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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63화 (163/172)

163화

일 합으로 승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나는 자색의 불꽃을 눈에 담았다.

불길不吉한 불길이다.

이 불꽃을 피워낸 순간, 모든 검술과 움직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음양도를 보니 자연스레 대사형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당연하지만 대사형은 창술과 검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실 권장법조차 나보다 아득히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영산에 있을 적 대사형과 종종 대련했던 적이 있었는데.

스승님과 달리 대사형과의 대련은 크게 아프거나 다칠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 친절했다.

방치에 가까운 스승님과는 정반대되는 가르침이었달까?

그 과정에서 대사형은 내게 수많은 기수식起手式을 보여 줬다.

파괴력에 치중한 자세.

방어에 치중한 자세.

회피에 치중한 자세.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최속最速의 일격.

음양도에 자색의 불꽃을 둘렀으니 파괴력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스으…….

호흡을 정돈하며 자세를 취한다.

칼집은커녕 띠조차 없는 허리춤에 납검하듯 음양도를 꽂고, 상체를 살짝 구부린다.

꺾인 오른 손목으로는 검신을 살짝 감쌌다. 휘몰아치던 자색 불꽃이 사그라들고, 스산한 칼날의 예기가 느껴진다.

불꽃을 거둔 게 아니다.

칼날 내부로 응축시킨 것이다.

“…….”

발도술을 쓰는 건 처음이다.

성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불현듯 떠오른 영감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준비가 된 듯하군.]

카짓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군말 없이 기다려 준 것이 살짝 감사함을 느끼며, 동시에 이해도 갔다.

이놈도 승부가 일순에 갈릴 것이란 걸 느낀 거겠지.

스으으…….

카짓타가 기세를 끌어올렸다.

펼친 양 손바닥으로 나를 겨냥하더니, 왼쪽 팔은 가슴 근처까지 당기고 오른쪽 팔은 오히려 나를 향해 내민다.

살짝 굽혀진 허리와 무릎.

생전 처음 접하는 기묘한 자세였지만…….

묵빛 갑옷 때문일까.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도 때문일까.

오래된 예술품 같은 유려함, 혹은 전시된 갑옷을 보는 듯한 묵직함이 느껴진다.

최소 수만 번 이상.

지루할 만큼 반복 동작을 취해야만 비로소 희미하게 형성되는 달인의 기도였다.

‘발경을 한 번 더 사용할 생각인가.’

이쪽에서 성가심을 느낀다는 건 상대의 판단이 옳다는 증거다.

손바닥으로 기파를 방출하는 공격이라면 내 자색 불꽃을 일순간 움츠리게 만들 수도 있다.

아무리 뜨겁고, 끈질겨도 결국 그 본질은 불꽃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상황은 무척 간단해졌다.

속도의 대결.

내 불꽃의 발화와 상대방 불꽃의 방출.

발도와 발경의 겨룸이다.

‘…….’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거슬린다.

자색 불꽃이라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지만, 승산을 높게 치지 않는 이유다.

허벅지 근육은 폭발적인 속도를 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부위였는데, 카짓타의 일권에 당한 이후론 욱신거림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검신을 감싸고 있는 오른 손목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마이너스 요소다.

- 발검의 묘리는 하체에 담겨 있어.

대사형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가르침에 있어선 매사 진지한 태도를 고수하던 사람이라서, 나 같은 놈도 최대한의 집중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 검을 뽑는 건 상체인데 이상한 말이지? 한데 그게 진실이야.

- 복근과 허리, 허벅지는 물론 발바닥까지……. 전신 근육을 하나가 된 것처럼 조정하며, 비틀어 뽑아낸다는 느낌을 견지해야 해. 근육은 물론이고 세포 하나까지, 같은 방위를 향하게 만드는 거야.

- 그것이 최속의 비밀이지. 물론 손의 역할도 중요해. 오른손으로는 뽑으며, 왼손으로는 밀어야 하니까.

- 아. 그러고 보니 막내는 왼손잡이였던가?

‘…….’

새삼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나의 무학에, 스승님 다음으로 많은 족적을 남긴 건 대사형이란 사실 말이다.

잠깐 잊었던 가르침이 어제 들은 것처럼 뚜렷이 떠오른다.

그때의 풍경, 공기의 냄새, 당시의 심정, 대사형의 소탈한 얼굴와 옅은 미소까지, 더없이 선명하게.

‘제대로 발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구만.’

검집도 없고, 손목은 박살 났고, 허벅지 근육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다.

내 꼬락서니가 한심해서 실실 웃음이 나왔지만,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실전이란 대부분 이렇다.

모든 전투, 심지어 목숨이 오가는 중요한 국면에서 만전을 바라는 건 오만이다.

후욱-.

사방을 잠식하던 지옥불이 꺼졌다.

시공간이 카짓타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모양새.

‘온다.’

같은 순간, 나도 호흡을 멈췄다.

얼마 없는 내공을 모조리 쥐어짬과 동시에, 전신 근육으로는 단 한 가지 동작만을 수행한다.

발도拔刀.

────.

소리 없이 음양도가 뽑혔다. 자색 불꽃이 번개처럼 튀었다. 꽈르릉, 하고- 실제로 천둥과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발도 때문에 난 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자연스레 뇌천보를 밟은 것이다.

푸화아악!

자취를 감췄던 자색 불꽃이 휘몰아친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카짓타가 보였다.

[…….]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녀석이었지만, 나는 이 순간 악마가 즐겁게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 아니라 진실일 것이다.

무인 간의 감정 교류란 때때로 수법의 교환으로 일어나기에. 아마 내가 둘째 사저 같은 맹인이었어도 확신했을 것이다.

퍼석-.

뒤이어 조금 맥없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타격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한계까지 쥐어짠 내력과 무리한 근육 사용으로 반동이 몰려왔다.

“…….”

내장까지 충격이 전해졌는지 목구멍에서 쇠맛이 느껴졌다.

억지로 삼킨 채 평정을 유지했다.

이 순간만큼은 못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한 자루 칼에 불꽃을 응축했군.]

“맞아.”

[이름이 있는가.]

카짓타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한 끝에 대꾸했다.

“발화拔火.”

[직관적이군. 잘 어울린다.]

콰직-.

뒤이어 카짓타의 전신 갑옷에 금이 가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진 묵빛 갑옷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불똥이 꼬리처럼 늘어진 파편의 향연은 꼭 불꽃놀이처럼 보였다.

갑옷은 봉인구였던 것일까.

카짓타의 지옥불은 일순 해방된 것처럼 하늘을 향해 용솟음치더니,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불씨가 함박눈처럼 떨어지며 지하 감옥을 은은하게 밝혔다.

“…….”

나는 일순 그 광경에 압도됐다.

나처럼 삭막한 놈도 순간 경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반딧불이처럼 내리다, 흩어지는 불씨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패배다, 루안 배드니커.]

“…….”

[아쉽군. 더 성장한 그대를, 본연의 힘으로 겨뤘다면 재밌었을 텐데…….]

나는 천천히 납검했다.

만나서. 겨뤘고. 가렸다.

그 결과 한쪽이 죽었다.

지극히 무인다운 전개고, 결말이었다.

아쉬움을 토로하는 카짓타의 목소리에선 역설적이게 만족이 느껴졌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만약 패한 쪽이 나였어도 카짓타와 똑같은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결국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포권을 취한 채로 말했다.

“…한 수, 크게 배웠다.”

이번 전투로 얻은 게 적지 않다.

목숨을 걸어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있다. 자색 불꽃이라는 성과와는 별개다.

지금 내게 부족한 걸 알게 됐고, 단순히 머리로 이해한 게 아닌 가슴 깊숙이 자문처럼 새겨졌다.

이러한 실감이야말로 마음가짐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확실한 개선으로 이어진다.

즉 카짓타는 정말로 무인이었다.

처음엔 믿지 않았고, 도중엔 긴가민가했으나,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짙은 여운에 잠겼을 때다.

[그대는…….]

사라지기 직전의 카짓타가 다소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의 주군을 이미 만났군. 네게서 그분의 기척이 느껴진다…….]

“핏빛 달의 마왕이라면 아직 안 만났는데?”

그러자 카짓타가 웃음을 흘렸다.

[나의 주인은 하덴아이하르가 아니다…….]

“뭐?”

[지옥불마저 포용할 수 있는… 흑해黑海의 등대이자… 심연 속 선고자……. 그리고 검은 늪의 주인…….]

“…….”

카짓타의 중얼거림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나의 유일무이한 주군… 아홉이시여……. 이면의 세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불충을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

이제 지하 감옥엔 카짓타의 전신을 감쌌던 갑옷만이 덩그러니 남은 채였다.

지옥불이 자취를 감춘 지하 감옥은, 본연의 서늘하고 쓸쓸한 정취를 되찾았다.

“…….”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늪의 마왕의 기척이 남아 있다고?’

어떻게?

그 마왕 놈과 만난 건 회귀 전 수련회에서였다.

이번 삶에서, 나는 아직 아홉과 대면한 적이 없을 텐데.

“윽…….”

생각을 잇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전신에서 격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단순히 내공의 고갈, 육체 피로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자색 불꽃의 부작용인가?

‘백화 때보다 훨씬 심한데.’

전신을 내달리는 탈력,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다.

지옥불의 여파 덕분일까.

바닥에 남은 열기가 기분 좋게 전신을 감싼다. 노곤하다. 이대로 조금만, 10분이라도 좋으니 눈을 붙이고 싶다.

“놀라워. 설마 군단장을 상대로 이길 줄이야.”

“…….”

내 바람을 낭랑한 목소리가 끊었다.

고개를 들 힘도 없어서 가만히 처박은 상태로 물었다.

“…올더슨 학장은?”

“물론 구했다.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

“그보다는 네가 문제야. 너, 곧 죽는 거 아닌가? 꼴이 말이 아닌데.”

큭큭, 레오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전신 화상에 오른 손목은 박살 났고, 허벅지 근육은 완전히 파열됐군. 내장 손상도 심한 듯하고… 무엇보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살랑이는 듯한 촉감이 느껴졌다.

일순 황당해졌다.

이 자식, 설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건가?

“예쁜 백금발이 엉망이 됐잖아. 맘 아파라.”

“…손 치우고. 나 진짜 뒤질 것 같은데, 혹시 뭐 포션 같은 거 없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싱글싱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던 레오네가 곧 두피를 콱 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 몸은 교인에겐 비교적 전능한 편이지.”

“……!”

콰가가각!

직후 레오네의 손바닥에서 에너지가 격류처럼 밀려 들어왔다.

상단전에 직접 기를 불어넣는 건 일반적으로 지극히 위험한 행위지만…….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레오네가 주입한 에너지는 자연스레 상단전으로 스며든 다음, 아무런 막힘도 없이 전신 세맥을 누볐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다음 순간 벌어졌다.

“……!”

육체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회복을 넘어선 재생이었다.

끔찍한 화상을 입었던 피부가 제 빛깔과 탄력을 되찾고, 바싹 마른 안구와 그을린 기도, 뒤집힌 내장이 수복됐다.

전신에 있던 크고 작은 타박상은 빠르게 사라졌고, 꺾였던 손목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정신적인 피로는 여전해서 눈꺼풀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반병신이 됐던 육체가 순식간에 멀쩡해졌다.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기적이었다.

레오네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효과가 탁월하군. 과연 제사장을 상대로는 약빨이 잘 들어.”

“방금 뭐라고?”

“효과가 탁월하다고 말했다.”

“그다음에.”

“제사장이 상대라 약빨이 잘 든다고.”

나는 잠깐 레오네와 시선을 마주쳤다.

“…제사장?”

“그래.”

“누가.”

“너.”

레오네는 말문이 막힌 나를 보며 말했다.

“참. 축하한다. 무채색의 제사장은 나도 처음 보는구나. 백 년 만의 제사장이 된 기분이 어떻지?”

“…….”

“루안 배드니커? 안색이 안 좋은데.”

…그러니까.

배드니커의 막내아들인 내가, 실은 암흑 교단의 제사장이라고?

혈전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

갑자기 들이닥친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고, 두뇌가 덜컥거렸다.

“…끄악.”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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