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마왕을 셋이나 만나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다.
당장은 그놈들을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인식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면에선 승산이 아예 없으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마왕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부류가 아니라, 피해야 할 재앙이다.
아직은 그렇다.
즉 내 목적이 의식을 저지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마왕이 소환됐다고.”
“응.”
나는 태연스레 고개를 주억거리는 에반 녀석의 시선을 좇았다.
“아직 일식도 안 일어났는데?”
에반은 여전히 노을이 진 하늘을 보며 대꾸했다.
“하덴아이하르니까.”
나는 멈칫하다가, 곧 하덴아이하르의 이명을 떠올랐다.
“…설마 하덴아이하르의 전조 현상은 일식이 아니라 월식月蝕이라든가?”
“절반은 맞췄네. 물론 그렇다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 거야. 침식이 일어나는 건 이면 세계거든.”
“이면 세계는 또 뭔데.”
“그림자 세계, 호숫물 너머의 세상, 단순하게 꿈속이라고도 불러. 하덴아이하르의 또 다른 이름은 이면의 마왕이거든.”
에반이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
“빛과 어둠, 동전의 양면, 낮과 밤, 해와 달……. 핏빛 달의 마왕은 거짓된 세상의 지배자이기도 해.”
“…….”
이 녀석의 말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당연하지만 하는 말 전부를 믿을 수는 없다.
교인이란 놈들이 얼마나 거짓과 기만을 일삼는지 알고 있어서 그렇다.
하물며 이 녀석은 그놈들의 꼭대기에 서 있는 소교주,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거짓말만 늘어놓을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나 또한 나름대로 상대의 진위를 간파하는 법을 알고 있다.
물론 넷째 사형처럼 생체 반응을 토대로 한 정확한 감별법은 아니고, 굳이 말하면 경험과 약간의 감을 토대로 한 추측이랄까.
대개 인간은 생존이 걸린 상황에선 거짓말을 잘 못 하더라.
안 한다는 게 아니다. 어렵다는 거지.
실제로 목젖에 칼끝이 닿았을 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에반이 지껄인 말은.
‘…진짜 같은데?’
죽기 직전의 사람이 반드시 격렬한 반응만을 보이지는 않는다.
분노나 슬픔, 절망, 공포, 좌절 대신 허무함을 느끼는 이도 있는데, 지금 에반이 딱 그렇다.
딱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지만, 벌써 자포자기한 듯한 느낌?
어쨌든 에반이 소교주로 각성한 건 확실한데, 그런 녀석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여러 가지로 의아하다.
“마왕이 강림했으면 너한테는 좋은 거 아닌가?”
교주란 마왕에게 무조건적인 총애를 받는 존재고.
후안의 말에 따르면 소교주도 그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강림 의식을 주관한 게 나라면 그렇겠지. 난 어젯밤에도 겨우 도망쳤어. 한 번 죽고, 소교주로 각성했는데도 마왕은 날 죽이려 들더라.”
이 사실엔 제법 놀라고 말았다.
교단 내에 있는 파벌, 그리고 파벌 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에반은 소교주가 아닌가.
제사장 후안조차 소교주는 신경 쓰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검은 늪의 마왕은 의식을 주관한 제사장조차 망설임 없이 눌러 죽였지만, 당시 소교주로서 각성하고 있던 에반은 그 죽음의 선고에서 벗어났다.
여러모로 암흑 교단에서 특별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조차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마왕은 이놈을 그냥 죽이려고 했단 말이지.’
물론 이 말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지만.
“알아듣겠어? 적어도 이 사달을 벌인 놈에게 분별력은 없단 거야. 거슬리는 놈은 누구든 죽일 생각이 가득하다고. 소교주건 뭐건 가리지 않고.”
에반이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아마 살짝 머리가 돈 녀석일 테지. 애초에 제정신이라면 하덴아이하르를 소환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
에반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
그러한 위화감은 물론 내가 알던 ‘에반 헬빈’의 모습으로, 녀석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는 데에서 기인하겠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이 녀석, 교단에 충성하는 느낌이 아닌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말로 확신했다.
어쨌든 암흑 교단도 교단이니, 충성심보단 신앙심이라고 하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 텐데.
에반에게선 그러한 기색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교단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해졌나.’
마왕은 이미 강림한 게 맞다.
에반이 꺼낸 말 중 가장 믿기 싫은 말이었지만, 믿기 싫다고 믿지 않는 건 현실 부정밖에 안 된다.
사실 삶이란 때때로 이렇다. 부정하고 싶은 말일수록 진실에 가까운 것.
물론 그렇다고 의문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마왕을 소환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하잖아. 제물과 마나가 가득한 땅, 그리고 경전을 읊을 제사장까지.”
일단 아카데미가 세워진 이 땅……. 강 위의 작은 섬이니 땅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이곳엔 마나가 가득하다.
사실 황혼강 자체가 거대한 마나의 줄기나 다를 바 없다.
이 장소를 제국의 심장, 제도로 임명한 이유도 그 강줄기 때문이라 들었고.
“백번 양보해서 아카데미 어딘가에 제사장은 숨어 있다 쳐. 그런데 제물은?”
마왕의 일부라도 소환하려면 최소 수십, 많게는 수천 명의 제물이 필요하다.
당연히 제도에서, 심지어 아카데미 같은 장소라면 그 정도 인원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나는 큰 조건 없이 마왕을 소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설마 소교주가 또 있다든가.”
“글쎄…….”
에반이 실실 웃었다.
“이래 봬도 교인이라서, 교단에 대해서 낱낱이 다 밝히는 건 좀 그렇고.”
나는 가만히 에반을 보며 말했다.
“네가 지금 패잔병 신세인 건 알고 있냐.”
“물론이지.”
“그런데도 세게 나오는 건 확신이 있어서인가? 루안 배드니커가, 한때의 룸메이트였던 에반 헬빈을 쉽게 못 건들 것 같아서?”
“…….”
일부러 웃으면서 말했지만, 에반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잘했어.”
“뭐가?”
“이번에도 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면 팔 하나는 잘랐을 거야.”
다행히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라 내 말이 진담이란 걸 제대로 이해한 것 같다.
내 위협에 겁을 먹었다기보단, 언행에 조금 신경을 쓰는 선에서 그치긴 했지만.
‘어쨌든…….’
에반 헬빈이 소교주라면, 심문이나 고문으로 정보를 뜯어내는 것도 불가능할 거다.
그것이 교인이다.
기본적으로 고통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고, 교단 이외엔 친지도 없으며, 그 외에도 약점이랄 게 딱히 없는 자들이라 그렇다.
즉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한 유도 심문으로 정보를 뽑아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한 언변은 교인을 다루는 데 전문가인 이단 심문관 정도는 돼야 구사할 수 있다.
지난번 철혈공이 심문했던 에인즈번 같은 놈은 사실 교인도 아닌 셈.
“아무튼, 네 말은 아카데미 안에 있는 놈들은 곧 다 죽는다는 거지?”
“응. 시기상으로는 아마 요번 달 만월쯤이 되지 않을까 싶어.”
두 번째 만월.
세렌이 말한 시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지금 시점에서 에반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가 전부일 터.
그렇다면 슬슬 나도 본론을 꺼내는 게 맞을 거다.
“에반.”
나는 이 녀석을 처음으로 에반이라 불렀다. 나 나름대로는 인정했다고 봐도 좋다.
이 녀석이 소교주로 각성하고, 전보다 훨씬 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여전히 에반이라고.
“응.”
에반이 대답했다.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그 모습만큼은, 내가 알던 에반 헬빈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일?”
“이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마왕을 몰아내기 위해서만 협력하는 건 어때.”
내 말에 에반이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날 보더니,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교인, 그것도 소교주한테 손을 잡자고 말하는 거야? 배드니커의 핏줄이?”
이럴 때마다 배드니커란 이름이 성가시다. 무슨 얘기를 할 때마다 배드니커, 배드니커.
내 의사, 행동과 상관없이 선입견이 박힌 느낌이랄까.
“내가 원래 다른 배드니커랑 좀 달라. 그건 너도 느끼고 있지 않냐.”
“느끼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협력을 말할 줄은 몰랐어. 혹시 너도 교인 아니야?”
“그 농담은 좀 불쾌한데.”
“미안.”
“그리고 내가 배드니커의 이단아라면, 너도 교인 중에선 이단 아니야?”
“나?”
“어떻게 보면 난 지금 너한테 반역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니까.”
내 말에 에반이 픽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마왕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녀석들이랑 좀 달라.”
“다르다니?”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
미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에반이, 다시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네 말을 믿을게. 확실히 일반적인 배드니커라면 내가 교인인 걸 알게 된 순간 바로 머리를 깨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말해 봐.”
“우선 첫째. 내 정체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 것.”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조건이라서 그렇고, 내 쪽에서도 그게 득이다.
당장 이 녀석을 끌어들이면 언젠가 다른 일행, 가령 세렌과 얼굴을 맞대는 순간이 반드시 올 텐데…….
그때 이 녀석의 정체를 밝히는 건 딱히 좋은 발상이라 보기 힘들다.
문자 그대로 괜한 혼란만 가중시키겠지.
“둘째는 이번 작전에선 내 말을 전적으로 믿어 줄 것.”
“뭔 소리야?”
“말 그대로야. 이 임시 협력 관계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아무래도 아직 죽기는 싫거든.”
어깨를 으쓱인 에반이 말을 이었다.
“각성과 동시에 깨어난 악의 기억, 그것들 전부를 생존을 위해 총동원할 건데.”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좋은 일이지. 하지만 교단의 상식은 너희가 아는 것과 많이 동떨어져 있어. 너는 배드니커치고는 융통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내 지시를 아무 의심 없이 따르긴 힘들걸.”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이군. 난 네 생각보다 훨씬 경험이 많고, 유연한 사고를 갖추고 있거든.”
애초에 내가 가진 상식이란 놈은 영산에서 살던 10년이란 시간 동안 거의 박살 났다.
“그렇다고 네 말을 전부 따르는 건 좀 그렇고, 일단 개소리로 치부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 정도면 충분해.”
고개를 끄덕인 에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현재 내가 파악한 바로 가장 의심스러운 용의자는 둘이야. 글렌 스칼렛과 페리스트 스칼렛.”
“황자와 황녀.”
살짝 놀랐다.
아직 아카데미에 오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기까지 추려낼 줄이야.
단순히 머리가 좋은 걸까.
아니면 세렌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을 쓴 걸까.
아무튼 즉흥적이었지만, 에반을 끌어들인 건 좋은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맞아.”
에반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말했다.
“그 둘 중 누가 교인인지 확신하는 건 어려워. 좀 더 확실히 말하면 불가능하겠지. 아까도 말했듯이, 지금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도 않아. 겁박이나 고문, 심문도 별다른 효과가 없을걸. 하덴아이하르의 강림을 주관했다면 십중팔구 정신이 망가졌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묘수를 떠올렸는데.”
“들어 보자.”
“둘 다 죽이는 거야. 내가 황녀를 죽일 테니까 네가 황자를 죽여. 어때?”
에반이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잠깐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무지 저 말에서 숨긴 뜻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개소리야, 시발.”
내 욕설에 에반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곧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아!” 하며 이마를 쳤다.
“알겠어. 그럼 내가 황자를 죽일게. 네가 황녀를 죽여.”
됐지? 하고 쳐다보는 에반을 보며.
나는 이 녀석과는 다른 의미로 이마를 치고 말았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동맹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