 것처럼 말이야.”

“그런 거 아니었어?”

“틀렸어.”

“그래도 넌 내가 알던 에반이랑 너무 다른데.”

그러자 에반이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사람은 원래 변해.”

“…틀린 말은 아닌데, 하루 이틀 만에 이렇게까지 변하는 건 이상하잖아.”

“네 관점에선 그렇겠지. 하지만 10년이면 사람이 변하기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갑자기 웬 10년?”

“소교주로서 각성하면 혈통에 새겨진 악의 기억이 되살아나지. 그 기억의 총량은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고, 죽기 직전에 품었던 감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

이 말에 제사장 후안이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 그리고 당신은 그로 하여금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줬군요. 하하! 에반 헬빈은 최고의 소교주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음……’

엿 같은 죽음을 맞이할수록, 그 악의 기억이란 게 많이 일깨워지는 형식인가?

그렇다면 지금 에반이 보이는 모습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간다.

뭐라고 해야 할까.

독기가 빠진 듯 싱거운 모습 말이다.

말하는 걸 보니 이 녀석의 죽음은 다소 갑작스러웠을 테고… 진득하고 축축한 감정을 음미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로 ‘악의 기억’이 적게 깨어났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정신이 덜 오염된 것이라면…….

…물론 속단하기는 이르다.

이 녀석이 주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10년이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다름 아닌 내가 그 산증인이라서 그렇다.

어쨌든 가장 큰 의문은 해소됐지만, 새로운 의문 또한 떠올랐다.

나는 에반을 보며 물었다.

“왜 당장 죽고 싶은 놈처럼 굴었던 거지?”

“…….”

“소교주인 게 들통난 건 내가 허점을 잘 찔렀으니 그렇다 치고, 그 이후의 대응은 형편없었어. 제압당한 다음엔 곧바로 패배를 인정하고, 죽이라고 지껄였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알던 교인은 너보다 훨씬 끈질겼다. 상대와의 격차를 알아도 교의 적이라면 목숨 따윈 도외시하고 달려들었지. 광견병 걸린 개새끼처럼.”

“…….”

에반이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의미 없으니까.”

“무슨 뜻인데.”

나는 말없이 에반을 노려봤고.

그사이 이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창가로 향했다.

“왜 삶에 미련이 없는 듯이 굴었냐고? 간단해. 지금 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거든.”

“뭐?”

“정확히 말하면, 현재 아카데미에 있는 녀석들 전부 다 그렇지.”

에반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충고 하나 해줄까? 지금 당장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운이 좋으면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소린데.”

“무슨 소리긴. 여긴 이미 지옥이란 뜻이지.”

에반이 나를 보며 말했다.

“교단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지. 말투로 봐선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것 같은데, 좀 늦었어.”

에반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 붉게 물든 세상과 여유롭게 흘러가는 강. 아카데미 생도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귓전에 닿았다.

에반은 그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감상하다가 말했다.

“마왕이 이미 강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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