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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69화 (169/172)

169화

사실 이쯤 되면 남은 전개는 하나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가장 원초적인 방법.

야만적이지만, 그런 만큼 무엇보다 확실한 해결 방법.

스릉-.

“주둥이만큼의 실력을 갖췄을지 궁금하군.”

바터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나도 일단 진기를 끌어올렸다. 악마와 싸우면서도 최대한 아꼈던 내공이었지만…….

이놈을 상대하면서까지 그러긴 어려울 거다.

내내 무시하긴 했지만, 바터 굿스프링은 두말할 것도 없는 실력자라서 그렇다.

영도 중에서도 특히 뛰어났던 헥토르와 카론, 소교주 에반과 세렌까지……. 누구라도 바터가 상대라면 필패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제법 속을 잘 긁었는데도 그럭저럭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바터는 여기서 한번 확실히 밟아 둬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명령권자가 두 명인 건 반드시 피해야 할 상황이라 그렇다.

‘명령 체계의 혼선은 패망의 지름길이니.’

다행인 건 바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저 녀석 또한 나를 짓밟아야 할 상대로 인식하게 됐으니, 전투를 피하지 않을 터.

“이곳에서는 내가 결투를 허락하지 않겠네.”

그때 가만히 있던 올더슨 학장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으-.

이제는 내부가 많이 진정된 것일까.

올더슨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잔물결처럼 번지더니 공간을 장악했다.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헌앙하고 부드러운 기류에 자연스레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타오르던 투지에 찬물을 뿌린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진기를 거뒀고,

바터도 뽑았던 검을 살짝 늘어뜨렸다.

물론 일시적인 휴전인 건 나도 알고, 바터도 알 거다.

올더슨 학장이 없는 곳에서 붙자, 서로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학장도 그 사실을 깨달은 걸까.

우리를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별개로 자네들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도 이해함세. 이렇게 하지. 지금부터 열두 시간 이후에 겨루고, 이기는 쪽 의견에 따르기로.”

바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의견은 한시라도 빨리 13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만.”

“루안 영도의 의견에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단 건 자네도 이해했을 텐데? 스물네 시간. 결코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짧지만도 않네. 우선 휴식을 취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는 게 맞아.”

“…….”

“이곳까지의 복귀가 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네. 자네에게도 휴식은 필요해.”

올더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승부의 공증인은 내가 맡지. 물론 마나 운용은 금하겠네. 순수하게 무위만으로 겨루는 거야. 알겠는가?”

“…후우우.”

바터가 다소 긴 한숨을 내쉬더니, 납검했다. 그리고 힐끗 나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린다.

마르코를 위시한 부하들, 아마도 특무대의 일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대놓고 혀를 찼다.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좀 보게.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끝까지 듣지도 않고……. 쯧쯧. 난 결코 저렇게 크지 않을 테야.”

“자네도 작작 긁게.”

“그럴까요?”

나는 올더슨 학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올더슨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를 보고 있자니 작금의 절망적인 공기조차 흐릿하게 느껴지는군. 대체 어떻게 돼먹은 신경인가? 배드니커라 그런가?”

“글쎄요…….”

“아니. 헥토르 배드니커를 보면 그건 아니야. 그저 타고난 천성인가…….”

“승산이 있으니 좌절할 이유도 없지요. 할 만큼 해봤는데도 안 풀리면 그다음에나 욕할랍니다.”

“뭐라고?”

“신 이 개새끼…라거나.”

올더슨이 껄껄 웃었다.

“내가 종교인이 아님에 감사하게.”

“학장님이 신자셨다면 이런 말도 안 했겠죠.”

“생각해 보니 그렇군.”

웃음을 흘리던 올더슨이 말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머리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하네. 위급한 상황일수록 뜻대로 다룰 수가 없지.”

“…….”

“하나는 분명하네. 자네의 낙천적인 태도는 장차 모든 이들의 등불이 될 거야.”

나도 참 괴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놓고 욕하는 것보다 이렇게 좋게 봐주거나 칭찬하며, 멋대로 기대하는 말투가 더 부담됐다.

“…뭐 등불씩이나.”

“영도 일행이 자네를 어떻게 보는지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자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건, 이미 그들의 리더는 자네야.”

올더슨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좀 걸으세.”

할 말이 아직 남은 걸까.

나는 먼저 나아가기 시작한 올더슨의 뒤를 따랐다.

다소 굼뜬 걸음걸이였다.

나이 때문만은 아니고, 역시 몸 상태가 아직 완전히 정상은 아닌 듯했다.

부축이라도 해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올더슨은 고개를 저은 채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 갔다.

흐느끼고, 좌절하는 생도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을 무렵…….

올더슨이 말했다.

“작금의 사태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네.”

“…….”

“아카데미는… 배움의 터전이야. 우리는 교육을 위한 최고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네. 의도적으로 생도 간의 이념, 사상을 대립시켜 생산적인 언쟁을 유도하고, 그것을 양분 삼아 젊은이들이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길 바랐지.”

올더슨 학장의 괴짜적인 면만 봤다.

아카데미 내부에 수련의 탑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건축물을 쌓아 올려 그곳을 오르는 생도의 고통을 즐기고…….

백기사단을 동경한 끝에 전투 골렘 이백오십 대를 제작한 기행을 저지른 데다.

무엇보다 올더슨은 마법사였다.

원하는 바를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족속.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게 대마법사다.

마법사란 이들에게 현기를 느낀 적은 없다.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연륜을 느낀 적은 있었으나…….

깊게 알수록, 그들에겐 하나의 분야에 모든 걸 건 자들 특유의 광기만이 느껴졌다.

“가르침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 사상과 이념을 자유롭게 바꾸는 것. 진로에 대해 마음껏 고민하는 것. 이 모든 게 젊은이들의 특권일세. 그리고 우리 교수진에겐, 그들이 사회로 진출하기 전까지 안전히 지켜 줬어야 할 책임이 있었지.”

그래서 지금 올더슨이 보이는 일면은 뜻밖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노인에게서 대마법사가 아닌, 아카데미 학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았다.

이 노인이 왜 학장인지 처음으로 알게 된 것만 같았다.

잠깐 뒷머리를 긁적이며 할 말을 골랐지만… 나보다 수배는 산 노인을 위로할 만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주둥이 밖으로 나온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됐다.

“유감입니다.”

“아이들은 아직 모두 살아 있네. 황녀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영혼은 저당 잡힌 채 고통받고 있겠지.”

“…….”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구할 것일세.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네.”

올더슨 학장이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이 핏빛 세상은 나의 자줏빛이 몰아낼 것이야.”

자색紫色의 대마법사 올더슨 마르브어.

비록 기숙사 등급이지만, 자줏빛을 황가의 붉은색보다 높게 둔 자의 발언다웠다.

“자줏빛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가장 신비로운 색이지 않은가?”

올더슨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배드니커도 좋아하지.”

뭔 말인가 싶더니, 눈동자 색을 말하는 듯했다.

나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학장님은 제가 아는 마법사 중, 가장 정상이십니다.”

내 말에 멈칫하던 올더슨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모든 마법사가 아사드 님 같지는 않지. 그분은 대마법사 중에서도 특히 괴짜일세.”

“아. 그랬어요?”

“그렇지.”

나는 학장을 보며 말했다.

“안심하시지요, 학장님. 전 이곳에 새벽을 가져다주러 왔습니다.”

무신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어둑한 핏빛 하늘을 보았다.

“힘든 때일수록 태양은 반드시 떠야 하거든요.”

* * *

올더슨과 짤막한 대화를 끝낸 뒤…….

나는 적당한 방 하나를 잡은 다음 문을 닫은 채 운공했다.

억지로 으깬 영옥의 양기가 내부에서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우우…….”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그걸 안정시키고, 최대한 원활하게 흡수했다. 기분 좋은 열기가 전신을 내달리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학장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낙천적인 태도?’

그런가?

사실 낙천적인 것까진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다.

현재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것.

이게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도 후회할 일이란 생길 수밖에 없기 마련이고, 실제로 겪었다.

이제는 없던 과거가 된 수련회에서 말이다.

그러니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영산의 가호]가 발동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대단한 가호고, 삶에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분명 엄청난 일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어쩐지 짙은 허무함이 느껴졌다.

그간의 고민과 발버둥, 사람으로서의 노력이 전부 휴지 조각이 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너무 오만한 생각인가.’

불현듯 가문에서 나눴던 철혈공과의 대담이 떠올랐다.

- 사람이 사람인 채로 신神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그러려면… 기회가 여러 번 있어야겠지.

- 목숨이 여벌로 있다거나, 게임을 하듯 몇 번이고 재도전할 수 있다거나. 혹은… 가장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아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거나.

그 말대로다.

마왕이란 불합리한 존재를 상대하려면, 나 또한 이 정도 불합리는 갖춰야 할 것이다.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공을 마친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아직 바터와의 대결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상태.

찌뿌둥한 몸이라도 풀까 싶어서 문을 열고 나갔는데…….

툭.

누군가의 정수리가 내 명치쯤에 닿았다.

“응?”

뭔가 싶어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파란색 대가리가 보였다.

“여기 있었군!”

미르 자이언트였다.

“나한테 볼일이라도?”

“그렇다!”

“뭔데.”

“공격대에서 나를 빼라!”

“왜.”

내가 빤히 바라보며 물으니, 미르가 살짝 움찔하며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나,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 많지 않나!”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예를 들면?”

“그, 그 금발 기사라거나… 네 형이라거나…….”

“틀렸어.”

“뭐, 뭐?”

“그 둘보다 네가 더 강해.”

그러자 미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냐?”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야.’

수련회에서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낸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커다란 걸 보고 위축되는 건 고쳤지만, 아직 내면의 자존감까지 완전히 충족시킨 건 아닌 걸까.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이 꼬맹이는 스스로의 진가를 털끝만큼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 잘됐네. 따라와.”

“어? 으겍.”

나는 미르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넓은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1층에 있는 식당까지 오게 됐는데…….

당연하지만 아직도 난장판이었다.

치울 만한 녀석이 없었을 테니 이해한다.

덜컹!

나는 쓰러진 탁자를 발로 차거나 집어 던지며 구석진 곳으로 몰아넣으며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아직도 멍청히 서 있는 미르를 보며 물었다.

“몸 좀 풀래? 아니면 바로 시작할까.”

“뭐, 뭘 말이냐?”

“당연히 싸움이지.”

“갑자기?”

“원래 대부분의 싸움은 예고 없이 시작돼.”

돼, 라고 말을 마치며 의자를 집어 던졌다.미르가 깜짝 놀라더니 정면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우지끈!

‘와우.’

나무 의자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박살 났다.

“뭐 하는 짓이냐!”

나는 무시한 채 미르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뻗었다.

적당히 내공을 불어넣은 주먹에 화기가 깃들더니, 옅은 불꽃이 치솟았다.

미르가 이를 악물더니 마주 손을 뻗었다.

꽈과과광!

다섯 번의 주먹이 모두 가로막혔다. 맞닿은 주먹이 뻐근했다.

피와 살로 이뤄진 육체가 아닌, 철근을 후려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당연하다.

단순 육체 능력만큼은 일곱 종족 중에서 최강最剛인 거인족이다.

마나를 쓰지 않고 겨룬다면 반드시 거인족에서 최강자가 나올 터였다.

거기에 미르는 전설 속의 거인, 이미르의 핏줄을 이은 존재다.

격으로 치면 흑요정 쿠세트의 후예인 배드니커와 동격이란 뜻.

“크으윽…….”

그러나 내가 공세를 이어갈수록, 미르의 대응이 점차 소극적으로 변하더니 어느 순간 주춤거리며 뒷걸음질만 쳤다.

굴강한 육체 덕분에 상처는 없었지만…….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다.

“왜 그리 겁먹은 건데?”

“뭐……?”

“너는 최강의 창과 갑옷을 타고났어.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냐?”

이 녀석에겐 회피도, 방어도 필요 없다.

그런 만큼 신경의 대부분을 공세에 쏟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인데…….

당장 미르가 스스로의 육체를 도외시한 채 내게 달려든다면, 나도 어느 정도 진심을 내야 할 정도다.

“나, 나는…….”

미르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물러섰다.

괜히 재촉한 걸까?

공세가 더욱 소극적으로 변했다.

[화력을 올리게.]

그 순간 무신이 조언했다.

‘그래도 될까요?’

[그래야만 해. 알을 부수는 건 저 아해의 몫이지만, 누구든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지.]

‘…줄탁동기啐啄同機라.’

무신의 말대로다.

알을 깨는 건 새끼의 몫이지만, 어미도 알을 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

화르륵!

불길이 치솟는다.

카짓타와의 대전으로 한층 뜨거워진 내 불꽃은, 이제 크게 세 단계로 나뉘게 됐다.

적염과 청염, 자염.

당연하지만 색이 변할 때마다 온도도 점점 오른다.

“으으, 으으윽…….”

적염에서 청염으로 바뀐 순간…….

미르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뿌드득, 작은 이빨에서 거친 소리가 울리더니 미르의 눈동자에 새파란 귀기가 흘렀다.

“으아아아아아아-!”

“……!”

귓전을 찢을 듯한 포효였다.

이런 조막만 한 녀석이 아닌, 언덕만 한 괴물의 폐부에서나 들릴 법한 그런 폭음 말이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 유리가 박살 나며, 미르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냉기가 분출됐다.

푸화아아악!

나는 갑작스럽게 눈보라를 맞이한 사람처럼 몸을 움츠리며, 청염을 전신으로 둘렀다.

강기는 아니지만, 냉기가 육체 내부로 침입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피부 한 꺼풀 너머에서 냉기와 열기가 충돌하며, 수증기가 안개처럼 발생했다.

꽈아앙!

그 속에서 작은 포탄이 날아와 내게 꽂혔다.

양팔을 교차해서 충격을 덜었지만, 내 육체는 순식간에 식당 끝까지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다.

미르의 주먹이었다.

‘……?’

팔에 느껴지는 시린 고통, 제법 날카로운 얼음이 서려 있었는데….

순간, 내게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일순 얼음과 불꽃이 휘감긴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신기한 감촉이다.

불과 얼음. 세상에서 가장 양립하기 어려운 원소일 텐데.

[지금의 느낌을 기억하게.]

‘네?’

무신의 목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사라졌다. 또 이 양반의 고질병이 발동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척 한마디 남기고 사라져 버리기.

“허억, 헉… 이, 이건…….”

그사이 미르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리거인의 힘이겠지. 선조의 힘을 일깨운 거야. 축하한다.”

“아…….”

“순수 육체 능력만 따지면 네가 최강인데, 이젠 특수한 능력까지 생겼구만. 이거 든든한데.”

나는 무릎을 구부리며, 작은 거인과 시선을 맞췄다.

“13호 건물, 마왕의 영역에선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 어쩌면 가호나 마나가 봉인당할 수도 있겠지. 그런 순간이 오면 결국 믿을 건 단련한 육체뿐이야.”

“…….”

“알겠냐? 필요한 거니까 넣은 거라고.”

“하지만, 난 이렇게 작은데…….”

“작다는 게 약하다는 건 아니잖아. 하나만 묻자. 넌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왜 지원했지?”

“…나는.”

미르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스스로가 한심해서, 바뀌고 싶어서, 그리고 영웅이 되기 위해서 왔다.”

“그래. 지금 상황을 봐라. 학장은 다쳤고, 특무대란 놈들은 뭔 생각인지 모르겠고, 생도들은 죄다 죽상을 하고 있어. 전례가 없던 위기 상황, 영웅이 비상하기 안성맞춤인 순간 같지 않냐?”

“…….”

“힘을 빌려줘. 네가 필요해.”

미르가 잠깐 망설이다가 멍하니 나를 보았다.

“…알겠다.”

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푸른 눈동자 안에선 나의 청염과 비슷한 무언가가 타오르는 듯했다.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러냐.”

“그래! 신기한 기분이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르가 나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네가 날 일깨웠다, 루안 배드니커! 내게 가르침을 줬다!”

“뭔 가르침까지야. 살짝 도움을 준 거지.”

“혹시 사부라고 불러도 되겠나?”

“아니.”

“사부.”

“아니라고.”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미르는 들리지 않는 건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며 외쳤다.

“사부……!”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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