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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67화 (167/172)

167화

“재밌는 농담이었어, 루안 배드니커.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었다면 웃었을지도 모르겠군. 자네는 실력보다 눈치부터 기르는 게 좋아 보이는데.”

바터는 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딱히 말싸움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할 말은 해야겠다.

“헥토르 형님의 이탈을 허락해 주시죠.”

“그 얘기는 이미 끝났다. 안전한 곳을 찾을 여유도 없고.”

“그럼 생도들을 여기 내버려 두자는 겁니까? 이런 위험천만한 적지 한복판에?”

“그렇지는 않아. 우리가 막 벗어난 건물이 있다. 내부에 있는 인형 대부분을 처리했으니 다른 곳보단 훨씬 안전한 장소지. 그곳까진 데려다줄 생각이다.”

“…….”

아예 버리고 갈 생각은 아니었군.

상황을 고려하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감정을 우선하여 헥토르가 우긴 걸 수도 있겠다. 바터의 비아냥거림을 차치하면 말이다.

‘밉상인 놈.’

맞는 말을 해도 한 대 때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내 기준으로 이 바터란 놈이 그렇다.

“훨씬 안전한 곳이 있다면요?”

“무슨 뜻이지?”

나는 올더슨 학장과 대마법을 통해 안전을 확보한 거점에 대해 설명했다.

“…….”

이야기가 모두 끝나니 바터의 표정도 살짝 변했다.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확실히 안전한 장소가 생겼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지금 상태로 추적을 이어 가는 건 여러모로 무모해 보입니다. 우선 학장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재정비하시죠.”

“아니.”

그러나 바터는 고개를 저었다.

“꼭 황녀와 싸우지 않더라도 추적은 이어 가야 한다. 최소한 어디 머무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

“그럼 생도들은요?”

“작전을 바꾸겠다. 소수 정예로 황녀의 추적을 이어 가고, 나머지는 생도들을 학장님이 있는 건물까지 보호하며 안내하는 걸로. 그리고 추적을 이을 인원은 내가 선별하지.”

바터가 말했다.

“나와 헥토르, 그리고 마르코까지. 셋이서 상황을 보고 오겠다. 루안 배드니커, 너는 생도들을 맡아 줘야겠어.”

진짜, 더럽게 말이 안 통하네.

나는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헥토르 형님 대신 제가 합류하겠습니다.”

“자네가?”

“…….”

바터가 나를 빤히 보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푸른 눈동자를 보니, 잠깐 세렌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생겨 먹은 게 달라도 가족이긴 가족이구나 싶었다.

다른 녀석이 나와 헥토르를 봐도 이런 느낌을 받을까?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헥토르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하시죠, 바터 경. 루안이 저보다 훨씬 강합니다.”

헥토르가 나를 두둔한 순간, 바터의 부하들이 살짝 웅성거렸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헥토르다 보니, 지금 꺼낸 말이 다소 의외인 모양이었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것인가.”

“사실입니다, 단장님.”

그리고 의외의 인물까지 헥토르의 의견에 가세했다.

‘저놈은…….’

뭔가 싶었더니 살짝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코였다.

그러니까 술집 주인으로 위장한 채 글렌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던 남자, 짧은 전투를 통해 특무대란 게 파악된 사내 말이다.

“단장님, 루안 배드니커의 실력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일개 영도 수준이 아닙니다. 헥토르 배드니커가 빠져도 오히려 전력은 늘겠지요.”

“…음.”

특무대의 참모 격에 있는 녀석인 걸까?

바터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나나 헥토르의 말을 들었을 때와는 크게 다른 태도다.

“…좋다. 그렇게 하지.”

“오라버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때 세렌도 덤덤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바터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 세렌이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 가호를 아시지 않습니까. 핏빛이긴 해도 만월이 떠오른 밤입니다. 신체 컨디션이 평소보다 월등히 좋아요.”

바터가 머뭇거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알겠다. 그럼 이렇게 총 네 명-.”

“저, 저도……!”

살짝 떨어져 있던 글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바터 경!”

귀도 밝다.

일부러 황자를 비롯한 생도들의 귓전엔 안 들릴 만큼 작게 대화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바터의 표정이 여태까지 중 가장 굳었다.

“…황자 전하, 송구하오나 그 명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페리스트 누님을 추격하는 것이죠?”

“…….”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황가의 핏줄은 서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추적이 목적이라면 제가 필요할 거예요.”

내가 슬쩍 거들었다.

“허락하시죠. 저 녀석 짐짝은 안 될 겁니다.”

내 생각이지만, 글렌은 마르코보다 강할 수도 있다.

수행의 탑에서 보았던 순위도 그렇고, 여러모로 숨기는 게 많은 녀석이니까.

‘게다가 황가의 핏줄이라면 선천적으로 항마의 적성 또한 타고나니까.’

가호가 없어도 웬만한 가호 소유자보다 악기를 잘 버텨 줄 거다.

바터가 나를 흘기며 말했다.

“판단은 내 몫이다, 루안 배드니커. 선을 넘지 말도록.”

“충고해 드린 건데요. 조언일 수도 있고.”

“같은 말이잖나. 그리고 자네는 말이 너무 짧군. 배드니커의 예법 교육이 아주 훌륭했던 모양이야.”

“하핫.”

“칭찬이 아닐세.”

바터가 나를 살짝 노려보았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

세렌이 황당한 눈으로 나를 봤다. 제 오빠한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을 처음 본 듯한 표정이었다.

“후우…….”

바터가 결국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전하, 어떤 때라도 제 명에 따르셔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결국 황자의 동행으로 얻는 이점이 더 크다 생각한 모양이다.

나로서도 다행인 전개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글렌을 시야 안에 두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

글렌도 뭔가를 느낀 걸까?

살짝 나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 * *

헥토르와 생도 일행에게 돌아가는 길을 알려 준 다음, 우리는 곧바로 추적을 이어 갔다.

이렇게 보니 제법 기묘한 면면이 됐다.

가장 선두에 선 건 바터 굿스프링이었고, 그 뒤를 마르코가 뒤따른다.

후방을 경계하는 건 나와 세렌, 그 사이에 황자가 끼어 있는 형태였다.

딱 보면 알겠지만 글렌을 보호하는 진형이다.

아마 바터가 황자의 동행을 허락한 건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곁에 두는 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네.’

학장이 있는 곳이 훨씬 안전한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바터란 인간의 성미 자체가 그런 듯하다.

직접 두 눈으로 본 게 아니면 확신을 못 하는 부류. 사실 나도 비슷한 유형이라 마냥 욕하기 좀 그렇다.

어쨌든…….

건물 밖은 문자 그대로 인외마경이라, 우리는 바짝 긴장한 채로 움직였지만, 어째서일까.

“…이상하군.”

“예. 너무 한적합니다.”

바터가 중얼거렸고, 마르코가 동의했다.

저 말대로다.

일행과 헤어지고 약 한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악마와 한 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비교적 안전한 건물 안에서라도 이만큼 걸으면 봉제 인형과 두세 번은 부딪쳤을 텐데.

‘뭔가 쎄한데.’

그러다가 나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인형의 시선을 느꼈다.

눈치챈 건 나밖에 없는 듯하다.

나는 슬그머니 감각을 곤두세우며 곧 있을 전투를 준비했지만…….

[…….]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텅 빈 시선으로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 이쪽인 것 같습니다.”

황녀의 흔적을 놓치거나, 바터의 기억이 애매할 때마다 글렌이 끼어들어 길을 안내한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세렌이 말했다.

“왜 그래?”

“…네가 전에 말했지. 황녀와 황자, 둘 중 한 명이 수상쩍다고.”

아까의 경험도 있어서, 글렌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로 근처에 있는 세렌도 확실히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이다.

“그랬었지.”

“지금 상황을 보니 황녀가 주모자인 건 확실해졌어. 근데 그 점을 고려해도 석연찮은 부분이 좀 있어서 생각을 달리해 봤는데.”

“어떻게?”

나는 한층 어조를 낮췄다.

“둘 다 교인일 가능성은 없을까?”

“…….”

세렌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내 생각이 과한 걸 수도 있어. 그래도 일단 모든 걸 고려하자는 뜻이지.”

“…아니. 네 말이 맞아. 그 가능성을 깜박하고 있었군. 나도 일단 염두에 두겠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쳤을 때쯤이다.

바터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떤 건물 앞이었다.

“…….”

단언컨대 여태까지 본 건물 중 가장 낙후된 곳이었다.

건물이 아니라 폐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이면 세계 특유의 핏빛 조명과 어우러져 섬뜩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기는 다른 건물보다 작았다.

정확히 표현하면 현실 세계의 건물 정도의 크기랄까?

‘오히려 그래서 더 찝찝한데…….’

내가 그리 생각할 때, 바터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황녀가 이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황자 전하, 어떨는지요.”

글렌의 시선이 건물을 향했다.

“이 안으로 기척이 이어진 것 같기는 한데, 그 이상은 모르겠군요. 안으로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사이 나는 건물을 바라보며, 지금 위치를 떠올리고, 그걸 바뀐 이면 세계의 지형에 대입해 봤다.

금방 답이 나왔다.

“…연구동 13호?”

그러자 일동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바터가 물었다.

“무슨 뜻이지?”

“아카데미에 나돌았던 괴담이 있어요. 연구 동 건물은 총 12호까지 있는데, 특정한 시간대에 존재하지 않는 열세 번째 건물이 나타난다던데…….”

나는 멀찍이 떨어진 연구 동 건물을 하나씩 셌다.

“위치를 보니 이게 열세 번째 건물 같네요.”

“…….”

살짝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괜한 얘기를 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바터가 말했다.

“일단 안으로 가지.”

선두에 선 바터가 문을 연 직후였다.

“으아아아-!”

성대한 비명과 함께 검은 형체가 우리를 덮쳤다.

바터가 즉시 검을 뽑은 순간, 내가 급히 말했다.

“잠깐!”

나는 바터를 지나친 다음 날아오던 녀석을 받아냈다.

“컥.”

뭐가 이렇게 무거워?

날아오는 바위를 받아낸 것 같다. 육체 단련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다면 그대로 날아갔을 터.

흔치 않은 파란색 대가리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나를 보았다.

“그, 금발 배드니커?”

미르 자이언트다.

이 녀석도 끌려왔었나?

그런데 상태가 좋지 않다.

헝클어진 머리와 쫓기듯 가쁜 호흡,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습이다.

“진정해. 무슨 일이야?”

“여, 여긴 이상하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

“뭔 소리야?”

“저기 안에 괴물이……!”

동시에 저 멀리서도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엔 다수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은 물론이고 카리스, 샤를, 팜, 제로스에 카론까지 포함된 우리의 영도 일행이었다.

“당장 나가!”

막 건물에 발을 들인 우리를 보고, 가장 앞에 서 있던 카론이 외쳤다.

다른 녀석이면 몰라도 카론이 외친 것이다.

상황 판단력만큼은 영도 중에서 발군인 녀석, 나는 망설임 없이 들어왔던 문을 박차고 나섰다.

“바터 경! 위험합니다!”

바터는 아직도 내부를 보고 있었는데, 마르코가 큰소리로 주의를 주니 그제야 시선을 거뒀다.

쿵……! 쿵……! 쿵……!

내부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덩치가 산만 한 녀석이 복도를 짓밟듯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시커먼 복도의 어둠을 전신에 의복처럼 두른 녀석이라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척이나 두껍고, 길쭉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를이 나온 순간, 급하게 문을 닫았다.

그런데 바깥도 안전하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

직후 우리의 후방에서 수십, 어쩌면 그 이상이나 되는 인형 무리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이 숫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혼란에 빠진 영도들 사이에서, 나는 글렌을 주목했다.

“이렇게 많다니…….”

창백해진 얼굴은 연기일까, 아닐까.

애매한 상황에서 바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루안 배드니커, 자네가 말한 건물로 안내해 주게.”

나는 음양도를 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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