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훌쩍이는 아카데미 생도를 내려다보고 있는 순간, 그 뒤편에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드르륵……!
나는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지만, 생도의 태도는 달랐다.
“사, 살았다……!”
방금까지 훌쩍이던 녀석이 반색하더니, 그대로 다이빙이라도 하듯 문 안에 몸을 던진 것이다.
“너, 너! 너도 빨리 이리 와!”
“…….”
그리고 밝은 얼굴로 손짓한다.
살짝 의아했지만, 함정 같지는 않아서 그 뒤를 따랐다.
나까지 발을 들인 직후 문이 닫혔다.
“휴우우…….”
그러자 생도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제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안전하다니?”
나는 생도를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들어야 할 설명이 많을 것 같았다.
* * *
아린 오한델.
열일곱 살. 아카데미 생도 3학년이자 마법 학부 소속.
오한델은 들은 적 없는 가문이다. 딱히 유명한 집안은 아니란 뜻이다.
“분명 이쯤에 있을 텐데…….”
아린은 방에 들어온 직후 이곳저곳 뒤지기 시작했고, 그사이 나는 방을 둘러봤다.
대충 연구실로 썼던 곳인 듯한데, 그리 넓지는 않았다.
내가 머무는 기숙사 방의 절반 정도?
방에는 창문도 있었는데, 여전히 떠 있는 핏빛 달이 보였다.
아까는 하늘에 정신이 팔렸었다.
이번엔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낮춰서 지상을 살폈다.
“…….”
붉은 조명이 드리운 대지는 핏물을 머금은 듯했다. 방금 내가 걸어온 곳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
고작 어두워진 것만으로 생긴 변화가 아니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정원과 나무, 오래된 가로등과 부서진 도로, 그리고 악마…….
‘악마?’
눈을 가늘게 떴다.
제법 떨어진 건물에서 봐도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괴물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저놈들도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크기가 너무 컸다.
눈대중으로 봐도 최소 3미터는 넘을 듯했다.
“‘어른 인형’이야.”
어느새 다가온 아린이 속삭였다.
“어른 인형?”
“응. 아까 네가 해치운 건 ‘아이 인형’이라고 해. 아이 인형은 건물 안에만 있어. 저렇게 바깥을 배회하는 건 전부 다 어른 인형이지.”
“음…….”
“우리가 건물을 나설 엄두조차 못 내는 이유야.”
아린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털더니, 분위기를 환기하듯 밝은 어조로 말했다.
“이것 봐.”
뭔가 싶더니 손엔 물 두 통과 길쭉한 막대기 같은 게 들려 있었다.
후자는 어디서 봤던 비주얼이었다.
“…에너지바?”
“앗. 아는구나. 맞아. 방 안에는 이렇게 먹을 게 숨겨져 있어. 여긴 마침 두 개나 있네.”
아린이 내게 에너지바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
“어?”
“아, 아니다. 네가 날 구해 줬으니까, 두 개 다 먹어도…….”
꾸르르륵, 하는 소리가 아린의 말을 끊었다. 아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난 밖에서 든든히 먹고 왔으니까 선배가 둘 다 먹어도 돼.”
“저, 정말?”
“그렇다니까.”
“고마워!”
워, 라고 내뱉은 순간 아린의 입엔 에너지바가 들어가 있었다.
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에너지바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잡곡물을 굳혀서 만든 에너지바.
수련회 때 주니앙 사제가 주는 걸 먹었었지. 보존하기 쉽고 열량도 충분했지만, 맛이 너무 없었다.
웬만큼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먹고 싶지 않을 정도였지만…….
아린은 배를 채울 수 있단 사실이 그저 기쁜 모양이다.
‘무리도 아닌가.’
피골이 상접한 걸 보니 못해도 일주일은 굶주린 듯하니.
벌컥벌컥 물 한 병을 통째로 마신 아린이 한숨 돌린 얼굴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후아… 살겠다.”
“선배는.”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아서, 나는 바깥 풍경에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이곳에 얼마나 머물렀어?”
“글쎄? 여기는 태양이 뜨지 않아서……. 그래도 한 몇 달은 된 것 같은데.”
“…….”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생존의 전문가라면 몰라도, 이런 평범한 생도가 극한 상황에서 시간의 흐름을 올바르게 느끼긴 어렵기 때문이다.
아린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넌 대체 정체가 뭐야? 그 흉악한 인형을 한 번에 쓰러뜨리다니…….”
“루안이라고 해. 신분은 영도고.”
“영도!?”
아린이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아! 편입생이라고 했었지……. 맞아. 한 달쯤 뒤에 영도들이 온다고 들은 기억이 나. 그렇다면 [위대한 가문]의 후예란 거잖아? 아니, 거잖아요……?”
하급 귀족인가.
갑자기 존댓말하며 눈치 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냥 편하게 말해. 어차피 여기선 편입생 신분이니까.”
“그, 그럴까? 어, 아무튼… 영도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대단하다……. 왠지 엄청 침착하댔어. 영도들은 다 그런가?”
아린은 수다스러운 성격인 듯했다.
팜 옆에 붙여 놓으면 둘이서 온종일 재잘거릴 듯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영도란 이름이 도움이 되기는 한다.
글렌 때도 그랬지만, 이 나이대 소년소녀들은 대체적으로 어린 영웅이란 신분에 동경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아린의 신뢰 가득한 눈빛이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런 태도라면 유사시에 내 명령을 잘 따라 줄 것 같으니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가장 우선해야 할 건 민간인의 안전 확보.’
이 안전이란 건 단순히 물리적 위협의 차단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한 정신적인 안정 또한 도모해야 한다.
나는 아린을 보며 말했다.
“선배는 이제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어?! 어, 으응……!”
그러자 아린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아닌가?’
사실 내가 어휘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다.
어쨌든 말을 고를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라서, 나는 다시 질문했다.
“이 건물 출입구는 어디 있는지 알아?”
“알긴 아는데…….”
아린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는 건 불가능해.”
“바깥에 어른 인형이란 놈들이 있어서?”
“그것도 그렇지만… 일단 이 건물에 대해서 알려 줄게. 이 연구 동 건물은 기형적일 정도로 커. 봐서 알겠지만, 복도 길이가 평범한 건물의 수십 배는 되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길이가 아니라, 너비도 마차가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아린이 말을 이었다.
“여긴 1층이지만… 바깥으로 나가려면 올라가야 해.”
“왜?”
“1층에는 출입문이 없거든. 옥상까지 올라간 다음 뛰어내리는 게 유일한 탈출구야.”
어째 말투가 묘하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하는 듯한.
“실제로 도전했나?”
“…나는 아니고, 적색관에 있는 선배들이. 총 일곱 명이었지.”
아린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이 건물만 해도 위층으로 오를수록 포악스러운 놈들이 나와. 1층에 있는 인형도 나한텐 버거운데, 옥상쯤엔 어떤 괴물이 있겠어? 짐짝은 놔두고 가는 게 맞지.”
“…….”
“그래도 그 선배들은 엄청 강했어. 건물 안에 있는 인형들은 너처럼 쉽게 쓰러뜨렸으니까. 하지만…….”
아린이 죽은 눈으로 창문을 보았다.
“어른 인형 하나한테 다 죽어 버렸어.”
“아.”
“싸움조차 되지 않았지. 바깥에 있는 저 인형들은… 진짜 괴물이야.”
그 정도인가?
살짝 봤지만, 눈으로 봐선 수준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생명체라면 기도를 통해 대략적인 실력을 유추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놈들은 인형이라서 그렇다.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일의 우선순위.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황녀를 죽이는 것, 급한 일이지만 아직 만월까지는 시간이 있다.
그렇다면 당장 우선해야 할 건…….
“일단 나가자.”
“어디로 가게?”
“사람을 더 찾아야지.”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그 살아 있는 놈들은 아린이 모르는 정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황녀를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
내 말에 아린이 망설였다.
복도로 나가는 게 두려워 보였다.
“무서우면 선배는 여기 머물러도 돼.”
“아, 아냐! 같이 갈게! 지, 짐짝은 안 될 거야. 응!”
아린이 다급히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 혼자 남겨지는 게 죽기보다 더 싫은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방을 나섰다.
핏빛 조명이 드리운 복도를 다시 걷는다.
나는 슬쩍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응?”
“이 창문을 부수면 그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아.”
아린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시도는 해봤지. 철제 의자로 있는 힘껏 후려쳤는데 꿈쩍도 안 하더라.”
“오호…….”
웬만한 일로는 흠집도 나지 않는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내 안의 반골 정신이 꿈틀거린다.
겉보기엔 평범한 창문을 보며 염화제일공을 일으키려는 순간이다.
“어…….”
숨을 헉 들이마시는 기척과 함께 아린이 앞을 가리켰다.
“…….”
인형 한 놈이 멀뚱히 서 있었다.
내 발목에나 닿을 법한 봉제 인형인데, 이 녀석도 손에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저기에도 피가 묻어 있다.
키키키.
“아으…….”
인형이 비웃음을 터뜨린 순간, 아린이 뒷걸음질을 치며 양어깨를 감쌌다.
악몽을 현실에서 마주한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우장을 뻗었다.
대충 전개한 화륜이 인형에게 날아갔다. 손바닥이라기보단 뭉친 불꽃 같은 형태.
의도한 것이다.
이딴 잔챙이에겐 내력도, 심력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화륵!
화륜이 인형의 몸 전체를 덮었다.
봉제 인형이니만큼 화끈하게도 타오른다.
“어……?”
아린이 멍청한 목소리를 냈을 때쯤, 내 시선은 이미 인형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선배, 뛸 수 있겠어?”
“아, 응.”
“그럼 서두르자고. 혹시 계단은 어디 있는지 알아?”
“알긴 아는데… 혹시.”
아린이 망설이더니 말했다.
“위층에 올라가기 전에 내 친구들을 구해 줄 수 있어?”
“구해 달라고?”
의아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구해 달라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인데, 이곳에서의 위기는 수초 내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상대는 살육 인형들이라 그렇다.
별다른 훈련을 받지 못한 생도들이라면 더욱 그럴 텐데.
“응……. 사로잡혀 있거든.”
“누구한테?”
“같은 생도한테.”
까득, 이를 간 아린의 눈동자에 원망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남색관 녀석들이야. 1층에 있는 식당을 점거했어.”
“남색관?”
“응. 혹시 들어 봤어? 아카데미 차원에서 문제아들만 몰아넣은 곳이야. 일종의 수용소랄까.”
처음 듣는다.
남색관.
기숙사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인 건 알고 있었지만, 문제아를 몰아넣은 수용소 역할을 하고 있을 줄은.
‘성품이 멀쩡한 놈들은 아니란 뜻인데.’
극한 상황에서야말로 인간의 본심이 드러난다.
한정된 식량과 제한된 지역, 사방에 득실거리는 죽음……. 천성이 불량한 생도들에게 그러한 환경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딱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식당은 어디야?”
“잠깐만.”
아린이 창문에 붙었다.
‘ㄷ’자 형태의 건물은 길쭉한 일자형 몸통에 양 날개가 튀어나온 모습과 흡사했다.
창문 너머로 반대쪽 날개 건물이 보였다.
아린은 그걸 보며 현재의 위치를 어림짐작한 듯싶다.
“이쪽으로 계속 가면 되겠다. 쭉 가다가 왼쪽으로 한 번 길이 꺾이고, 다시 걸으면 유난히 커다란 문이 나올 거야. 거기가 식당.”
“좋아. 가자.”
발걸음을 조금 더 서둘렀고.
그러다 인형을 몇 마리 더 마주쳤다.
이놈들은 한 마리씩만 등장했는데, 딱히 귀찮은 적은 아니었다.
지형 자체도 내게 유리했다.
탁 트인 복도는 숨을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저런 작은 몸뚱이라면 기습에 유리할 텐데, 좁아터진 방에 몸을 숨긴 채 기습했다면 훨씬 귀찮았을 거다.
“저 인형 한 마리를 검술 학부 선배조차 죽이지 못했는데…….”
아린은 나자빠지는 인형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 된 듯했다. 어쨌든 공포감은 많이 희미해져서 다행이다.
길이 한 번 꺾였고, 다시 한번 쭉 나아갔다.
임의로 ‘몸통’이라 부른 건물에 진입한 것인데 이곳의 복도는 훨씬 더 넓었다.
도중에 위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지만, 올라가지는 않고 지나쳤고…….
“…여기야.”
마침내 유난히 커다란 문을 발견했다.
* * *
루소 모잘란은 생각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지옥에 오고 한 달은 훌쩍 넘었을 거라고.
어쩌면 두 달? 잘 모르겠다.
처음엔 좌절하고, 두려워했다. 죽음까지 생각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복도에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했고… 이 식당이란 장소는 자리 잡은 인원수에 따라 매일 먹을 게 나왔다.
딱히 쓸모도 없는 생도들을 일단 방에 잡아 두고 있는 이유였다.
“루소 선배, 부탁이에요…….”
그때 한 생도가 다가왔다.
핼쑥한 안색과 흐릿한 안광, 툭 불거진 광대뼈가 보였다.
“벌써 나흘째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제발…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먹을 걸…….”
“거짓말이 재밌네. 아무것도 못 먹었다니. 어저께 물을 줬잖아.”
“하, 한 모금이 전부였잖아요…….”
“맞아.”
루소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 마실 거만 있으면 한 달도 버틸 수 있는 게 사람이야. 뭐 어때? 이 기회에 다이어트라도 한다고 생각하면 좋잖아.”
“…….”
“아니면 직접 발로 나가서 먹을 걸 찾아오면 되겠네. 그 왜, 아린이었나? 그 녀석처럼 말이야.”
생도가 입을 꾹 닫았다.
그게 자살행위란 건 아마 루소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 저리 말하는 거다.
이 식당을 못 나갈 걸 알고서.
그때였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식당에 있던 생도들은 놀라지 않았다. 인형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복도만이 그 악마들의 영역이었다.
즉 문을 여는 건 반드시 사람이라는 뜻이었는데…….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건 맹랑하게 생긴 백금발의 소년이었다.
“선배, 여기 맞아?”
“으, 응…….”
뒤에서 모기처럼 작은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루소의 시선이 그쪽에 닿았다. 아는 얼굴이다.
“아린 오한델, 살아 있었네.”
“…….”
“밖에 나가 보니 집이 역시 그립지? 다시 온 걸 환영해. 물론 괘씸죄로 일주일은 금식이야.”
“아하.”
대꾸한 건 아린이 아니라 소년이었다.
“이런 식으로 통제하고 있었군. 확실히 치사하긴 해도 협박거리론 음식만 한 게 없지.”
그때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생도가 입을 열었다.
“너, 뭐냐?”
유난히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었는데, 생도복 아래로도 단련한 근육이 엿보였다.
“딱 봐도 하급생으로 보이는데 버르장머리가 없군. 이곳에 아직 교수나 교칙 같은 게 존재하는 것 같나?”
“…….”
“오래 살고 싶다면 예절을 지켜라.”
그러자 소년의 표정이 묘해졌다.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들려왔다.
“…예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