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70화 (170/172)

170화

들러붙는 미르를 간신히 떼어 내며 옥상으로 향한다.

그러면서 직전 열기와 냉기가 휘감겼을 때 느낀 감촉을 떠올려 봤다.

생전 처음 겪는 생소한 느낌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음양도 덕분인가?’

무릇 신병, 신물, 신기라 불리는 무구의 공통점은 단순히 무기의 기능 이상을 수행한다는 것에 있다.

대사형이 가진 세 개의 무기 전부가 그랬다.

음양도가 가진 진합일의 이치는, 단순히 무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소유자에게까지 그 영향을 끼치는 것.

쉽게 말해서 음양도를 단지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상반된 기운을 조화롭게 다스릴 수 있는 감각을 터득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다.

극양과 극음.

열기와 냉기.

불과 얼음.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힘이 잠시나마 합일한 건, 음양도에 영향을 받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두 가지 기운을 다스렸기 때문일 터.

‘이것도 단서인가?’

염화제일공의 삼 단계에 이르는 길은 자색 불꽃을 완전히 터득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원래 무공의 경지란 것이 이렇다.

정상으로 향하는 산로山路가 하나가 아닌 것처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아쉽구만.’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다음 단계로 향하는 단서가 잡힐 때마다 살짝 짜증이 났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조금만 더 멀쩡했다면, 상념이 떠오른 순간 곧바로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수련에 집중했을 텐데.

폐관 수련이라는 단어가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닌 것이다.

별개로, 속세와의 연을 끊는 것도 맨정신으론 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문득 백노광에 대한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스승님은 대체 어떤 삶을 겪은 걸까.’

회귀한 이후에 종종 떠올리게 되는 생각이다.

내가 아는 가장 강한 무인.

문자 그대로 무의 신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영산이란 동떨어진 세상에서 홀로 은거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그것도 다른 세상에서 제자를 거둬들이는 수고까지 들이면서 말이다.

‘자신의 대적자를 직접 키우기 위해?’

스승님의 괴짜 성향을 감안하면 이게 가장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글쎄.

어쩐지 지금의 나로선 백날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봤자 알 수 없는 이유가 숨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쓸데없이 긴 복도 때문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구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거둬 냈다.

바터와 싸우는 장소는 옥상이다.

당연하지만, 이 건물에서 가장 넓은 장소라 그렇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다는 건 부차적인 이유고.

그런데 옥상으로 가는 계단 앞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황자 글렌 스칼렛이었다.

“…….”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지금 시점에서 맞부딪치니 다소 어색한 녀석이었다.

일단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과 별개로, 나는 이 녀석에게 큰 유감이 없다.

여러 부분에서 한심한 녀석이긴 했지만, 내 나름대로 세운 기준에서 벗어난 놈은 아니라서 그렇다.

나도 사람이니만큼 주관적이고 편향된 시야로 사람을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 판단 기준에서, 글렌 스칼렛은 딱히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럼 내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

바로 과거의 루안 배드니커보다 더 한심한가, 아닌가다.

“루안.”

글렌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내 평탄한 어조에 살짝 당황한 걸까.

흠칫하던 글렌이 모자를 푹 눌러쓰더니 말했다.

“미안해.”

“뭐가.”

“네가 그때 했던 말을 계속 생각했어. 처음엔 화도 났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냐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

“이 건물에 있는 생도들을 네가 전부 구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학장님도 말씀하셨지. 비명을 듣는 순간, 우리를 구하기 위해 곧바로 몸을 날렸다고. 그리고 넌 그 과정에서 네 성을 밝히지도 않았어. 배드니커가 아닌 오롯이 루안으로서 그들을 구하고, 존중받게 됐다고.”

말을 하던 도중, 웅크리고 있던 고개와 좁혀졌던 어깨가 조금씩 펴졌다.

이윽고 글렌이 나를 똑바로 봤다.

“내게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이었던 거야.”

“…….”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차마 이렇게 물을 수는 없었다.

‘내가 뭐라 했더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금방 잊는 성격이라 그렇다.

어쨌든, 나도 눈치는 있는 놈이라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그 바터 경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네 뜻을 관철-.”

“아, 됐어. 됐어.”

나는 손을 내저으며 글렌의 말을 끊었다.

“뭐, 뭐가?”

“사과도 됐고, 감상도 됐다고. 너한테 딱히 악감정 같은 건 없어. 술집에서 있었던 일은 그냥 투닥거림 정도로 치자고.”

“그, 그래.”

“할 말은 그게 다야?”

내가 물으니 글렌이 머뭇거렸다.

역시나 단순히 사과를 위해 온 건 아닌 듯하다.

“페리스트 누님과 큰 친분은 없어.”

“응?”

“황족에겐 저마다 의지하는 사람이 한 명씩 있어. 지옥 같은 삶이라도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버틸 수가 있지. 삶의 등불 같은 사람이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도 되지만, 어쩐지 글렌의 표정이 절박해 보여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호응하듯 물었다.

“전에 보고 싶다고 말한 누님이란 사람이 네 등불이었나?”

글렌이 살짝 웃었다.

이 녀석을 알게 되고 본 가장 솔직한 표정이었다.

“맞아. 누구보다 자상하던 분이셨어. 나 말고도 모두 누님을 좋아했지만, 누님은 황족의 혈통이 강하게 발현하지 못했지. 그래서 처분당하셨고. 그러니까 내 말은…….”

글렌이 입을 닫았다.

선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가운데,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단 한 가지는 알겠다.

이 녀석이 머릿속 단어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내 앞에 섰다는 것 말이다.

“페리스트 누님에겐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

“음.”

“그게 면죄부란 게 아니야. 누님의 행동은 잘못됐고, 도무지 일탈이라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휩쓸렸어.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겠지. 그러니 내가 이 말을 네게 하려는 이유는… 뭐라고 해야 할까. 네가 그걸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는 싫지만.”

글렌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가끔씩 이러한 예감이 들 때가 있어. 황족으로서의 직감이랄까.”

말을 마친 글렌이 한숨을 크게 토해 냈고…….

그제야 이 녀석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어느 정도 떠올랐다.

“있잖아. 글렌, 너 말이야.”

그리고 나는 평소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 * *

옥상에 발을 디딘 순간, 강풍이 나를 반겼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도 바람은 부는 모양이었다.

“…….”

탁 트인 옥상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상대인 바터는 물론이고, 올더슨 학장과 영도 녀석들도 죄다 있다.

끝 쪽에 서 있는 바터 옆엔 마르코를 비롯한 특무대 녀석들도 보였다.

“형님!”

심지어 나비까지 있었다.

이면 세계에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언제 합류한 걸까?

아무튼 제법 실력을 갖춘 데다 가호도 받은 녀석이니 살아 있는 게 뜻밖은 아니다.

코앞까지 온 나비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대,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뭘?”

“바터 형님과 결투하신다면서요……!”

“그렇지?”

“아시겠지만 바터 형님은 특무대의 단장입니다! 루, 루안 형님이 강한 건 알지만 영도 수준으론…….”

뒤이어 지금이라면 자신이 무마할 수 있다느니, 세렌을 생각하라느니,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나비의 얼굴을 치우며 걸었다.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영도 녀석들의 표정도 그제야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루안 녀석. 괜찮을까?”

“괜찮을 리가 없지. 상대는 굿스프링의 장남이라고. 게다가 특무대 소속이라잖아.”

“나이만 봐도 바터 경이 열 살은 많아요. 재능으로 채우기 힘든 간극인데…….”

“…형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뜻밖에도 죄다 걱정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카론과 헥토르, 세렌까지 말이다.

“저놈인가? 주제도 모르고 단장님과의 승부를 제안한 배드니커의 핏줄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군. 히이로 배드니커조차 단장님과 승부를 가리지 못했는데…….”

“…배드니커의 막냇자식이라면 그 철혈공조차 버렸다는 무능아잖나. 이상한 일은 아니군.”

바터 뒤에 있던 특무대 놈들은 대놓고 수군거렸다.

그나마 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건 올더슨 학장과 에반 헬빈,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미르 자이언트 정도?

‘아.’

실은 이게 당연한 반응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지금 시점에서 루안 배드니커는 아직 한심함의 표본 같은 애송이라 그렇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이기는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녀석들에겐 내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위급한 상황.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했을 때, 망설임 없이 내 명령을 따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뇌천보를 밟았다.

쿠릉!

“……!”

발소리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집어삼켰다.

첫 발자국, 발바닥에 감겨 있던 진기의 기파가 지면을 타고 번졌다.

쿠르르……!

그러자 먹구름 속 천둥을 연상케 하는 진동음이 사방을 울렸다. 일순 건물 전체가 떨리는 듯했다.

내가 창안한 무공.

루안 배드니커만의 독문무공.

“…….”

“…….”

단지 세 발자국 내디뎠을 뿐인데, 주변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저 걸음걸이는 대체?”

“거칠고 패도적인 마나 운용이었다. 나도 모르게 방어 태세를 세울 만큼…….”

“…루안 배드니커의 나이가 몇이랬지?”

“배드니커는 저런 인재를 여태껏 숨기고 있었던 건가.”

특무대 놈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도 눈에 들어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내 상대를 바라봤다.

바터의 손엔 제법 큰 방패가 들려 있었다. 잘 세우면 상반신 정도는 완전히 가릴 수 있는 크기였다.

“결투 형식을 제안하고 싶은데.”

바터는 내 갑작스러운 반말질에도 놀라지 않았다.

내 뇌천보를 본 순간 표정이 살짝 굳은 게 전부였다. 일단 얕보는 기색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말해라.”

“일합으로 끝내자고. 보아하니 방어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내 일권을 막아 낸다면 패배를 인정하지.”

바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게 너무 유리한 조건 같은데.”

“꼭 그렇진 않아.”

힘을 모을 시간이 있다는 건, 백일식의 구사자인 내게 크나큰 이점이다.

바터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굳이 그 형식을 제안한 이유는?”

“피차 마나를 아껴야 하잖아. 제대로 싸우면 서로 어떻게 될지 몰라. 감정이 격해져서 한쪽이 크게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황녀와는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

아마 뇌천보를 밟기 전이라면 이 말에 비웃음을 터뜨렸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를 노려보던 바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꽈앙……!

바터가 방패를 지면에 꽂아 넣은 다음, 마치 엄폐물 뒤에 숨은 것처럼 몸을 붙였다.

우웅, 단단한 육체에 가호가 몇 개씩이나 중첩되는 게 느껴졌다.

“철벽의 가호……!”

“단장님이 저렇게까지 준비하시다니…….”

“신성의 방패를 완전히 활성화하셨다. 설령 거인족의 주먹이라도 쉽게 튕겨 낼 수 있을 것…….”

“…….”

그사이, 나도 자세를 취한 다음 집중했다. 구경꾼들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진다.

심신의 가열.

심장 속에 피어난 작은 불씨를 키운다는 느낌으로, 전신의 열기를 끌어모은다.

‘바터 굿스프링.’

히이로 배드니커와 비견되는 굿스프링 가문의 초천재.

그 정도의 상대가 최선을 다해 내게 맞선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 또한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공격하는 건 실례다.

전력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은 다할 것이다.

그그극…….

근육을 조였다. 세맥의 순환 속도를 인위적으로 가속시켰다. 꽉 쥔 주먹은 철근처럼 고정했고, 그 위에 덧칠하듯 내공을 씌웠다.

그사이 전신 온도는 딱 이상적인 수준까지 올랐다.

“하아아…….”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굳건하게 세워진 방패, 그 너머에 있는 바터를 보았다.

내가 펼칠 무공은 백일식의 제일초식인 작열이지만.

여기에 최근에 깨달은 발경의 핵심과 둘째 사저가 즐겨 쓰던 내가중수법의 묘리까지 더할 생각이다.

성공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면 방패의 강도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터다.

스으으-.

호흡을 크게 들이마신 직후, 그대로 내달린다.

자연스레 뇌천보를 밟는 발바닥에서부터, 일순간 짜릿한 기운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등장한 뇌기雷氣가 종아리, 허벅지를 타고 주먹에 휘감겼다.

‘또 합일인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내 독자적인 해석 안에서 불과 번개의 이미지는 대단히 흡사했고…….

뇌기 앞에서 금속 방패 따위는 장애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장박동 소리가 귓전을 쿵쿵 울렸다.

바짝 조인 육체가 복잡한 진기의 흐름을 버텨 냈다.

그리고 내뻗은 일권이 방패에 닿았다.

제일초식 작열.

파아아아앙!

“…….”

“…….”

“…뭐야?”

누군가 허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패는 멀쩡했고, 그 뒤에 서 있던 바터도 다친 곳이 없었다.

내가 의도한 대로 말이다.

“…….”

바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패를 세운 채 석상처럼 굳어서, 부릅뜬 눈으로 나를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상을 입히지는 않았지만…….

전신에 침투한 내 내공의 잔흔을 확실히 느끼고 있을 터.

허락하지 않은 마나가 육체 내부로 침입한 감촉은, 피부 아래에 벌레가 파고드는 것처럼 불쾌할 것이다.

동시에 깨달았을 거다.

내가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방금 일권으로 자신의 내부를 갈가리 찢을 수 있었단 걸.

‘아니지.’

모를 수도 있으려나?

세맥은 물론이고, 전신 근육까지 활용한 내공 운용과 악마 군단장과의 싸움에서 깨달은 발경의 핵심, 둘째 사저가 즐겨 쓰던 내가중수법의 묘리와 갑작스레 합쳐진 뇌기, 그 속에 섞인 한 줌의 배려까지…….

일권에 담긴 의미가 지나칠 만큼 많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바터는 어디까지 느꼈을까?

“바터 굿스프링.”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단순하게 물어보았다.

“…알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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