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아무튼 생각보다 밤이 늦어졌으므로 간략하게 정보만 교환한 다음 영도 놈들을 돌려보냈다.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아마 오늘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겠지만, 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이 좀 정리되어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딱히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없는 녀석들은 아지트에 남았다는 뜻이다.
슬슬 심야에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
희미한 조명 아래, 세렌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좀 중요한 얘기를 할 건데…….”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린 세렌의 시선이 에반에게 닿았다.
무슨 의미로 쳐다보는지 알겠다.
나는 에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믿을 만한 녀석이야. 애초에 인형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에반 덕분이니까.”
결정적인 정보를 준 건 레오네였지만.
아무튼 마왕 강림을 알려 주고, 내게 경각심을 일깨워 준 건 에반이 맞으니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물론 세렌 입장에선 떨떠름할 거다.
에반과 얘기를 나눠 본 적도 몇 번 없을 테니, 이 녀석이 믿을 만한 놈인지 알 수가 없겠지.
“혹시 황녀에 관한 얘기야?”
“맞아.”
“에반도 황족이 의심스러운 건 알고 있었어. 내가 말하기 전부터.”
그러자 세렌의 시선이 에반을 향했다.
‘정말이냐?’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에반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런 천연덕스러운 반응을 볼 때면 아직도 저놈이 소교주로 각성한 것 같지가 않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세렌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저번에 말했었지? 해가 지면 황녀는 연구 동에만 틀어박혀 있는다고.”
“그랬지.”
“그런데 연구 동의 건물을 다 뒤졌는데도 황녀가 쓰는 방은 없더라.”
깜박…….
묘한 타이밍에 전등이 점멸했다.
가게 내부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살짝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혹시 몰라서 교무실에 있는 장부까지 확인했어. 황녀가 대실한 건 연구 동 12호의 104호라고 적혀 있던데, 직접 가보니 오래 방치된 방이었지.”
내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설마 밤에 간 건 아니지?”
“아니. 낮이었어.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괴담은 좀 신경이 쓰였거든.”
과한 조심성이 목숨을 건진 셈인가. 어쩌면 저것도 영웅에게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세렌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방 안엔 꺼림칙한 인형이나 오컬트 용품이 가득했고, 벽면엔 이상한 문양이나 문자까지 쓰여 있더라. 최소 몇 달은 방치된 것 같았고.”
“문양이랑 문자?”
“일단은 메모해 왔는데.”
역시 철두철미하구만.
나는 세렌이 내민 쪽지를 받은 다음 펼쳐 봤다.
“…음.”
문양은 물론이고, 문자도 뭔지 모르겠다.
‘보석 산맥에서 봤던 암호문이랑은 또 느낌이 다른데.’
슬쩍 에반한테도 보여 줬지만, 이 녀석은 특유의 난처한 미소를 돌려줬다.
진짜 모르는 건지, 세렌 앞이라 내숭을 떠는 건지 당장은 모르겠다.
좀 이따 둘이 있을 때 물어봐야지.
“그럼 황녀는 오밤중에 대체 어디서 머물던 거야?”
“어제는 수업이 없는 날이라 하루 종일 황녀를 미행했는데.”
“했는데?”
“도중에 놓쳤어.”
“…….”
이쯤에선 나도 살짝 두 눈가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재차 말했듯 세렌의 실력은 이미 영도 수준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런 녀석이 미행 대상의 행적을 놓쳤다면 본인의 부주의나 실수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해 질 녘쯤 연구 동으로 갔는데 12호 건물에 발을 들이자마자 꺼진 듯이 사라지더라.”
“그리고?”
“혹시 몰라서 건물 내부도 확인했는데 교수밖에 없었어.”
“음…….”
“이상하게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찝찝해져서 도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황녀는 그날 하루 동안 쭉 안 보이다 다음 날 수업에 평소처럼 출석했지.”
“황녀가 인형은 아니었지?”
“그래. 숨 쉬는 건 이미 확인했어.”
“그렇다면 거의 확정 난 것 같은데. 황녀가 교인인 걸로.”
나는 그리 말하며, 오전에 글렌과 있었던 일을 간추려서 말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세렌도 납득했다.
“글렌 스칼렛의 거동도 수상한 편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 아카데미 내부에 나름대로 자신만의 파벌을 모은 거였나. 이쪽 일이랑은 별 관계가 없네.”
나는 잠깐 생각한 다음 쪽지를 들며 말했다.
“이건 내가 챙겨도 돼?”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일단은.”
세렌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 *
세렌도 기숙사로 돌아가고, 이제 아지트엔 나와 에반 둘만 남은 상태.
이 녀석과 나눌 얘기가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반 놈은 출출하다면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하냐.”
“루안! 이것 봐!”
그리고 에반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무언가를 갖고 나왔다.
“그건…….”
“쿠키야. 주방 구석에 숨겨 놨더라.”
“…….”
“이 상표 보이지? [드 말린 다과점] 거 같은데. 완제품을 사려면 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 한다고 들었어.”
나는 넣어 두라는 말을 하려다 그냥 관뒀다.
쿠키는 분명 고급 기호품이지만, 나는 가게를 빌리기 위해 백 골드나 지불한 거물 손님이시다.
꿍쳐 놨던 쿠키 좀 먹었다고 따지고 들지는 않겠지.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쿠키를 까먹었다.
와그작-.
“맛은 있네.”
“그러게.”
그러고 보니 이런 과자를 먹는 게 얼마 만일까.
나는 바삭하고 달콤한 쿠키를 몇 개 정도 집어 먹으며, 세렌에게 받은 쪽지를 에반에게 보여 줬다.
“이거 본 적 있어?”
“있지.”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악마어야. 문양은 아마도 흑마법 마법진인 것 같고.”
“해석할 수 있어?”
“아니.”
“소교주라면서 그것도 못 하냐.”
에반은 내 힐난에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악마어의 가짓수가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악의 경전을 다루는 제사장조차 해석하는 게 아니야. 달달 외운 걸 읊는 것뿐이지. 악마어에 완벽히 통달한 건 흑교주밖에 없어.”
“음…….”
“그래도 마법진이랑 긴밀하게 연관된 것 같은 형태니까, 만약 문양을 해석할 수 있으면 좀 감이 잡힐 것 같긴 한데…….”
에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흑마법 쪽은 훨씬 더 젬병이라.”
“…….”
그러나 나는 이 녀석의 말에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흑마법이라…….
“뭔가 떠오른 거야?”
“일단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반 정도 남은 쿠키 주머니를 뺏었다.
“그만 좀 처먹어라.”
“하, 하나만 더…….”
“안 돼.”
주인장 울겠다, 이 자식아.
아쉬운 표정을 짓는 에반을 한심하게 쳐다본다.
가게에 숨겨 뒀다간 또 훔쳐 먹을 것 같아서 일단 내가 갖고 있기로 했다. 나중에 이놈이 못 찾을 만한 곳에 숨겨야겠다.
이후 에반에겐 오늘 아지트에서 머물라고 말했다.
내일 새벽녘쯤 함께 연구동 12호 104호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문자와 문양에 대한 건 메모로 확인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가면 세렌이 놓친 걸 볼 수도 있을 테니.
이곳은 여관을 겸한 가게는 아니었지만, 주방 안쪽엔 간이침대가 놓인 휴식 공간이 갖춰져 있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두 명 정도는 잘 수 있을 정도.
물론 나는 당장 잠들 생각이 없었다.
살짝 앉은 채 생각을 정리하다가, 에반이 잠든 걸 확인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향한 곳은 식자재 창고다.
음식점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니만큼, 내가 찾던 게 분명히 있을 거다.
“역시나.”
문에 있는 열쇠 구멍.
나는 슬쩍 웃으며, 주머니에서 유난히 서늘한 감촉의 열쇠를 하나 꺼냈다.
주인장한테 받은 창고 열쇠는 아니었지만.
철컥-.
열쇠는 제집에 들어온 것처럼 쉽게 구멍과 맞물렸고…….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열린다.
“…….”
그 너머로 펼쳐진 광경은 창고 내부가 아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
뭉친 암흑이나 새까만 진흙, 혹은 밤바다의 수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찝찝함을 느꼈지만 별수 없이 발을 뻗었다. 곧 무형의 기운이 전신을 감싸는 듯한 신기한 감각이 느껴진다.
찰박-.
발목까지 찬 물웅덩이와 그 수면 위를 표류물처럼 떠다니는 젖지 않는 책.
그 공간의 중간쯤엔 산처럼 쌓인 책이 있었고…….
그 위에 걸터앉은 꼬맹이의 모습도 보인다.
“안녕하세요.”
“…….”
배드니커 지하 도서관의 사서.
리세라디고스 올 하이무드가 나를 보았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어쩐지 묘한 압박감이 느껴져서, 나는 멋쩍게 한마디 더 내뱉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
리세는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예 무시당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은 무슨. 얼마 전에 보았지 않느냐.”
“벌써 보름은 지난 것 같은데요.”
“찰나구나.”
리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만이 아른거리는 지하 공간은 확실히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어려운 장소였다.
게다가 리세라디고스는 겉모습과 달리 최소 수백 년 이상을 산 노괴, 보름이란 시간을 찰나로 느낄 법도 하겠다 싶었다.
“…….”
문득 리세가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지금 태도에서 묘하게 포기하고, 타협한 듯한 기색이 느껴져서 그렇다.
“너, 쿠세트의 말예야. 내게 볼일이라도 있느냐.”
남 걱정할 때가 아니긴 하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리세 님에게 자문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문?”
“마법에 관한 것입니다.”
“무슨 마법.”
“전에 한번 말씀하셨지요. 리세 님은 저주나 악마 계약, 사령술에도 견문이 있으시다고요.”
리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혹시 흑마법과 악마어에 대해서도 아실까 싶어서요.”
탁, 리세가 책을 덮으며 나를 보았다.
치렁치렁한 앞머리 너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듯했다.
“배드니커의 핏줄이 흑마법과 악마어에 대한 자문을 구하러 왔다라……”
건조한 목소리에 희미한 흥미가 아른거린다.
“재밌군. 말해 봐라.”
“이것입니다.”
나는 즉시 품에서 쪽지를 꺼냈다.
리세는 손을 뻗거나 걸어오지 않았다. 길게 뻗은 머리카락 한 뭉텅이가 새까만 뱀으로 변하더니, 쪽지를 입으로 물어 가져갔다.
리세는 손에 들린 쪽지를 펼쳤다.
요사스러운 자색 눈동자가 내용물을 빠르게 훑었다.
“흐응…….”
즐거운 듯한 콧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는 대놓고 미소를 지은 리세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일곱 번째 악마어와 하덴아이하르의 흑마법, 이면 세계의 형성 및 법칙의 정립에 관한 것인가. 꽤 재밌는데…….”
“…….”
한눈에 이해한 건가?
살짝 감탄하고 말았다.
비록 어린 꼬맹이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역시 리세라디고스는 칠색의 대마법사에게도 밀리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렇군. 이 악마어의 해석, 그리고 흑마법의 작용 방향이 궁금한 것이렷다.”
“그렇습니다. 가능하십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하나…….”
리세가 어쩐지 불길한 느낌으로 쭉 입가를 찢더니 말했다.
“뛰어난 마법사의 자문이란 천금 이상의 가치가 있지. 어린 배드니커야, 설마 이 리세라디고스 올 하이무드의 귀중한 조언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떻게 불쌍한 조수를 한번 도와주는 셈 치시고 안 될까요?”
전에 정립한 관계를 들먹이며 정에 호소했지만, 리세는 괴이한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마법사란다. 거래에 있어선 가족에게나, 원수에게나 같은 잣대를 내밀지.”
“…음.”
사실 이럴 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어떻습니까?”
리세가 내가 꺼낸 물건을 보더니 슬쩍 웃었다.
“린찰족의 가면인가? 변이의 술식이 새겨진 것 같고. 제법 희귀한 물건인 듯하지만, 내겐 쓸모가 없다.”
“그럼 이건…….”
“영옥이로군. 흠 하나 없는 원석이면 그럭저럭 재료로 굴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제법 소모했구나. 필요 없다.”
“이건 어떻습니까?”
“뱀 비늘로 만든 벨트. 잘 쓰면 채찍처럼 휘두를 수도 있겠지만, 글쎄…….”
“…아니면 제가 돈이 좀 많은-.”
“너, 갖고 있잖느냐.”
리세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낡아빠진 가면이나 정령이 남기고 간 배설물, 동물 사체로 만든 허리띠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을.”
리세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인 순간, 나는 침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설마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어린 배드니커야.”
쉬이익…….
뱀의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리세의 머리카락- 뭉쳐 만든 칠흑의 뱀이 물 위를 유영하며 다가오더니 내 허벅지를 타고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 지하 도서관은 나의 세상이지.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네가 가진 모든 걸 파악했단 뜻이니라.”
…우라질.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거군.
대마법사 올더슨의 컬렉션 중 으뜸가는 보물이자, 아마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큰 가치를 가진 물건.
성유물 [아몬의 가위]의 존재를 말이다.
스으으…….
전신을 기는 뱀의 감촉에 소름이 끼친다.
이게 정말 머리카락으로 만든 걸까. 파충류 특유의 서늘한 비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다.
-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어떤 의미로는 제사장보다 위험한 녀석이니까.
리세에 대해 경고하던 아사드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어떻게 입을 잘 털어서 조수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리세를 아군으로 여기면 안 된다.
나는 잠깐 대가를 저울질했지만,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아몬의 가위]가 세상에 몇 없는 보물이라고 해도, 마왕 강림으로 일어날 재앙을 방치하면서까지 갖고 있을 가치는 없다.
망설임을 덜어낸 내가 아몬의 가위를 떠내려는 순간, 유난히 작은 뱀 하나가 내 주머니에 파고들었다.
“크크크…….”
그리고 리세라디고스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멋대로 가져갔다.
먹다 남은 쿠키 주머니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