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일목요연一目瞭然이라는 단어가 있다.
한 번 보고 알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분명하다는 뜻인데, 지금이 딱 그렇다.
방 안에 있는 인원은 총 열셋.
덩치가 크고 낯빛이 좋은 놈이 다섯이고.
나머지 일곱을 몇 주는 굶겼는지 안색이 초췌하다. 입고 있는 생도복이 아니라면 비렁뱅이로 착각할 정도다.
“댁은 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나?”
“뭐?”
“나도 그래. 실은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그거거든. 예절을 아느냐. 모르느냐.”
말이 통한다고 죄다 사람은 아니란 뜻인데, 이 무식하게 생긴 녀석이 과연 알아들었을까?
그렇단 걸 다음 순간 깨달았다.
생도가 즉시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그래도 욕을 처먹었다고 발끈하는 게 아직은 사람이었다.
폐쇄적인 곳에 오래 있다 보니 성향이 폭력적으로 변한 걸까?
아니면 원래 이런 놈이었을까.
흥미로운 사색은 아니었다.
빠악!
“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먹을 날리던 놈이 안면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았다.
대다수가 이랬다.
고통을 주는 놈들은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다. 엿 같은 진실이다.
나머지 넷 중 세 명이 벌떡 일어났는데, 한 녀석만은 자리에 앉은 채 나를 관찰했다.
그 꼴이 눈꼴사납다. 탓, 오랜만에 일영보를 밟으며 거리를 좁혔다. 거드름 피우던 생도의 입이 툭 벌어진 순간, 낚아채듯 멱살을 움켜잡았다.
“……!”
그 와중에도 손을 허우적거리는 게 보였다. 형편없는 대응이었지만, 반응한 건 놀랍다.
이 녀석은 그래도 최하위 영도 수준은 되지 않을까 싶다.
퍼억.
그러니까 스컬이나 한스 정도 말이다.
주먹이 복부 깊숙이 꽂혔다. 부릅떠진 눈이 보였다.
“엄살은.”
일부러 힘 조절까지 했는데 반응이 격했다.
“루소!”
생도 한 명이 비명처럼 이름을 내질렀다.
이놈의 이름이 루소인 모양이다.
나는 루소의 어깨를 잡은 다음, 비명을 지른 생도 놈들에게 던졌다.
쿠당탕, 생도는 몸으로 루소를 받으며 쓰러졌다.
“…….”
“…….”
아직 멀쩡하게 서 있는 두 명은 흠칫하는 기색으로 나를 노려볼 뿐, 쉽사리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다.
우두머리를 잃는 순간 간단히 붕괴하는 집단. 데룩 굴러가는 눈동자가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녀석들이 생도가 아니고, 조금만 더 선을 넘었더라면 그냥 이 자리에서-.
[연자여.]
무신의 나직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뇌리에 닿았다.
‘음.’
나는 치솟던 살심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털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기분파이긴 하지만, 함부로 살생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마왕의 영역이라서 그렇네. 명정을 유지하게. 광기에 휩쓸리면 안 돼.]
‘그럼 혹시 이 녀석들도?’
[아마도 그럴 걸세. 선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본디 이토록 악독한 아해들은 아니었을 터.]
‘…….’
어떤 의미로는 이놈들도 피해자란 뜻인가. 김이 팍 샜다.
나는 짤막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선배들한테 먹을 거 나눠 주고, 루소였나? 넌 이리 좀 와 봐라.”
“쿠, 쿨럭…….”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세요. 한 대 더 처맞기 전에.”
그러자 루소가 벌떡 일어난 다음 내 앞까지 후다닥 달려왔다.
다행히 눈치는 어느 정도 있는 녀석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뭐, 뭐를 설명하라는…….”
“하나부터 열까지, 네가 아는 거 전부.”
“어…….”
잠깐 망설이던 루소를 가만히 노려보니, 이 녀석은 칼끝에 찔린 사람처럼 다급히 정보를 토해냈다.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지만, 딱히 큰 수확은 없었다.
대다수가 아린이 말했던 것과 겹쳤다.
그때 에너지바를 오물거리던 한 생도가 외쳤다.
“지, 지하 계단이, 케흑, 있었어요!”
얼마나 급하게 말했는지 사레가 들린 듯 콜록거린다.
나는 생도가 물을 마시기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가 물었다.
“지하 계단?”
“네, 네. 너무 무서워서 차마 발을 들이지는 못했는데… 어쩐지 그 밑은 좀 더웠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어요…….”
“…….”
건물을 나서는 방법은 옥상이라고 했고… 일반적으로 지하는 출구와는 거리가 먼 장소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마왕의 영역이다. 상식에 얽매여선 안 되는 장소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계단에 대해 궁금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어, 어디 가?”
아린이 화들짝 놀라더니 내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힐끗힐끗 루소 쪽을 보는 게, 내가 사라지면 저놈들이 다시 행패를 부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 금방 돌아올 거니까.”
사실이다.
아무리 저놈들이 생각이 없다고 해도, 불과 몇 시간 만에 쓰레기 같은 짓을 반복하지는 않을 거다.
최소 하루, 느긋하게 사나흘.
그때까지 내가 안 오면 슬금슬금 비열한 짓을 재개하겠지.
다행히 내 용무는 그리 오래 걸리는 편이 아니었다.
드르륵.
문을 닫은 직후 심호흡한 다음… 나는 즉시 뱀의 눈을 활성화했다.
‘──.’
다행히 건물 구조가 어느 정도 보인다.
‘더럽게 넓네.’
허름했던 연구 동의 건물 한 채가, 이제는 아카데미 본관을 여러 개 이어 붙인 것보다 훨씬 커졌다.
2층짜리였던 층수도 4층까지 늘어나 있었고 말이다.
층과 층을 가로막은 천장 너머로, 격하게 움직이는 열기의 덩어리들이 보였다.
아작 살아 있는 생도들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곧바로 구조 활동에 나섰다.
그렇게 1층에서 다섯 명, 2층에서 세 명, 3층에서도 세 명, 4층에선 한 명.
총 열두 명의 생도들을 구했다.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무서웠어…….”
“…이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생도들이 저마다 감사를 표했다.
아린만큼이나 겁을 먹은 생도도 있었고 의외로 담담한 생도도 있었다.
4층에 홀로 있던 생도가 그랬다.
넥타이 색을 보니 최고 학년이었다.
늠름한 인상의 청년이었는데, 이름은 지돈이라고 했다.
“구명에 감사한다. 놀랄 만한 무예로군…….”
이 녀석은 제법 괜찮은 실력의 소유자였다.
아린의 말대로 4층에 있는 인형들은 강했는데, 생긴 것도 봉제인형이 아니라 구체관절인형이었다.
괴이할 만큼 몸을 삐걱거리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런 불쾌한 형태로도 제법 빨리 움직였다.
지돈은 그런 인형들을 상대하면서도 제법 오래 버틴 듯했다.
“옥상으로 가는 길이 너무 험난했다……. 일단 이 건물을 나서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배, 미안한데 1층으로 내려가 주면 안 될까?”
“음?”
나는 지돈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억압당하는 생도와 권력을 잡은 채로 설치는 루소 일행.
지돈의 얼굴이 즉시 일그러졌다.
“…끔찍한 일이로군. 미래의 기사로서 용납할 수 없어. 잘 알겠다. 그 루소란 놈은 내가 맡지.”
“고마워.”
“그런데 은인의 이름을 아직 안 물어봤군.”
“루안이야. 일단은 편입생이지.”
“편입생? 아! 미래의 영웅이었나.”
지돈이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 또한 기사가 되기 전엔 헤로스로 입관하는 걸 꿈꿨지…….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대륙의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
“하하. 그래. 영도라면 안심이다. 내 일은 네게 맡기겠다.”
제도의 인물들은 헤로스에 대한 선망이 특히 더 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부 출신이 제도에 선망을 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러한 태도가 조금 낯설었다.
어쨌든 지돈과 함께 1층까지 향한 다음, 구한 생도들을 식당으로 보냈다.
그리고 루소의 얼굴이 창백해진 걸 확인한 다음, 나는 지하 계단으로 향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오른쪽 날개의 가장 끝부분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던 것이다.
“음.”
후덥지근한 열풍이 올라왔다. 햇볕의 뜨거움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거기에 열기 이외에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연자여, 심상치 않은 악기가 느껴지네.]
무신이 조용히 경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심스레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빛 한 점 들지 않았지만 어둡지 않았다. 아래에서 제법 뜨거운 불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공기도 점차 후끈 달아올랐다.
더위, 열기에 익숙한 내 이마에도 어느덧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이윽고 계단이 끝났다.
‘여기는…….’
[감옥 같군.]
그 말대로다.
펼쳐진 풍경은 지하 감옥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없다.
쇠창살 너머엔 인기척은 물론,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은 걷는다.
제법 많은 뇌옥을 지나치면서도 경계를 흐리지는 않는다.
딱 이런 곳이다. 조막만 한 인형 놈들이 숨어 있다, 기습하기 좋은 장소 말이다.
그놈들은 생명체로서의 기척은 물론이고, 내공이나 마나를 품은 것도 아니라서 순전히 감각에 의지해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제법 많은 뇌옥을 지나칠 때까지 기습은 없었고…….
나는 드디어 이 감옥의 첫 번째 수인囚人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올더슨 학장이었다.
각각의 사지에 쇠사슬이 두 줄씩 묶인 채였고 가슴 언저리엔 핏빛 단도가 박혀 있다.
마법사는 심장에 마나를 두른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단도의 역할은 대마법사의 마법을 봉하기 위해서일 듯하다.
‘진짜 올더슨 학장.’
인형이 아닌, 카르텔 아카데미의 진짜 수장.
그러나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칭칭 묶인 올더슨 앞에 열기의 근원지가 서 있었다.
“…….”
화르르르륵……!
악마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악기마저 흐릿하게 만들 만큼, 폭사되는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신을 갑옷으로 둘러싼 흑기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투구를 쓰고 있지는 않았고 머리가 있어야 할 장소엔 홍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새빨간 홍염은 갑옷으로도 완전히 가두지 못한 채 이음새 부분에서 새어 나왔다.
불꽃으로 된 몸에 흑갑을 두르면 저런 괴물이 탄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위험하군.]
무신이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쉽게 위험을 내뱉지 않는 무신이다.
제사장이 귀환을 펼칠 때 이외엔 크게 놀라는 법이 없었지만, 지금 내뱉은 목소리엔 약간의 당황이 묻어 있었다.
[저 정도 악기, 저만한 기세. 분명 마왕 휘하의 직속 군단장일 걸세.]
‘군단장? 강합니까?’
[여타 잡다한 악마와는 격이 다르네. 마왕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혈족, 혹은 지옥의 일부분을 영역으로 뒀던 과거의 지배자들이니까.]
수련회에서 소환됐던 하급 악마, 비스트도 귀찮은 적이었다. 그놈들의 수장 격이었던 그림 리퍼는 더욱 그랬고.
그런데 지금 저기 서 있는 건 군단장이란다.
직함만 봐도 하급 악마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는 괴물이다.
[물론 불완전한 현현인 듯하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기백이 심상치가 않네.]
그 말대로다.
열기는 물론이고, 악기마저 지금의 내가 싸울 만한 수준은 안 됐다.
제사장이 어린아이로 보일 만큼의 괴물.
그런데 어째서일까.
‘…….’
불길을 두른 검은 기사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무기를 찾을 수 없다. 나는 악마의 손으로 시선을 던졌다.
칠흑의 건틀렛.
저 아래서도 홍염이 꿈틀거리고 있을 테지만,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지.
갑옷을 입고, 불꽃으로 된 육체를 지닌 악마에게서 웅혼한 무인으로서의 기도가 느껴졌다.
잠깐 넷째 사형이 떠오를 만큼 헌앙한 기풍. 실은 악기보다도, 열기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왔었다.
‘…….’
호승심이 꿈틀거린다.
과거로 돌아오고 이만큼 강한 호승심을 느낀 적이 없다.
거기에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할 만한 승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무인으로서의 정체성, 그 근간을 이루는 심법인 염화제일공은 열기에 특히 강하다.
저 악마가 생긴 것처럼 열기를 이용하고, 극양의 무술을 쓴다면 내겐 다소 유리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건 어렵다.
악마란 것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저열한 존재인지 알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저 기도 또한 기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힐끗 올더슨 학장을 본다.
어쩌면 이번 마왕 토벌전에 있어 최중요 인물일지도 모른다.
구출할 수 있다면 막대한 정보를 얻게 될 테고, 그 이상으로 큰 전력이 되겠지.
잠깐의 고민 후 결론이 나왔다.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하다.
“무신님.”
일부러 육성을 내봤다.
확고한 의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말하게.]
“싸워야겠는데요.”
“혼자서? 힘들걸.”
돌연 들린 익살스러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출수했다.
내뻗은 주먹은 원초적인 형태의 지르기였지만, 충분할 만큼의 내공이 실려 있었다.
그 말은 즉 자연스레 백일식의 제일초식인 작열을 전개했다는 뜻이다.
턱.
쉽사리 막혔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내 일권은 물론, 타오를 듯 충천된 내공마저 가라앉혔다.
“쉬잇.”
입술에서 느껴지는 손가락의 감촉.
다소 장난스러운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안녕, 루안 배드니커.”
“…….”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아니, 어느 곳에서 만나더라도 익숙지 않은 인물이 미소 지은 채 나를 보았다.
레오네가 속삭이듯 말했다.
“도와주러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