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나는 세렌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호흡과 기척. 벽을 부순 것도 이 남자였고, 누군가한테 공격당하거나 쫓기던 것도 아니야. 흙먼지 너머엔 아무도 없었지.”
때마침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세렌의 말이 정답이란 게 드러났다.
부서진 벽 너머엔 아무도 없었던 것.
세렌이 반대로 물었다.
“너는?”
“케이안 경의 근육을 잘 알아. 정장 너머로도 숨길 수 없는 태가 있지.”
나는 쓰러진 인형 케이안을 발부리로 툭 건드렸다.
“이놈의 대흉근은 형편없었어.”
“…….”
물론 그 이외에도 나 또한 케이안의 장갑에 묻어 있던 콘크리트 부스러기를 보았고, 머리에 묻은 핏물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게 아니란 걸 알았으며…….
무엇보다, 케이안이란 이름을 가진 철혈의 징수인은 결코 이 정도 사태로 당황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갖고 있었다.
즉 이 인형은 여러모로 어설펐다.
‘당연한가?’
인형 하나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제법 된다고 들었다.
케이안의 성격을 완전히 모방할 만한 시간은 없었을 거다.
즉…….
이 저택에 세워진 함정은 급조한 형태일 확률이 높다. 이 케이안 인형처럼 말이다.
일단 지금으로선 그게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
“저기 계단이 있어.”
에반이 말했다.
케이안(인형)이 부수고 나온 벽면 너머엔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위층으로 이어지는 듯한 계단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황당하고 성의 없는 등장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일단 올라갈까.”
가장 선두에는 내가 섰다.
나는 유난히 폭이 좁은 계단을 두 개씩 오르며 입을 열었다.
“이 건물은 총 몇 층일까.”
그러자 내 바로 뒤에 걷고 있던 카론이 대꾸했다.
“겉으로 보기엔 4층으로 보였습니다.”
“그럼 황녀는 4층이나 옥상에 있겠구만.”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그럴 것 같아.”
“…….”
카론이 살짝 멈칫하는 기색이라서, 내가 또 친절히 설명해 줬다.
“이런 함정까지 공들여 판 녀석인데 뜬금없이 2층에서 우리를 반길 리가 없잖아. 아마 수행의 탑을 만든 학장처럼 저택을 오르고 있는 우리를 변태처럼 훔쳐보고 있을 거야.”
때마침 계단이 끝났고…….
넓은 방의 끝 쪽에 앉아 있는 황녀가 보였다.
“안녕.”
“…….”
나는 뒤통수가 조금 따가워졌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정색을 유지했다.
묘한 구조의 방, 방이라기보단 라운지 같은 느낌이다.
“…….”
길쭉한 방의 끝엔 책상과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고, 그곳에 황녀가 앉아 있었다.
황녀의 뒤쪽엔 유난히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그 너머로 붉게 물든 밤하늘과 핏빛 달이 보였다.
필연적으로 선홍빛 조명을 받게 된 황녀는, 블랙베리인지 데스베리인지 하는 인형을 안은 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저게 연출한 거라면 대단한 연출가이고.
진심이라면 그냥 미친년이다.
나는 인상을 굳힌 채 말했다.
“전혀 안녕하지 못하겠어, 황녀 전하. 아니. 이제 황녀도 아닌가? 그러고 보니 댁 이름이 뭐였더라.”
“페리스트 스칼렛.”
뒤에 서 있던 세렌이 한숨과 함께 이름을 말해 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페리스트,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사달을 벌였는지 궁금한데? 제국 황실에 원한이라도 있나? 아니면 교단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든가.”
“아. 그것부터 얘기해야 하나.”
살짝 웃던 황녀가 찻잔을 들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눈꼴이 시려서 공력을 두른 손가락을 튕겼다.
퉁, 하고. 중지 끝에 맺힌 불덩어리가 황녀를 향해 날아갔지만… 불덩어리는 허망하게 황녀를 그대로 통과했다.
“어…….”
미르가 멍한 목소리를 냈지만, 나로선 딱히 뜻밖의 전개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눈앞의 황녀가 허깨비 같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가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본체는 4층이나 옥상, 혹은 다른 장소에 있을 거고… 저건 본래 모습을 투사해서 우리한테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살짝 차를 마신 황녀가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네, 루안 배드니커.”
“배드니커에선 이게 신사다운 행동이야.”
교인에게 다짜고짜 불덩이부터 날린다.
철혈공이 이 광경을 봤다면 엄지를 치켜세워 줬을 것이다.
‘음.’
그런데 그 아들놈이 사실 제사장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세웠던 엄지를 즉시 반전시키지 않을까.
“왜 이런 일을 벌였냐고?”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 황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찻물을 들이켜더니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만약’이란다.”
“뭐?”
“그 단어에 담긴 가능성을 좋아해.”
이 광녀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가령 이런 건 어때? 대륙 최고의 레인저인 하이드 우드잭은, 실은 인간이 아니다.”
“…….”
카론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황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세렌 굿스프링은 사실 남자다. 미르 자이언트는 거인족이 아니다. 에반 헬빈은 배신자다.”
황녀의 선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내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어쩐지 글렌보단 색이 좀 어두워 보였다.
“루안 배드니커가 실은 교인이었다……. 음. 이건 너무 나갔나? 배드니커가 교인이라니.”
“…….”
실실 웃는 황녀를 보며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러자 황녀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나는 천재란다.”
얼씨구.
“거기에 아름다운 데다 신분까지 고귀하지. 알겠니? 외모와 지성, 신분. 셋 중 하나만 있어도 원하는 것 대부분을 가질 수 있는데, 나는 모두 타고나 버렸어.”
“…….”
미르가 멍한 얼굴로 황녀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낯짝이었다.
실은 미르만이 아니라 나도 그랬는데, 뜻밖의 일은 아니다.
애초에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면 미친년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예상할 수 있는 건 대부분 따분해. 인간의 두뇌 구조가 원래 그렇지. 크건, 작건. 항상 신선한 걸 추구하게 된달까…….”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늙은이들이나 그렇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너무 젊어.”
황녀가 따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 삶엔 단 한 번의 반전도 없었지. 그래서 최초의 일탈을 해본 거야.”
“교인이 되는 게 고작 일탈이라면, 본격적인 사춘기가 오면 뭘 저지를지 상상도 안 가는걸.”
뭐 쿠데타라도 일으키려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야. 내 사정을 밝히는 것 또한 작은 여흥이란다. 마왕 강림을 도모한 황녀를 보고 미래의 영웅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거든.”
“잘 알겠어. 심심한 나머지 머리가 돌아 버렸단 얘기를 길게도 하는군.”
내가 정리해서 말하니, 황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범인의 관념이라면 그런 답이 도출되겠지.”
“그럼 넌 네가 어떻게 미쳤는지 설명하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것도 있지만, 승리 조건도 말해 주려고. 나를 죽인 다음에 마왕을 쓰러뜨려야 한다느니 어쩌고 하던데, 그건 틀렸어.”
“틀렸다니.”
“날 죽이면 그걸로 끝, 그대로 너희들의 승리란 뜻이지.”
“…….”
그렇다면 핏빛 달의 마왕을 상대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확실히 하늘에 뜬 달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가늠조차 안 가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좋은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게 맞다.
카론이 삐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되지?”
“그다음?”
“우리가 승리한 이후 말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나?”
그러자 황녀가 흥미 없는 얼굴로 말했다.
“뭐… 아마 그러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패배한 다음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서.”
“…….”
황녀는 자신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유형이 아닌 듯했다.
내게 있어선 살짝 익숙한 반응이기도 했다. 용병이란 직업을 가진 자들 대부분이 저런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특별한 인연을 만들지 못한 자들이 보이는 공통점이기도 했는데…….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없는 자들은 하루 번 돈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고, 저축처럼 미래를 대비한 행위를 하는 놈들을 등신 취급했다.
나는 제국 황족이 이삼류 용병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게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내가 말할 건 여기까지. 나는 4층에서 기다릴게. 몇 명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 궁금하네. 그럼 안녕.”
황녀가 다시 한번 찻물을 들이켠 순간, 그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우지끈!
그 직후 거목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크게 들썩거렸다.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보니, 바닥을 부수며 거대한 인형이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 저건……!”
“그놈이군.”
뭐 하는 놈인지 단숨에 알았다.
1층에서 영도를 쫓아다닌 인형이 출현한 것이다.
인형을 직접 본 순간, 이걸 본 녀석들이 왜 겉모습을 설명하는 걸 어려워했는지 납득 갔다.
우직, 우지직…….
불길한 만월처럼 점차 솟아오르고 있는 몸뚱이는 좁지 않은 라운지를 완전히 채울 만큼 컸고, 두꺼웠다.
보석 산맥에서 봤던 트롤 놈을 한 네 마리 정도 찰흙처럼 섞으면 저 정도 크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형은 이놈들의 설명대로 머리와 몸통만으로 이뤄진 구조였고…….
경계로 보이는 목 부분만큼은 움푹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구분이 됐다.
그렇다고 해도 커다랗고 뚱뚱한 느낌이 강했지만 말이다.
“저건…….”
세렌이 중얼거렸다.
아는 인형인 걸까?
물어볼 틈도 없었다.
완전히 솟아오른 인형이 살짝 점프하더니, 우리를 향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쿵! 쿵! 쿵!
비대한 몸뚱이로 쿵쿵 뛰며 쫓아오는 모습과 화가 난 듯한 얼굴은, 솔직히 말하면 꿈에 나올까 무섭다.
“달려!”
에반과 카론이 드물게도 동시에 외쳤다.
일단 그 말에 따르며 왼쪽에 있는 문을 걷어차며 내달렸다.
1층보다 살짝 더 좁아진 복도를 내달리며 물었다.
“왜 도망쳐야 해? 그냥 싸우면 안 되나?”
“이상할 정도로 단단한 놈이야! 힘을 합쳐서 공격했는데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고!”
그런가?
먼저 붙어 본 놈들의 조언인 만큼 따르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처먹어 봐야 아는 놈이라 발걸음을 멈췄다.
“어?”
“형님?”
당황하는 영도들을 무시한 채 내공을 끌어올렸다.
생긴 게 괴상한 놈이라 그런지, 겉보기로는 내구성이 얼마나 높은지 알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일단 진심으로 꽂아 봐야 알겠다.
꾸욱.
허벅지 근육을 조이고, 발바닥에 내공을 두른다.
나는 화기를 두른 주먹을 일직선으로 내뻗었다.
꽈아아아앙!
“……!”
폭음과 함께 오뚝이 인형의 움직임이 멎었다.
쿠직…….
금이 가는 소리에 도망치던 영도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해치웠나?”
“…….”
어쩐지 에반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나는 내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근거는 없는 감이었다.
콰지지지지지직……!
직후 인형의 복부에서 번진 금이 부서진 빙판처럼 전신으로 번졌고, 도자기 조각 같은 파편이 사방으로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인형 아래에, 새로운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트료시카.”
세렌이 중얼거리더니,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외쳤다.
“뛰어!”
그렇게 외치기도 전에 이미 뛰고 있었다.
나는 급히 뒤돌아본 다음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빠르잖아!”
“껍질이 하나 부서지며 좀 더 작아졌으니까! 그만큼 빨라졌겠지!”
“그럼 계속 부수면 되지 않을까?!”
“그건 어려워!”
내 외침에 시선이 쏠렸다.
“방금 주먹을 휘두르고 깨달았는데, 저놈 안에 인형이 적어도 백 겹은 있었어.”
“…농담이지?”
나도 농담이면 좋겠지만…….
주먹에 두른 내공을 저놈의 내부로 침투시켜 파악한 거니 거의 확실하다.
심지어 최소 백 겹이다.
정확한 개수는 직접 부숴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뭔 크루아상도 아니고.’
저놈은 3층까지 따라오려나.
넓은 복도를 내달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1층과 달리 중간중간에 방문이 제법 보이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한가롭게 문을 열고 내부를 탐색할 여유는 없었다.
만약 방 안이 막다른 곳이라면, 꼼짝없이 저 오뚝이 인형 놈과 그대로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복도를 계속 내달리다가… 곧 무너진 바닥을 발견했다.
“저건…….”
“맞아.”
인형 놈이 처음 솟아오른 흔적이었다.
“원래 위치로 돌아왔어. 복도가 원형 구조였나 봐.”
“그럼 이제 어떡하지?”
“…….”
인형을 죽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이제 고작 2층인데? 이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내공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외피가 단단한 놈이라, 백 번을 깨뜨려서 완전히 침묵시키려면 내공을 얼마나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어쩔 수 없이 세렌을 보며 말했다.
“세렌, 얼릴 수 있겠어?”
“한번 해볼게.”
세렌이 달리는 상태 그대로 후방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팔뚝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회오리처럼 팔 전체를 감싸더니, 손바닥에서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쿠과가가가가가각-!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세렌의 성장 척도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히 범위 바깥에 있는데도 등골이 으슬으슬해질 정도.
한설이 몰아치는 것처럼 쏘아져 나간 냉기가 그대로 오뚝이 인형의 전신을 덮쳤다.
쩌저저저저적!
그리고 인형 놈의 커다란 몸뚱이에 허연 서리가 맺히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에반이 말했다.
“성공했나?”
그 순간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산산이 부서지며 인형 놈이 다시 쿵쿵 뛰어왔다.
나는 에반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좀 닥치는 게 좋아 보여.”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