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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64화 (164/172)

164화

캄캄한 방 안.

페리스트 황녀가 문득 눈을 떴다.

“…….”

염색으로 가린 흑발과 달리, 의도적으로 드러낸 적색 눈동자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휘판을 지닌 짐승을 연상케 했다.

줄곧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고 있던 건 아니다.

황녀가 수면에 들지 않은 지도 제법 오래됐다. 그러면서도 정신은 항상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카짓타가 당할 줄은.”

툭 내뱉은 목소리엔 즐거운 기색이 아른거렸다. 희미하지만 천진난만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황녀가 품에 안은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예상대로야, 데스베리. 편입생들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고 말했었지? 확실히 이제부터 훨씬 재밌어질 것 같아.”

웃음을 흘리던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하더니, 활짝 열어젖혔다.

핏빛 달이 만든 조명이 방 내부를 비춘다. 방엔 인형이 가득했다.

종류도, 생김새도 제각각인 인형이 넓은 공간을 빈틈없이 채운 모습이었다.

휘오오-.

때마침 더운 바람이 불었다.

반투명한 커튼이 부드럽게 출렁이는 가운데, 황녀는 핏빛 달의 광채를 온몸으로 받으며 뒷걸음질 쳤다.

무용이라도 하듯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황녀는 정해진 장소에서, 부드럽게 뒤로 몸을 눕혔다.

포옥, 방을 가득 채운 인형이 쿠션 역할을 했다. 페리스트는 인형 사이에 파묻힌 채, 데스베리를 들었다.

그리고 불길한 역안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짓는다.

“루안 배드니커. 재밌는 녀석이야. …으응? 그가 마음에 든다고? 아하하. 나도 그렇단다.”

데스베리를 꼭 끌어안은 황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어.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 * *

연구 동 건물을 벗어난 직후…….

에반 헬빈은 문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카데미 장원을 질주했다.

내리쬐는 햇볕, 아직 조금 서늘한 바람, 새의 지저귐, 막 일어난 생도들-.

이제 막 떠오른 햇빛이 아카데미를 찬란하게 밝혔다. 평화로운 풍경.

그러나 에반의 얼굴은 그와 대조적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빚을 졌다.’

만약 그 자리에 남은 게 루안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황녀는 명백할 만큼 선명한 악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건 이 모든 사달을 벌인 주모자가 황녀라는 더없이 확실한 증거였다.

하덴아이하르의 추종자는 대체적으로 맛이 갔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깨어난 [악의 기억]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루나틱(Lunatic).’

하덴아이하르, 핏빛 달의 마왕은 광기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핏빛 달의 파벌을 [암살 교단]이라 부르는 자들까지 있었다.

파생 종교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별개로 핏빛 달의 제사장은 순순히 흑교주의 명령에 복종하지만… 다른 파벌과의 충돌은 잦다. 어느 시대라도 그랬다.

즉 소교주라는 신분을 밝혀도 보호받지 못한다. 아마 “아하. 그랬니?” 하고 살짝 놀란 다음, 그대로 죽이거나 생포하지 않을까.

그럼 상황은 지금보다 더 악화될 것이다.

소교주는 쓸 곳이 많기 때문이다.

앙신에게 공양해도 훌륭한 제물이 되고, 반쯤 시체 꼴로 만든 다음 악기만 뽑아내도 된다.

즉 그 자리에서 에반을 도망치게 만든 건 훌륭한 판단이었다.

루안 배드니커가 그런 점까지 고려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느낌이 안 좋아.’

물론, 이미 마왕이 강림한 것만으로 상황은 최악이지만…….

어쩐지 그것조차 어떤 거대한 재앙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문득 든 생각에 차게 식은 웃음이 나왔다.

마왕 강림이 고작 전조라?

그럼 이후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에반은 문득 달리는 걸 멈췄다.

아카데미 본관 앞이었다.

돌연 우두커니 선 에반을 생도들이 이상한 눈으로 흘긋 쳐다봤다.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마왕은 강림했고,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란 게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이대로 있다간 휘말려서 죽거나, 죽는 것보다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거다.

‘도망?’

에반은 진지하게 도주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봤다.

물론 학장의 인형이 있는 한 웬만한 방법으로 탈출은 불가능할 터다. 웬만해선 그 감시를 피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단, 탈출 시도라도 하고 보는 게 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

‘그게 맞지. 그냥 도망치자.’

내면의 목소리가 속삭인 순간…….

‘시끄러.’

에반 헬빈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딴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루안 배드니커에게 발각당하기 전, 소교주로 각성한 그 순간부터 말이다.

하지만 에반은 그러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떠나면, 이곳에 있는 생도들은?

재앙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그들 전부가 죽는 걸 내버려 두라고?

‘뭐 어때. 어차피 불신자 수백 명이 죽건, 수천 명이 죽건, 우리가 교리를 전파하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아.’

빈정거리는 목소리.

음험한 의지를 가진 듯한 [악의 기억]의 속삭임을 무시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지만, 사실 에반의 내면은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터무니없을 만큼 허무한 죽음 덕분에 [악의 기억]이 인격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했다.

암흑 교단의 교리를 인정하는 한편, 영웅을 선망하던 영도로서의 긍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소교주 에반과 영도 에반, 두 가지 정체성이 공존하는 형태가 됐다.

이중인격? 차라리 그게 나았겠지. 그랬다면 정서적으로는 훨씬 안정된 상태였을 테니.

다르다.

내면의 목소리조차 에반의 본심이었다.

‘그만.’

고개를 젓는다.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를, 이 이상 깊게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광증이 도져서 아예 정신이 부서질 수도 있다.

에반은 억지로 생각의 흐름을 바꿨다.

루안은 쉽게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정황상 그 녀석은 이미 이면 세계에 끌려갔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럼 이 이후엔 어떻게 될까?

황녀가 루안의 대역 인형을 내세울까?

‘그건 불가능하겠지.’

대역 인형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배드니커의 영도가 수련회에 오고 고작 몇 주, 인형을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오늘 내로 뭔가 일을 벌일 거야.’

어쨌든 황녀는 코앞에서 자신을 놓쳤으니까.

그렇다면 상황 공유가 우선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루안이 영도들에게 상황을 공유했던 것도 좋은 판단이 됐다.

지금쯤이면 머리 둔한 녀석들도 어느 정도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일단 황색관으로.’

에반이 다음 진로를 결정한 순간이다.

풀썩-.

돌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에반의 육체는 그 자리에 엎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본관 한가운데서 누군가 쓰러진다면 당연히 이목을 끌겠지만… 에반에게 관심을 가지는 생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한 증상은 에반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풀썩, 풀썩…….

에반 근처를 거닐던 생도와 교직원이 기면증 환자처럼 연속으로 쓰러졌다.

이곳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본관 내부의 교수들은 물론이고 열차 안에서 조잘조잘 떠들던 생도 무리, 늦잠 자다 막 눈을 뜬 학생, 금방 문을 연 상인과 그들의 자식까지-.

아카데미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다.

“…….”

“…….”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쨍쨍하게 내리비추는 태양.

평소라면 가장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시간대에, 아카데미는 유례없는 침묵에 잠겼다.

* * *

“아빠, 살려 줘요!”

벌떡 소리를 치며 일어난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라니. 염병, 내가 대체 뭔 개꿈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쩐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생각해 본다.

분명 겁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까무룩 기절했던 것 같은데.

“…….”

손에 쥐인 음양도를 보는 순간, 모든 게 떠올랐다.

“…내, 내가 제사장이라니.”

정신이 나간 전개에 다시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게 진짜 맞나 싶어, 따질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레오네가 보이지 않는다. 등 뒤엔 올더슨 학장만이 곧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레오네?”

낮은 목소리로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걸까? 떠올린 즉시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했던 녀석이니, 퇴장 또한 갑작스러워도 이상할 건 없다.

물론 나로선 난감할 노릇이다.

음양도의 갑작스러운 출현엔 분명 레오네의 안배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무채색의 마왕- 즉 대사형과 아는 사이라고 해도, 싸움 도중에 갑자기 음양도가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이다.

‘나를 제사장으로 만든 것도 레오네인가?’

아니면 지난번 만남 때, 대사형이 무슨 안배를 해둔 걸까.

아니. 혹시 모른다.

레오네가 농담을 한 걸 수도.

나는 조심스레 눈을 감으며 스스로의 육체 내부를 관측했지만, 곧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악기가 있네.’

내공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분명히 단전엔 소량의 악기가 모여 있었다.

‘이거 진짜 조졌는데.’

웬만한 일로 동요하지 않는 게 나란 놈이지만, 이번 사태에선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내가 기절한 사이 무슨 꿈을 꿨는지도 기억이 났다.

나는 꿈에서 철혈공을 만났다.

꿈속의 철혈공이 내게 검을 겨눈 채 말했다.

- 나의 핏줄에서 암흑 교단의 제사장이 나왔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군. 네겐 진정 실망했다.

- 아닙니다, 아버지. 전부 오해예요.

- 입 닥쳐라, 루안……. 아니. 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불쾌하구나. 닥치고 죽어라, 배드니커의 오점.

- 크악.

“…….”

문제는, 실제로 내 정체가 까발려지면 저런 일이 벌어질 확률이 아주, 정말, 명백히 높다는 것.

오히려 저렇게 편하게 죽여 주면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에인즈번 교수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철혈공은 교인이 아닌 내통자마저 쉽게 죽이지 않고, 가장 끔찍한 고통을 진득하게 안겨 줬다.

‘그런데 배드니커인 내가, 내통자도 아니고 제사장이란 걸 알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 조악한 머리로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아무튼 레오네를 다시 만나서, 대체 일이 어떻게 전개된 건지 따져야 하는데…….

“…응?”

그 순간, 나는 꽉 쥔 오른손에 무언가 쥐여 있단 걸 깨달았다.

손바닥을 펴보니 쪽지가 있었다.

[세티투스에서 보자.]

[추신. 인형 노릇은 이제 질렸어.]

세티투스?

분명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아.”

- 무채색의 마왕이 멸망시킨 나라는 [세티투스]란 이름의 왕국이었네.

- 오늘날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나라지만, 몇몇 문헌에선 [악惡의 제국]이라 기록되어 있기도 하더군.

올더슨 학장.

정확히 말하면 올더슨 학장의 인형이지만, 아무튼 그자와의 대담에서 들었다.

대사형이 멸망시킨 나라 말이다.

그곳으로 가면, 이 염병할 사태의 원인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건가.

“…….”

안 돼. 좋지 않다.

쓸데없는 정보가 너무 많은 상태다.

‘일단은 핏빛 달의 마왕부터 해결하고.’

나는 쪽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더슨 학장이 내 옆에 눕혀져 있었다.

죽은 건 아니고, 안색도 나쁘지 않다.

사슬이 묶여 있던 부위가 조금 부어올라 있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 같다.

가장 신기한 건 단검이 꽂혀 있었던 가슴 부위였는데, 단검은 사라진 데다 관통상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도구 같은 것이었을까?

마나 운용을 방해하는 도구가 있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내가 유심히 올더슨 학장을 관찰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거세게 뒤흔들린다.

‘뭔가 안 좋은데.’

뚜렷하지 않아서 더욱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나는 올더슨 학장을 업은 채로 지하 계단을 올라 1층에 도착했고…….

곧 창문 너머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저건 또 뭔-.”

건물 바깥을 배회하던 [어른 인형].

아린이 그리 칭했던 인형 무리가 괴성을 지르며 건물로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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