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사실 지금부터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바터에게 달렸다.
바터가 만약 발끈해서 달려들면, 나도 이 녀석을 반쯤 죽여 놓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이유는 둘일 것이다.
사명보다 자존심을 우선하는 녀석이라면 분기를 참지 못한 채 달려드는 것이고…….
그렇단 건 내가 내지른 일권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기대보다 훨씬 더 한심한 녀석이란 뜻이다.
내게 재밌는 결과는 아니다.
형편없는 안목과 달리, 바터의 실력은 뛰어난 게 맞으니까. 이놈이 죽자 살자 달려들면 나도 힘을 꽤 뺄 수밖에 없단 뜻이다.
물론 그런 격전이 펼쳐지면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
작은 파국으로 치닫는 꼴이랄까…….
“…….”
바터가 두 눈을 감았다.
살짝 감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입술이 열렸다.
“…내가 졌다.”
가만히 있던 자들이 깜짝 놀라서 바터를 보았다.
“다, 단장님?”
“그게 무슨…….”
바터는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나를 지나쳤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특무대가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오…….’
내 예상보다 훨씬 깔끔한 인정이었다.
아예 난리를 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승복하지 못한 채 다른 형식의 결투를 제안하는 거라 예상했는데.
나는 부쩍 조용해진 옥상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지명한 녀석들, 바로 준비해. 10분 후에 바로 출발할 거니까.”
* * *
후다닥 영도 놈들이 떠난 다음, 옥상엔 나와 학장 둘만이 남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녀가 약속을 지킬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음.”
“열두 시간 뒤에 공세를 시작한다고 했지만, 무슨 계약서에 서명한 것도 아니고 그깟 것쯤이야 얼마든지 깰 수 있겠죠. 말하는 걸 보니 정신도 오락가락한 것 같던데.”
“무슨 말인지 알겠네. 자네들이 떠난 이후부턴 수성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할 생각이야.”
올더슨이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바터의 적성도 수비에 더욱 적합하지.”
“그래 보이더군요. 그건 그렇고 기갑병 이백오십 대를 상대로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악마보다 그놈들이 더 걱정이지 않을까 싶은데.”
올더슨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솔직히 말하면 백기사단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면 10분을 버티기도 힘들 것일세.”
“…….”
“최대한 버티며 백기사간의 기동을 정지하기 위한 마나 조작도 병행할 생각이지만… 확률은 잘 쳐봤자 절반 정도일 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일단 기갑병에 대한 건 일단 제쳐 두시죠.”
“뭔가 방법이 있는 것인가?”
“비장의 수단이라서 지금 밝히는 건 좀 그렇습니다. 일단 제 나름대로의 대비를 해두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기갑병이 모두 망가질 수도 있어요.”
허허 웃음을 터뜨린 올더슨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마왕이 본신의 힘을 지닌 채 강림하지 않는 이상 무리일세.”
“…뭐. 일단은 계획대로 진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길은 열두 시간 이내로 황녀를 쓰러뜨리는 것일 테니까요.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황녀를 쓰러뜨려야만 마왕이 등장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는 하늘에 뜬 붉은 달에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학장님 말씀에 따르면 이미 마왕은 등장한 상태가 아닙니까?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리 내가 경험이 풍부해도 달을 상대로 싸워 본 적은 없다.
애초에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어떻게 공격한다는 걸까? 그대로 지면에 충돌이라도 하면 일대 재앙일 텐데.
“나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네. 하지만 황녀를 쓰러뜨리면 우리는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터. 이 이면 세계를 만든 건 분명 주모자인 황녀일 테니 자연스레 그리 될 걸세. 그렇게만 되면 내가 제국에 있는 나머지 세 명의 대마법사에게 즉시 호출을 보낼 수 있네. 그들의 마법이라면 1분 내로 카르텔 아카데미까지 당도할 터.”
“아하.”
확실히 멀쩡한 대마법사 세 명이라면, 어설프게 소환된 마왕 따위 적수가 아닐 것이다.
“건투를 빌겠네. 식상한 말이 되겠지만… 자네에게 우리의 명운이 달렸어.”
“학장님은 계속 옥상에 머무실 겁니까?”
“일단은 그럴 생각이네.”
확실히 사방이 탁 트인 곳이라 망루 역할을 하기엔 제격이었다.
“생도 한 명을 보내겠습니다. 보좌 역할로요.”
“추천할 만한 친구가 있나?”
“네.”
“그럼 부탁하겠네.”
나는 올더슨과 짤막하게 인사한 다음 밑층으로 내려갔고, 곧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생도들 사이에서 찾고 있던 얼굴을 발견했다.
“아린 선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어? 아니, 네?”
“왜 또 존댓말이야.”
아린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아, 음. 그, 그래. 편하게 말해도 된댔지…….”
“그보다 선배, 마법 학부 맞지? 지금부턴 선배가 학장님을 보좌해 주면 좋겠는데.”
“으음……. 나 같은 게 보좌를 하면 방해만 되지 않을까.”
“괜찮아. 무슨 연산 보조나 술식 보강 같은 역할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그냥 거동이 힘드실 때 부축 정도 해드려. 그리고 또…….”
나는 아린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과 물건을 전달했다.
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비장의 카드.”
“……?”
“이제 다 틀렸다 싶을 때 하늘로 던져.”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 알았어.”
좋아.
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대비했고…….
이제 공격대가 출발할 시간이다.
* * *
카론과 에반, 세렌, 미르까지…….
당연하지만, 이 멤버를 완전히 실력순으로 뽑은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당연히 바터와 헥토르를 포함하는 게 맞다.
특무대 중에서도 기초 전투력과 작전 수행 능력, 실전 경험을 고려하면 이 녀석들 이상으로 활약할 인재가 있었을 터다.
그런데도 내가 이 멤버를 최적의 선별이라 자평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개개인의 퍼포먼스가 아닌, 협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이 네 놈의 사이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건 이 루안 배드니커라는 톱니바퀴가 없을 때 얘기.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 네 녀석을 제대로 컨트롤해서, 최고의 효율을 끌어낼 자신 말이다.
“진짜로 공격하지 않는군.”
12호 건물을 나선 지 삼십 분.
카론이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가장 전방에 선 채, 독수리처럼 눈동자를 번뜩이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인형이 아예 안 보이나?”
“좀 떨어진 곳에 있긴 합니다만, 우리에게 관심은 없어 보입니다.”
카론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실전에 돌입한 카론은 꼭 날이 선 야생 동물 같았다. 개인적으로 형님이라고 주접을 떨 때보다 지금이 훨씬 듬직하다.
“…묘하게 꺼림칙한데.”
에반이 중얼거렸다.
“뭐가?”
“어쩐지 사지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아. 뻔한 함정에 발을 들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달까.”
“생각하기 나름이지. 적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른 꿍꿍이를 품지 않을 거야. 그냥 우리가 함정에 빠지는 순간을 기다리겠지.”
“그럼 안 좋은 거 아니야?”
“맞아.”
나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인형 놈들이 조용하다고 해도, 갑자기 달려들 확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척까지 접근했다간 무슨 돌발 행동을 벌일지 모르기에, 인형이 떡하니 길을 막고 서 있으면 조금 돌아가는 모양새가 되기는 했다.
그때마다 실수를 저지르는 녀석이 있었는데.
우직-.
“……!”
미르였다.
마른 나뭇가지를 성대하게 밟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사방이 조용하던 터라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카론이 차게 식은 시선을 보낸 순간, 미르가 찔끔거렸다.
“미, 미안……!”
크르……?
거의 외침에 가까운 사죄에 비교적 근처에 있던 인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즉시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전투를 대비했지만…….
“…….”
인형은 희멀건 눈동자로 우리를 눈에 담더니, 그대로 비척비척 떠났다.
인형이 제법 멀리 떨어졌을 때쯤, 미르가 울상이 된 얼굴로 다시 사과했다.
“미, 미안하다…….”
“미안한 행동을 왜 하는지 모르겠군.”
카론이 퉁명스레 핀잔을 줬다.
미르가 움찔하더니 더욱 고개를 숙였다. 수치심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이 가여웠던 걸까.
에반이 나섰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미르는 거인족이잖아. 웬만한 거인족에게 몰래 움직일 걸 제안했으면 도끼에 머리가 찍혔을걸. 미르는 거인치고는 상당히 융통성이 있는 편이라고.”
“그래서 뭐 어쩌란 거지?”
“어?”
“말해 두는데, 에반 헬빈. 나는 네 선별에도 불만을 갖고 있다. 차라리 헥토르 배드니커가 나았어.”
“…….”
카론의 스산한 눈빛이 에반을 노려봤다. 에반도 미소를 거둔 채 상대를 노려봤다.
“정분이라도 났냐? 아님 상황이 아직 여유롭냐. 뭔 적진 한복판에서 눈싸움하고 지랄이야.”
내 짜증 섞인 목소리가 두 놈의 눈싸움을 중단시켰다. 그런 뒤 짤막하게 카론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방금은 네 말이 과했어. 미르가 답답한 건 알겠는데 실제로 인형한테 발각당한 것도 아니잖아.”
물론 일이 터진 다음에 주의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겠지만…….
아직 13호 건물엔 진입하지도 않았는데 불화가 피어나는 꼴은 못 보겠다.
카론이 마지못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세렌이 살짝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미르의 부주의함을 빼면 딱히 큰 문제 없이 나아갈 수 있었고…….
12호 건물을 떠나고 약 한 시간.
우리는 마침내 13호 건물에 다다랐다.
나는 문을 열기 전, 카론과 미르, 에반을 보며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이 건물 안에서 뛰쳐나왔던 녀석들 말이다.
“여기 내부는 어떤 구조였는데?”
“복도가 있었습니다.”
카론이 대표로 대답했다.
“내부를 밝히는 건 벽에 붙은 촛불뿐이었고, 답답할 만큼 넓고 길었죠. 일단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안쪽이 훨씬 큽니다.”
잠깐 생각하던 카론이 말을 이었다.
“달리 특별한 건… 방문이 없었다는 것 정도.”
“음.”
“물론 돌아다닌 건 1층뿐이라서 그 위층은 어떤 구조인지 모릅니다.”
당장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너희를 쫓던 괴물은 뭐였어?”
“아. 그 오뚜기 같은 놈…….”
카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단어를 선별하는 듯했다.
그사이 대신 대답한 건 에반이었다.
“아마 그놈도 인형일 거야. 물론 그렇게 괴이하게 생긴 인형을 본 적은 없지만……. 허리가 아름드리나무보다 두껍고, 왠지 모르게 화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 팔다리가 없는 놈이라, 몸통째 도약하면서 쿵쿵 뛰어다녔는데 여러모로 기괴했지. 꼭 세로로 선 거대 지렁이 같달까…….”
“…….”
설명만 들으니 무슨 느낌인지 감이 안 잡힌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정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끼이이익-.
기름칠 안 한 문소리도 이제 뻔하다.
내부는 조용했다.
단순히 소리가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카론 말대로 문 없는 복도가 일자로 쭉 이어져 있었고… 벽면에 있는 촛불은 공기의 기류에만 옅게 흔들렸다.
탁.
뻔한 연출 그 두 번째, 저절로 닫히는 문이 되시겠다.
문이 닫힌 순간,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좁은 방에서 문을 닫았을 때나 느낄 수 있는, 이명이 들릴 정도의 고요함.
저벅.
그 침묵을 내가 깼다.
먼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
“…….”
서늘한 복도 바닥에 발을 디디며 손짓했고, 우리는 말없이 걸어 나갔다.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입이 좀 근질거렸다.
‘참자.’
“왁!” 하고, 놀래려 드는 장난을 쳤다간 진심으로 처맞을지도 몰랐다. 네 명이 합심한 채 나를 두들겨 팰 것 같은 예감.
아무튼.
일자로 쭉 이어진 복도는 기묘했다. 일단 학장이 있던 12호 건물과는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었다.
문도 없고, 창문도 없다.
벽면엔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지만, 직접 발자국을 내딛기 전까지는 어둠 너머의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뱀의 눈을 썼는데도 그랬다.
어두운 것뿐만 아니라 새까맣게 먹칠을 해놓은 듯한 느낌.
그 먹칠을 지우는 방법은 직접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신기하게도 캄캄했던 어둠이 저절로 물러나며, 최소한의 시야가 확보되는 것이다.
‘앞뒤로 포위당하면 난감하겠는데.’
복도가 좁은 편은 아니지만, 제법 큰 덩치의 인형이라면 길을 완전히 가로막을 수 있을 터.
벽을 후려치면 깨지려나?
최악의 상황엔 그렇게 도주 루트를 확보해야 할 수도 있겠다.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꽈아아아앙!
“……!”
전조도 없이, 왼쪽 벽면이 부서졌다.
“어…….”
나는 깜짝 놀랐다.
벽면이 깨졌다는 사실에 놀랐다기보단, 순간 내 상상이 그대로 구현화한 것 같아서 당황한 것이다.
푸화악, 벽면에서 나온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어둠과 먼지가 뒤섞여 사물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쿨럭……!”
그때 흙먼지를 뚫고 노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친 것인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공교롭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케이안?”
“도, 도련님……?”
피를 흘리던 케이안이 다급히 말했다.
“여긴 위험합니다! 당장 도망치셔야…….”
“무슨 일인데?”
“괴이하게 생긴 인형이 있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케이안이 급히 내 손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슬쩍 팔을 거둬 케이안이 헛손질하게 만든 다음…….
무방비한 팔을 쭉 당긴 다음 무릎으로 올려 찼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안의 팔 관절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도련님……?”
케이안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었지만.
멍청한 표정과 달리, 반대쪽 손이 일순 흐릿해지더니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푹!
의외로 그 공격을 막은 건 세렌이었다.
언제 검을 뽑아 든 걸까. 얇고 가는 세검으로 케이안의 왼쪽 손바닥을 꿰뚫은 것이다.
스릉-.
나는 양팔을 봉인당한 케이안을 보며, 오랜만에 칠죄검을 뽑은 다음 그 목을 단숨에 베었다.
스걱.
“아앗……!?”
미르가 바닥을 구르는 케이안의 머리를 보며 깜짝 놀랐다.
나머지 녀석들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 이게 무슨……! 아는 사이였던 게 아니었나?”
“첫 번째 철칙을 정하자.”
“어?”
“이 건물에서, 우리 다섯 명 이외엔 아무도 믿지 말 것.”
나는 핏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칠죄검을 털며 말했다.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