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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57화 (157/172)

157화

“지난 수백 년간 지난하기 짝이 없던 마도학과 달리 다과 업계는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했구나. 이 바삭함과 촉촉함의 공존을 보라. 이는 상반된 원소를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난해한 일이며, 찬란한 성과다. 거기에 뜨문뜨문 느껴지는 이 재밌는 식감은… 그렇군. 땅콩인가. 달콤함 속에 한 줌의 고소함을 숨겨 두었어. 이 쿠키를 만든 제과사는 대단히 뛰어난 영감과 역량의 소유자가 분명하다.”

“…….”

게 눈 감추듯 쿠키를 먹어 치운 리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며 내뱉었다.

“…다음에 또 갖고 오겠습니다.”

“당분은 마법사의 절친한 친구이며,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지.”

“…….”

나는 차마 먹다 남은 쿠키라는 말은 하지 못한 채 화제를 바꿨다.

“그럼 이제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그 전에 상황부터 정확히 설명해 보아라. 너는 이 악마어와 마법진을 어디서 보았지?”

“카르텔 아카데미입니다.”

리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카르텔 아카데미? 그건 분명히 제도에 있는 교육 기관일 텐데.”

“맞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나는 카르텔 아카데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을 최대한 요약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리세가 흥미로운 기색을 띠었다.

“지난 세월 동안 제국의 위세가 많이 바래진 건 분명하구나. 제도 한복판에서 마왕이 강림하다니. 뭐 온전한 형태의 강림은 아니고, 이면 세계의 지배자인 하덴아이하르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

“그대로 아카데미가 통째로 마의 소굴이 되는 것도 재밌을 듯하군. 아하하. 자못 유쾌한 일이로다.”

말하는 꼴을 보니 리세를 통해 본가에 도움을 청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일단 리세 님과 만나기 위해 전에 주신 마도구를 썼는데, 혹시 학장의 인형이 눈치챌까 걱정이네요.”

내 말에 리세가 픽 웃었다.

“인형이라고 해서 완벽한 모방은 불가능하지. 원본의 수준이 높을수록 재현이 어렵고, 부분적인 기억의 누락 또한 겪을 것이다. 아마 대마법사의 인형이라면 본래 힘의 절반도 내지 못할 테지.”

“아하…….”

만능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허점이 많다.

실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별다른 페널티도 없이 그만한 인형을 쑥쑥 뽑아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물론 만전의 대마법사라고 해도 이 리세라디고스의 마도구를 꿰뚫지는 못할 터이니, 너는 과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이렇게까지 장담하니 좀 든든하긴 하다.

성격이 조금만 더 둥글었다면 최고의 조력자였을 텐데.

뭐, 사람이 다 잘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 것 같긴 하군. 그렇다면 네 목적은 이면 세계로 직접 진입한 다음,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이렷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뭐, 좋다. 그렇다면 몇 가지 알려 줄 수는 있을 것 같구나.”

큭큭 웃은 리세가 말을 이었다.

“네가 보여 준 마법진이 의미하는 건 이면 세계의 형성과 유지, 그리고 새로운 법칙의 강제였다. 따라서 하덴아이하르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 반드시 규칙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영원히 갇히게 될 것이다. 핏빛 달의 세상에 육신이 묶이고, 마왕의 손아귀에서 영혼은 영겁을 희롱당하겠지. 죽음조차 해방이 될 순 없으리라.”

그 말을 들은 순간 알렉이 떠올랐다.

영산으로 떠났던 탐험대의 죽음을 염원하던 목소리 말이다.

‘죽음조차 해방이 될 수 없다.’

녹색 혀의 마왕 탕타타.

그놈이 후안의 머리통을 공처럼 갖고 놀던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당시엔 후안에게 악감정밖에 없는 나도 통쾌함보다 측은함이 들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때 죽은 건 후안에게 있어 차라리 축복이 아니었을까.

리세가 쪽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악마어로 적힌 건 이면 세계에서의 규칙인 듯하군.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잘 외워 두거라.”

단것을 먹어서 기분이 좋아진 걸까.

리세가 흥얼거리는 듯한 어조로 설명했다.

“첫째. 인형에게 잡히면 끝이다. 둘째. 제한된 지역을 벗어나선 안 된다. 승리 조건은 의식의 주관자를 찾고,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 시간제한은 만월이 되기 전까지. 흐음. 규칙은 생각보다 간단하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의식의 주관자를 쓰러뜨리는 게 승리 조건이라면 굳이 이면 세계로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바깥에서 주관자를 죽이는 건 큰 의미가 없다. 마왕의 힘은 더 불어나지 않겠지만, 강림한 마왕이 사라지지는 않겠지. 오히려 알 수 없는 이유로 폭주할 가능성도 있다.”

“…….”

에반이 한 말과 같다.

적어도 그 녀석이 마왕 토벌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일단 아카데미에선 그놈의 배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그래도 완전히 신뢰하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리세가 말했다.

“하나 조언해 주마.”

“뭡니까?”

“도망쳐라.”

픽 웃은 리세가 말을 이었다.

“규칙을 이해한 자들 모두가 처음엔 희망을 품는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뇌처럼 되뇌지. 그 또한 마왕의 여흥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단 것도 모른 채. 깊게 파고들수록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애초에 하덴아이하르의 놀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구조란 것을.”

리세가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물론 인형이라고 해도 대마법사의 분신, 쉽게 속이고 도망칠 수는 없을 테지만……. 나 리세라디고스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다.”

비슷한 제안을 받은 기억이 났다.

분명 첫 번째 수련회에서, 아사드와 만났을 때였나.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때와 상황이 좀 비슷하다.

달라진 건 검은 늪의 마왕이 아닌 핏빛 달의 마왕이라는 것과.

제안하는 자가 아사드에서 리세로 변한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그때처럼 무턱대고 거절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아카데미를 나선 다음,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으니까.

‘가령 철혈공이라도 부를 수 있다면?’

물론 철혈공은 대륙에서 가장 바쁜 사내이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마왕에 관한 일이다.

웬만하면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습니까?”

“어렵지 않다. 마왕이 진정으로 강림하기까지 앞으로 엿새, 그때까지 이곳에 숨어 있어라.”

예상 밖의 대답에 살짝 머리가 둔해졌다.

“…그게 무슨.”

“마왕이 강림한 순간, 이면 세계에 잡힌 자들은 모두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아카데미의 인간도 최소 절반은 그렇게 되겠지. 운 좋게 살아남은 이에겐 악의 씨앗이 심어질 것이고.”

“악의 씨앗이 뭡니까?”

“언제든 반드시 싹트는 어둠의 본능이랄까……. 그것이 개화하면 사랑했던 이의 목을 조르고, 소중히 여겼던 보물을 이유 없이 부수며, 부모와 자식에겐 마르지 않는 증오를 품게 될 터.”

“…….”

“이곳에 머물면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후로는 아카데미를 떠나서 황실 기사단이나 다른 대마법사, 혹은 델락에게 뒤처리를 맡기면 되겠지. 마왕과 관련된 일이라면 대륙 반대편에서라도 달려올 놈이니.”

마지막 말만큼은 내 생각과 비슷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리세는 대꾸가 없는 나를 의아한 듯 들여다봤다.

“이미 아카데미의 이백 명 이상이 인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했지.”

“저는 그들이 이미 마왕의 제물로서 희생됐다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들으니 아닌 것 같은데요.”

리세가 웃었다.

“인형으로 대체된 이들은 여전히 이면 세계에 갇혀 있을 것이다. 덧없는 희망에 매달린 채,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핏빛 달 아래서 떠오르지 않을 태양을 갈망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아직 구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들을 구하고 싶나?”

“구할 수 있다면 구하는 게 좋죠.”

리세가 김새는 듯한 콧소리를 냈다.

“어떻게? 승산 없는 마왕의 놀이에 발을 들여서? 너는 제 발로 지옥에 입장하는 멍청이인가.”

“…….”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자들이다. 이미 폭풍에 휩쓸린 자를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걸 선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지능의 문제고, 구조가 아닌 동반 자살일 뿐이지.”

리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 순간, 요사스러운 자색 눈동자에선 평소의 사악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별빛을 흩뿌린 듯한 탐구심만이 가득했다.

“하나 루안 배드니커, 이 모든 질타에 앞서 묻고 싶구나.”

리세는 겪은 적 없던 미지를 대하듯 나를 보며 물었다.

“너는 선량한가?”

* * *

리세를 뒤로한 채 지하 도서관을 떠났다.

제안을 거절한 건 아니었다.

어쩐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심적으로 싱숭생숭해졌고……. 나는 이러한 상태가 될 때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했다.

조용한 곳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 보면서 말이다.

다행히 식자재 창고는 조용했고, 달빛이 내려앉은 창문은 고적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는 상자 위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카르텔 아카데미.

내게 있어 이 장소는 지식의 배움터가 아닌, 사방이 안개로 가득한 복마전이었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느껴졌던 위화감, 세렌 굿스프링, 두 명의 황족, 알렉 교수, 괴담, 영산, 마왕, 소교주 에반,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거대한 음모, 인형이었던 올더슨 학장-.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그 흐름에 휩쓸려 있었다.

방향조차 모른 채로 이리저리 헤맸다. 무력감보다 혼란함이 더 크게 다가왔던 나날.

그리고 마침내 그 안개가 걷혔지만… 형체를 드러낸 괴물을 보니 실소가 나왔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는데, 딱 그 꼴이랄까.

차라리 몰랐다면.

무고한 이백 명의 생도가 아직 살아 있고, 이면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비열한 생각.’

나는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 너는 선량한가?

그러니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다.

리세라디고스는 나란 놈의 본질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선량하고 속 깊은 사람이 얼마나 많나. 예를 들면 생면부지의 영도들을 구하기 위해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뛰어든 세렌 굿스프링이 그렇다.

나는 세렌과 다르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못된 놈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비교적 양심적인 놈.’

그것이 내 자평이다.

스릉-.

칠죄검을 뽑았다.

특유의 투박한 검면은 나를 비추기는커녕 달빛조차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나는 어쩐지 이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신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부 들으셨겠지요.”

[그러하네.]

“제가 무모한 선택을 하는 것일까요?”

[부정하기는 어렵군.]

무신의 고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할 걸세. 도망친다고 욕할 이도 없을 것이고, 사실 연자의 나이라면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맞아.]

“…….”

[하지만 그러기 싫은 게 아닌가.]

무신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 싫은 건 하지 말아야지.]

아마 이건 위로도, 격려도 아닐 테지만.

나는 무신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무신이 웃으며 말했다.

[달이 저물지 않는 세상은, 달리 말하면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세상일 것이네. 그 가련하고도 연약한 아이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얼마나 많은 밤을 두려움으로 지새웠을까.]

“…….”

[이젠 누구도 일출을 기대하지 않을지도 모르네. 햇볕이 살갗에 닿는 감각 또한 잊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생각하네, 그런 세상일수록 더욱 새벽은 와야 한다고. 반드시 태양이 떠오른다는 걸 증명해 줘야 한다고.]

“…….”

[가세나, 연자여.]

무신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그대가 지옥 길을 걷더라도, 내가 함께할 테니.]

창고를 나서기 직전이었다.

때마침 창문에선 어슴푸레한 빛줄기가 쏟아졌다.

나는 방을 나서기 직전,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신 빛에 두 눈을 깜박거리며 적응했다.

일출日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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