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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54화 (154/172)

154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헥토르의 표정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물었다.

“설마 형님, 그놈한테 진짜 가르침을 받던 거였어?”

“그렇다만……. 설마라니?”

“얼굴 꼴이 말이 아니라서 그놈이 화풀이로 형님을 때려 패는 줄 알았지.”

그러자 헥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터 경이 대련에서 다소 거친 편이긴 하지. 그러나 개인적인 시간을 따로 내서까지 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 고작 그 정도로 불평할 수는 없다. 기사의 훈련은 원래 가혹한 법.”

그건 알고 있다.

배드니커의 수련회 커리큘럼도 기사단의 훈련 일정을 참고해서 만든 거니까.

“바터 경은 뛰어난 기사이자 훌륭한 교관이다. 가르침에 있어선 대사범과 필적할 정도다.”

“그 정도야?”

“그래.”

헥토르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상처가 조금 요란하긴 했지만, 흉이 지거나 오래 남는 성질도 아니었다. 내 얼굴을 봐라. 벌써 부기가 다 빠졌잖나.”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럼 그땐 왜 그랬던 건데?”

“그때?”

“얼굴이 퉁퉁 부었을 때 말이야. 잔뜩 의기소침해 있었잖아.”

“그건…….”

살짝 멈칫하던 헥토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괴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바터 경이 실력자라고 해도, 아카데미에 오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대련했는데 옷깃조차 못 스쳤으니까. 내가 하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니, 그날은 바터 경도 조금 손속이 과해졌지. 물론 사과는 받았다.”

“…….”

숨겨진 진실은 재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던데, 이번이 딱 그랬다.

허무함마저 느껴질 정도랄까.

헥토르는 내 얼굴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대련은 너와의 대련이었다. 고위 신관에게 치료받지 않았다면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수련회에 참가했겠지.”

“…음.”

그때 뺨따귀를 좀 많이 때리긴 했지.

반박하기 어려워서, 나는 화제를 바꿨다.

“일단은 알겠어. 어쨌든 버터는 믿을 수 있는 놈이란 거지?”

“바터 경이다. 애초에 아카데미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돈다고 내게 말한 것도 그 사내였다. 가호를 쓰는 것도 봤으니 네가 말한 ‘인형’도 아닐 테지.”

“대체 그놈의 정체는 뭐야?”

“…….”

잠깐 망설이던 헥토르가 말했다.

“너도 [제국특무대]에 대해서는 들어 봤겠지?”

나는 다소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설마 그놈이 특무대였어?”

“그렇다.”

그제야 나는 납득하고 말았다.

제국특무대.

황실 직속 기관이자 특수 조직, 말 그대로 특수하거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예 요원들인데-.

조직 특성상 그 규모나 본거지의 위치, 정확히 어떤 임무를 받는지까지 전부 수수께끼다.

그 때문에 제국특무대를 단순히 허상 속의 조직으로 치부하는 자들도 있지만…….

배드니커라면 제국특무대가 실존하는 조직인 걸 알고 있다.

알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배드니커의 가주- 철혈공의 수많은 신분 중 하나가 제국특무대 소속 요원이라서 그렇다.

‘즉 황실에서도 아카데미의 기류를 조금은 눈치챘다는 건가?’

살짝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이 제국이 답이 없을 만큼 무능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어쨌든 바터가 제국특무대 소속이라면 굿스프링의 갑작스러운 합류도 아귀가 맞는다.

그놈들이 아카데미를 향하고 있었던 이유 말이다.

우리 쪽 책임자는 헥토르였으니, 아마 둘이서 긴밀한 얘기를 나눴겠지.

나는 잠깐 생각한 다음 말했다.

“지금은 안 만날란다.”

“어째서?”

“여기서 인원이 더 늘어나면 체급이 너무 커져. 내 예상보다 더 빨리 감시하는 인원이 붙겠지. 그러니 형님도 일단 나에 대해선 바터에게 말하지 마.”

“네가 말해 준 정보는?”

“공유해도 좋아. 출처는 알아서 핑계대고.”

“음… 알겠다.”

“그리고 형님도 당분간 그 녀석이랑 붙어서 움직여 줘.”

헥토르가 나를 보며 물었다.

“넌 어떡할 거지?”

“따로 영도 녀석들이랑 움직여 보려고. 아. 카론은 형님 쪽으로 붙일게.”

헥토르와 카론 같은 경우는 딱히 내가 뒤를 봐줄 필요가 없다.

이미 제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녀석들이라 그렇다.

“그럼 바터 경과는 계속 따로 움직이려고? 그쪽에서만 알고 있는 정보도 있을 텐데.”

“언제가 되었든 만나긴 할 건데, 시기는 내가 결정하겠어. 그놈은 평소에 어디서 머무는데?”

“수련관의 검술 학부 쪽이다.”

“좋아. 그럼 이틀… 아니지. 사흘 후에 거기로 갈게.”

헥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 * *

이튿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너희 엄마의 나팔 소리]으로 향했다.

“주인장? 이 가게를 일주일쯤 대여하고 싶은데요. 덤으로 댁도 자리를 좀 비워 줬으면 좋겠고.”

“…아침부터 무슨 개소립니까? 장사는 그렇다 치고, 일주일 동안 대체 어디서 지내-.”

“100골드 드리죠.”

“…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하. 마음껏 쓰시지요. 심심하면 가구도 다 깨부숴도 좋습니다.”

나는 주인장에게서 가게를 매수한 다음, 이곳을 임시 아지트로 삼기로 했다.

내 예상이지만, 이 아카데미에서 그나마 감시나 관리가 가장 허술한 곳이 상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가게는 상당히 구석진 곳에 있었으니, 몰래 얘기를 나누기엔 안성맞춤이다.

그런 다음 부른 건 세렌이다.

아침 일찍 모습을 드러낸 세렌은 맞은편에 앉아 내 얘기를 듣더니, 완전히 얼빠진 낯짝이 됐다.

“진짜야?”

“그래.”

“…….”

세렌은 말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눈썹이 좁혀졌다 펴졌다 하고, 머리카락을 꼬거나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섯 배는 나쁜 상황인데.”

“그러냐.”

주관적인 기준이라 이 녀석이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아카데미의 상태를 좀 더 파악해야겠어.”

“어떻게?”

“마침 오늘 오후에 [마나 기초학] 수업이 있더라. 아카데미에서 가장 인기 많은 강의라서, 수업받는 생도가 102명이나 돼.”

“오.”

확실히 인기 과목이라 할 만하다.

말이 102명이지, 거의 아카데미 재학생 10분의 1이 수업을 듣는다는 뜻이니까.

“네가 말한 방식으로 100명 중 몇 명이나 인형인지 알아볼 거야.”

“어떻게? 한 명 한 명 다 확인하려면 날밤 새울 텐데.”

“내 가호로 살짝 강의실 내부 온도를 내리려고. 입김이 나올 만큼. 2월이긴 해도 아직 좀 쌀쌀하니까, 그렇게 이상하진 않을 거야.”

“아.”

나는 납득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괜찮네. 그럼 수업 끝나고 저녁쯤에 여기서 다시 보자. 미르랑 샤를, 팜은 네가 좀 데리고 와라.”

“알았어.”

나도 가게를 나선 다음 정류장으로 향했다. 수업은 없지만, 별개로 들를 곳이 있어서다.

사실 내겐 두 명의 조력자가 있다.

그것도 아직 개화하지 못한 영도보다 훨씬 더 강하고,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러운 녀석들이 말이다.

케이안과 아르잔.

그 녀석들에게도 상황을 공유할 생각이다.

전력 증강은 물론이고, 둘 다 꼬리가 밟힐 만큼 어설프게 움직이지도 않을 거다.

감시나 정보 수집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

게다가 실제 재학생보단 사용인의 감시가 좀 더 느슨할 테니, 상황을 봐서 아카데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청색관에 머무른다고 했지.’

좌석에 앉은 채로 아카데미 지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문득 내 맞은편에 누군가 앉았다.

“안녕.”

어설픈 목소리와 어색한 표정.

글렌 스칼렛이다.

나는 데자뷔를 느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으, 응. 혹시 수업에 가?”

“아니.”

“그렇구나…….”

글렌이 입을 닫으며 내 눈치를 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쉽게 입을 열기 어려워하는 기색이다.

그때 다시 한 무리의 생도들이 탑승했다.

나는 자연스레 그들에게 시선을 향하다가, 문득 그들이 인형인지 아닌지 확인했다.

“…….”

헛웃음이 나왔다.

탑승한 스무 명 중 세 명이 인형이었다.

“론 교수님 과제 봤어? 진짜 악질이라니까. 그러니까 머리가 빠지지…….”

“헉, 론 교수님! 안녕하세요!”

“……!?”

“뻥이지롱.”

“너어……!”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 생도의 모습이 보인다.

중간에서 놀림당하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

성질을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친구의 어깨를 약하게 친다.

인간적인 반응이고, 자연스러운 표정이다.

하지만 저 갈색 머리의 소녀는 인형이다.

주변 친구는 물론, 그 자신도 스스로가 인형인 사실을 모르겠지만, 그게 진실이다.

“하…….”

어쩐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짓밟힌 듯한 느낌이다.

나 같은 놈이 하기엔 너무 거창한 생각일까.

“저기, 루안.”

그때 글렌이 다시 나를 불렀다.

살짝 시선만 돌리자, 이 녀석이 내게 말했다.

“그, 따로 볼일 없고, 아침도 안 먹었으면, 나랑 상가에 가지 않을래?”

“상가?”

“응……. 맛있는 음식집을 알거든…….”

글렌은 그 말을 하고 커다란 모자에 숨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르잔과 케이안은 반드시 지금 안 만나도 된다.

우선은 글렌의 목적이 더 궁금했다.

“저, 정말? 고마워!”

글렌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확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잠시 후 열차는 상가에 도착했다.

글렌은 다소 들뜬 기색으로 열차에서 내리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

“좋아하는 음식 있어?”

“맛만 있으면 뭐든 잘 먹어.”

“그래? 입맛에 맞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글렌이 자주 가는 집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먼저 앞서가는 글렌의 뒤를 잠자코 따랐다.

의외로 상가엔 자주 들르는 걸까?

이 녀석은 익숙한 듯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어쩐지 걸음이 점점 음침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너희 엄마의 나팔 소리]가 있는 그 뒷골목 근처 말이다.

설마 이 녀석이 가는 가게가 내가 대여한 아지트는 아니겠지?

살짝 불안감을 느끼며 따라가는데, 다행히 글렌의 발걸음은 내 아지트를 지나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여기야.”

“…음.”

그리고 도착한 가게 간판엔 [죽여주게 맛있는 토마토]라고 적혀 있었다.

‘뒷골목 가게의 작명은 다 남부식인가.’

나는 의아해하며 글렌을 따라서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 내부는 한적했고, 조금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있었다.

주인일까?

옷차림을 보니 그런 것 같은데 30대가 넘어 보이지는 않았다. 주인치고는 너무 젊단 뜻이다.

게다가 슬쩍 보이는 근육을 보니 상당한 실력자다.

“혹시 술은 좋아해?”

“최근엔 자주 마셔.”

“여기……! 토마토 맥주 두 잔이랑 토마토 스튜, 토마토 샐러드 주세요!”

“…….”

가게 이름값 제대로 하는군.

아무튼 음식보다 토마토 맥주란 게 먼저 나왔다.

색도 살짝 붉었는데, 한 모금 마시니 제법 그 풍미가 괜찮았다.

“맛있어?”

“사실 토마토 냄새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맛있네.”

“다행이다…….”

글렌이 씩 웃더니 토마토 맥주를 한 번에 모조리 들이켰다. 의외로 술고래인 모양이다.

그때 다시 나타난 주인이 음식과 함께 새 맥주잔을 내려놨다.

“오늘은 다섯 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말투를 보니 단골인 모양이다.

글렌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잘 마시네.”

“응……. 술은 좋아. 다 잊게 해주거든…….”

그리고 잠깐 대화가 끊겼다.

글렌은 술을 정말 잘 마셨다.

내가 첫 번째 맥주잔을 절반 정도 마셨을 때, 이 녀석의 앞엔 벌써 빈 맥주잔이 넉 잔이나 됐다.

그 얼굴이 조금 불그스름해질 때쯤, 이 녀석이 말했다.

“…나는 황실이 싫어.”

평범한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실수록 눈이 풀리고 발음이 부정확해지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그 반대였다.

평소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또렷해졌고, 혈색이 좀 붉은 걸 빼면 표정도 평소보다 훨씬 빠릿빠릿한 느낌이다.

“그런데 내가 황실만큼이나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글렌이 웃으며 자문자답했다.

“굿스프링과 배드니커의 핏줄.”

“…….”

“황가의 가장 충실한 개새끼들.”

그 순간 술집 내부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문과 뒷문에서 열 명 정도의 아카데미 생도들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우리 테이블을 포위하듯 둘러싼 것이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너, 오랜만이구나.”

아는 얼굴 중 하나는 탈리스였다.

콧잔등에 커다란 반창고, 에반에게 당했던 상처를 완전히 회복 못 한 것 같다.

“루안 배드니커.”

글렌이 말했다.

“슬슬, 네가 거슬려.”

내가 성을 숨기고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실은 바빠서 밝히지 못한 거긴 하지만, 그런 핑계를 대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 같다.

힐끗 주변을 봤다.

탈리스와 그 친구 놈들, 아마도 상급생으로 보이는 아카데미 생도.

죄다 몸을 쓰는 학부 소속일까? 옷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단련된 몸뚱이가 보인다.

“음.”

뜻밖의 상황이지만, 놀랍지는 않고 딱히 감흥도 없다.

글렌의 본색인지, 술에 취해서 맛이 간 건지, 하여간 지금 모습도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하긴. 바로 어젯밤에 학장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보다 더 충격받으려면 글렌의 정체가 마왕쯤은 돼야겠지.

물론 그럴 일은 없어서 픽 웃음이 나왔다.

“아직 웃음이 나오나 보군.”

내 태도가 거슬렸던 건지, 탈리스가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지금 네놈은-.”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탈리스의 목소리가 끊겼다.

내가 이놈의 얼굴을 테이블 위에 처박았기 때문이다.

“……!”

주변이 살짝 술렁거리는 사이, 나는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만 하면…….’

오늘, 글렌 스칼렛의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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