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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58화 (158/172)

158화

나는 즉시 에반에게 간 다음, 퍼질러 자던 놈의 뺨을 때리며 깨웠다.

“에반, 해 떴다. 슬슬 일어나라.”

“끄으응…….”

에반이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뜨더니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좋은 아침. 일찍 일어났네.”

“…뭐.”

사실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오히려 푹 잤을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랄까.

“정신 좀 차리고, 사람들 깨기 전에 빨리 움직이자고.”

“눈곱만 좀 떼고…….”

에반은 게으른 고양이처럼 얼굴을 문질렀다. 이 녀석 원래 아침에 약했던가?

내 기억상 수련회 때는 제법 빠릿빠릿했던 것 같은데……. 사실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녀석도 성실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긴 하다.

어쨌든 비몽사몽하는 에반을 데리고 아지트를 나섰다.

항상 북적대던 상가 거리도 새벽엔 한산했다.

부지런히 장사를 준비해야 하는 장사치조차 이제 슬슬 이부자리를 개고 있을 시간.

아마 아카데미 사람 대부분은 아직 꿈나라일 테고… 그게 우리가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는 이유가 되겠다.

우리는 전차를 이용하지 않고 움직였다.

당연히 전차 쪽이 더 빠르지만, 어쩐지 탑승 기록이 남아 나중에 추적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다행히 상가와 연구 동은 그리 멀지 않았다. 기숙사에 돌아가지 않고 불편한 잠자리를 고집할 만했달까?

“도착했어.”

“저게 12호 건물인가.”

연구 동 12호는 2층짜리 건물이었고 ‘ㄷ’자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름 새벽녘인데도 음침한 느낌이 확 들었는데, 한밤중에 봤으면 진짜 폐건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교수들이 연구할 때 쓰는 곳 아니야? 꼴이 왜 저러냐.”

“연구 동 건물은 1호가 제일 좋고, 순차적으로 내려갈수록 시설이 열악해진다더라. 12호쯤 되면 안 쓰는 화장실이랑 구분이 안 가겠지.”

“음…….”

하여간 아카데미라 그런가? 하나부터 열까지 실력지상주의다. 배드니커 가문인 내겐 익숙한 풍토긴 했지만…….

“…음.”

건물에 발을 들인 직후, 나아 에반이 동시에 침음을 흘렸다.

어쩐지 기감이 간질간질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알쏭달쏭, 멜랑꼴리한 느낌이랄까.

밤에 발을 들였으면 확실히 위험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잘도 이런 곳에서 연구를 하는구만…….”

“교수직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들었어. 2년에 한 번씩 성과를 못 내면 앞뒤 안 보고 잘린다더라.”

“그렇구만……. 근데 넌 아카데미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아냐.”

“아. 팜이랑 겹치는 수업이 좀 있었거든. 알잖아? 수다스러운 녀석인 거.”

어쨌든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 대부분은 교수였고, 무예와는 인연이 없는 자들이라 우리의 잠입을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따로 경비가 있는 것도 아니라 손쉽게 목적지인 104호까지 도착했다.

끼이익…….

불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 즉시, 묵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방 내부가 유난히 어두웠다. 창문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암막 커튼이 일출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촤륵…….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커튼을 반쯤 걷었고, 비로소 방의 꼬락서니가 제대로 드러났다.

“우와…….”

“…….”

세렌 말대로 산처럼 쌓인 오컬트 용품과 낡은 인형, 그리고 벽에 새겨진 복잡한 문자와 문양.

뭐라고 해야 하나.

1초도 머물기 싫은 곳이다.

불결함이 아닌 분위기 때문에 말이다.

“진짜 밥맛 떨어지는 곳이네.”

“넌 인형 쪽을 확인해 봐. 나는 저 뭐에 쓰는지 모르는 오컬트 용품 쪽을 뒤져 볼게.”

“우웩.”

에반이 토하는 시늉을 하며 인형 쪽으로 향했고, 나는 각종 꺼림칙한 용품들을 뒤적거렸다.

피가 묻은 손수건과 썩어 문드러진 꽃잎, 반쯤 부서진 머그컵, 알 수 없는 용액이 든 병, 아기가 쓸 법한 래틀(Rattle), 녹이 슨 조각칼…….

‘불길하다’는 것 이외엔 공통점 하나 없는 물품들이 가득하다.

나는 화안을 사용해서 혹시 마도구 같은 게 섞여 있나 확인했지만…….

‘없구만.’

여기 있는 건 죄다 오래된 골동품이다.

그런 다음 벽면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면 세계의 형성, 유지, 법칙의 강제를 위한 흑마법진과 그곳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적힌 악마어.

세렌 녀석, 잘도 이 지렁이 같은 문자를 잘 따라 적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

나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즉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쪽지를 꺼낸 다음, 벽면에 새겨진 것들과 비교했다.

‘…악마어가 한 줄 늘었는데?’

등골이 조금 서늘해졌다.

세렌이 이곳을 방문하고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았을 거다.

이 말인즉슨, 그 며칠 사이에 누군가가 이곳을 들렀다는 뜻인데.

“…루안?”

“뭔데?”

“인형들이 좀 이상한데.”

에반은 보기 드물게 딱딱한 얼굴로, 산처럼 쌓인 인형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가 이상한데.”

“이 녀석들, 계속 나를 쳐다봐.”

“뭐?”

“봐.”

에반이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듯 살짝 움직였고.

끼긱, 끽…….

“……!”

관절이 꺾이는 소리와 함께, 인형의 고개가 에반을 쫓아갔다.

“…세렌 영애는 이런 말 없었지?”

“그래. 그리고 악마어도 한 줄이 늘어났어.”

“진짜야?”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일단 여기서-.”

“후후.”

짧은 웃음소리에 우린 둘 다 입을 닥쳤다. 뒤를 본 순간 유령처럼 서 있는 황녀가 보였다.

“…….”

기척을 조금도 못 느꼈다.

실은 지금도 그랬다.

분명 코앞에 담담한 기색으로 서 있는데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꼭 허깨비를 목전에 둔 것처럼.

황녀가 어두운 시선을 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동아리 입부 때문에 온 건 아닐 테고……. 데스베리, 저들이 무슨 볼일로 이곳에 온 것 같니.”

“…….”

“네 말이 맞아. 방해하러 온 거겠지. 우리가 낙원을 만드는 것을.”

대답할 가치가 없다.

질문을 건네는 황녀에게선 사악한 기색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노골적인 악기다.

찰나, 황녀에게 에반의 정체를 들키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라.”

짧게 말한 다음, 즉시 황녀에게 달려들다 절반쯤 좁혀진 거리에서 좌장을 내질렀다.

화륵!

백일식 화륜, 손바닥 형태의 불꽃이 황녀에게 날아갔다.

황녀는 그 광경을 보고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콰가각!

벽면에 서 있던 인형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화륜을 향해 몸을 던졌다.

육체를 도외시한 움직임, 한 무리의 부나방이 방패가 돼서 황녀를 보호했다.

그때 등 뒤에선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반이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소리다.

“아하하.”

황녀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추격하려는 기색은 없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시선은 줄곧 내게 박혀 있었다.

나도 그 눈동자를 마주 봤다.

흑색으로 감춘 머리카락이었지만, 황족 특유의 붉은 눈동자는 숨기지 못했다.

글렌이 말했던가.

현재 황족이 된 열댓 명의 인물의 선별 기준은, 고귀한 붉은색의 순도라고.

확실히 그랬다.

황녀의 눈동자는 올더슨의 보물 창고에서 본 선홍옥보다 훨씬 더 붉고, 아름다웠다.

타닥, 탁…….

시꺼멓게 그슬린 채 타오르는 인형 너머, 황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툭 말했다.

“이면 세계로 가고 싶은데.”

여기서 황녀와 싸운다면, 굴복시키고 죽이는 것까지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빙긋 미소를 지은 황녀가 말했다.

“재밌구나. 낙원에 관한 건 어떻게 알았니?”

“여기 댁이 적어 놨잖아.”

나는 엄지로 악마어를 가리켰다.

황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걸 읽을 수 있나 보구나. 후후. 데스베리에게 친구가 늘겠는걸…….”

“…….”

“좋아. 나의 낙원은 오는 아이를 거절하지 않는단다. 루안 배드니커, 너도 분명 마음에 들 거야. 몇 가지 규칙만 지킨다면 말이지.”

“규칙?”

모르는 척 물어봤다.

리세에게 얻은 말과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첫째. 낙원 주민에게 잡히면 안 돼. 둘째. 낙원을 벗어나려고 하지 마.”

“…….”

낙원을 이면 세계로, 낙원의 주민을 인형으로 바꿔 말하면 리세가 했던 설명과 동일하다.

“그리고 셋째. 하루에 한 번, 낙원에 있는 아이들과 반드시 놀아 줘야 해.”

“…….”

이건 못 들은 건데.

새로 추가된 게 이 규칙이었을까?

그런데 놀아 준다는 게 무슨 뜻일까.

내가 묻기도 전에, 갑자기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다.

키릭, 키릭, 키릭…….

아직 남은 인형들이 벽을 기어가더니 창문을 몸으로 가린 것이다. 꼭 득실거리는 바퀴벌레처럼 역겨운 광경이었다.

황녀가 입구 방문에 손을 뻗더니, 천천히 닫았다.

끼이익…….

황녀는 듣기 싫은 문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까지 지으며 속삭였다.

“만월까지 재밌게 놀자, 루안 배드니커. 부디 너도 즐겨 줬으면 좋겠어.”

탁-.

문이 닫혔다.

방 안은 완전한 어둠에 침잠됐다.

…….

…….

…….

침묵.

황녀의 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어느새 주변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 없이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나는 어두운 방 내부를 더듬었다.

암전되기 전의 기억을 토대로 커튼의 위치를 찾은 다음, 걷어낸다.

촤륵-.

“…….”

새벽녘과 일출의 빛을 기억한다.

분명 동이 트고 얼마 되지도 않았었다.

지금은 달랐다.

반쯤 부서진 창문 바깥엔 피로 물든 듯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성큼 다가온 듯, 하늘의 절반을 채운 핏빛 달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이면 세계인가.

“…분위기 보소.”

왠지 모르게 거북한 광경이라 다시 커튼을 치려는 찰나였다.

으아아아…….

멀찍한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그리 멀지 않다.

나는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 * *

아린 오한델은 그 나이대 소녀들이 대부분 그렇듯 인형을 좋아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구매해서 소장하지는 않았다.

열일곱이란 나이에 인형을 사는 게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기숙사 생활이라 달리 숨길 곳이 없기도 했고.

‘그래도, 언젠가…….’

아카데미를 졸업한다면, 집에서 독립해서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된다면…….

방 한구석에 꼭 마음에 드는 인형 몇 개를 들여놓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힉, 히익, 힉……!”

이제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생각이다.

아린에게 있어 인형은 이제 꿈이 아닌 악몽이 됐다.

공포 섞인 숨을 내뱉으며 어둑하고, 긴 복도를 내달렸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복도.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핏빛 광채에 헐떡이는 자신의 그림자가 비쳤다.

살고 싶어서, 죽기 싫어서, 더는 아프기 싫어서 내달리는 소녀의 모습은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웠다.

키히히히-!

그 뒤를 인형이 쫓아왔다.

아린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형이었지만,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상태고, 손엔 자기 몸만큼이나 커다란 칼이 들려 있다.

썩은 피와 고기 조각이 들러붙은 도축용 칼.

저 칼에 맞아 핏물이 된 생도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흐끕…….”

아린은 문득 눈물이 나왔다.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 호흡을 정돈하기도 힘든데도 두서없는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숙제도 잘할게요. 땡땡이도 안 칠게요. 군것질도 줄일게요. 그러니까-.”

그다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가 때마침 목소리가 갈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미 없는 말이란 걸 알아서, 내뱉은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단 걸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쿠당탕!

그리고 아린은 넘어지고 말았다.

발을 헛디딘 게 아닌 필연적인 일이었다.

다리에 감각이 사라진 지는 좀 됐다.

육신은 진작 한계를 넘었지만, 공포 때문에 억지로 내달렸다.

죽기 직전의 인간이 일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그것마저도 한계인 듯하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인형은 더는 내달리지 않고 천천히 걸어왔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저것들의 본성이 그랬다.

인간의 공포나 두려움, 절망, 좌절을 즐겼다.

“으힉, 힉…….”

아린 오한델은 마법을 배웠지만, 이 순간 맞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태로는 마나 운용조차 되지 않겠지만, 만약 쓸 수 있다고 해도 헛수고일 거다.

검술 학부에서도 굴지의 실력자로 유명한 테우스란 선배가 있었다.

황실 기사단으로의 입단이 거의 확실한 성적이라고 들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 잡혀 왔던 그 선배가 얼마간 살아 있던 생도들을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호기롭던 얼굴, 자신만만한 태도에 믿음이 갔다.

선배의 말을 따르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오래가지 못했다.

인형과 호기롭게 맞서 싸우던 테우스는, 일 분도 되지 않아 사지가 전부 잘린 채 바닥을 기었다.

- 으아아아……. 사, 살려 줘……. 살려줘……! 제, 제발… 아, 아파. 너무 아파… 어, 엄마…….

테우스는 죽기 직전까지 몸통만으로 기어 다니다, 기력이 다할 때쯤 얼굴이 과일처럼 뭉개져 죽었다.

“흐끅, 흡…….”

아린은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걸 깨달았다.

죽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고통받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편히 죽고 싶었지만, 혀를 깨물 용기조차 없었다.

그러고 보니 혀를 깨물어서 자결하는 건 미신이라고 했던가.

이런 상황에서도 쓸데없는 생각이라니.

아린은 헛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도,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 인형이 발치까지 이르렀다.

키에엑…….

아린의 오른 다리에 시선이 멎었다. 퉁퉁 부은 발가락과 벗겨진 발톱. 아. 저것부터 자르려는 셈인가 보다.

도축 칼이 높게 치솟는다.

어쩐지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숱하게 봤던 광경인데도 그랬다.

저 칼에 내 다리가 잘릴 것이란 사실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

그 강직하던 테우스 선배가 왜 마지막 순간 엄마를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

아린의 목소리가 흩어진 순간이다.

우측에서 따스한 빛이 일렁였다.

종일 악몽처럼 따라붙었던 음산하고 두려운 붉은 달빛이 아니었다.

무심코 손등에 닿으면 나른함을 느끼게 했던, 그러나 고개를 들면 그 누구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찬란한-.

햇볕의 기척.

아란의 감상은 정확했다.

그녀가 목도한 건 천지 만물 중에서도 태양을 본떠 만든 무공이었다.

꽈아아아앙!

인형이 박살 났다.

대적할 생각조차 못 했던 악마가, 나무로 만든 평범한 인형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괜찮으신가.”

“…….”

아린은 풀린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백금발의 소년이 주먹을 털털 털었다. 악마를 죽인 게 아니라, 허수아비라도 부순 듯한 표정이었다.

“너는……?”

“편입생이야. 넥타이 색을 보니까 선배 맞지? 일단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어조가 가볍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걸까?

이런 생도가 종종 있었다.

학장의 성격이 워낙 고약하다 보니, 이 상황을 또 모종의 이벤트나 시험 따위로 생각한 것이다.

가장 빨리,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생도들이기도 했다.

“자, 잠깐만……. 여, 여긴 위험해. 사방에 사람 죽이는 인형이 득실거리고, 나 말고도 다 잡혀 왔는데, 그리고 또 이건 시험 같은 게 아니고…….”

“다 알아.”

“어, 어?”

“악마가 출현한 거잖아. 선배는 그거에 휘말린 거고.”

소년이 두서없이 튀어나오던 말을 끊었다.

아린이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너, 너도 여기 잡혀 온 거야?”

“좀 달라. 내 발로 직접 왔으니까.”

“직접 왔다고? 어째서……?”

어째서 이 지옥에 직접 왔느냐고, 그런 물음이 어조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러자 백금발의 소년이 대답했다.

“구해 주려고.”

“…….”

그러자 아린 오한델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했다.

우물거리는 입술과 움찔거리는 코끝, 곧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줄곧 삼켰던 말이 있었다.

‘도와주세요.’

이 알 수 없는 세상이 갑자기 잡혀 와서, 도망치고, 겁에 질리고, 애걸하고, 절망하고, 다시 도망치면서.

수천, 수만 번을 품었고, 내뱉었던.

‘제발 도와주세요.’

하지만 의미 없단 걸 알아서, 내뱉은 말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는 걸 알게 돼서, 어느 순간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했다.

그래서 “구해 주세요.”라는 말은 죽기 직전까지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 이상으로, 내 목소리가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것이란 게. 이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어 간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내뱉지 못한 목소리가 누군가에겐 분명히 닿았다.

그 사실에 아린은 왈칵 눈물이 나왔다.

“고마워…….”

둑이 무너진 것처럼, 눈물과 함께 부서졌던 본심이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고, 고마워. 고마워. 이, 이제 다 틀린 줄 알았, 흑……. 정말 고마워…….”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표한다.

소년은, 루안 배드니커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이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나 홀로 이면 세계에 발을 들인 게 멍청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르지만…….

일단은 오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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