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 (2)
플레이어 마이스터 학교에 등장하는 에너미와 아이템에는 능력치, 희귀성에 따라 결정되는 ‘희귀도’라는 등급이 존재했다.
희귀도는 보유한 능력치와 존재의 희귀성의 수준을 반영한 등급을 의미했다.
단위는 UR(Ultra Rare), SSR(Super Super Rare), SR(Super Rare), R(Rare), N(Normal)로 구분되며, 필요에 따라 +와 -를 덧붙였다.
단, 측정 불가능한 규격 외 미지의 희귀도는 EX(Extra)로 표시했다.
그리고 내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뽑은 이 아이템은 최하위의 희귀도에 속했다.
〈‘견습 암살자의 폴딩 나이프’를 획득했습니다. 무기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잡템이다!’
시스템 알림음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검은색에 가까운 동색 아이템 카드다.
‘내가 아는 그 잡템이 아닐 수도 있어!’
행복한 망상으로 도피하려는 사고 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헛된 희망을 품고 아이템 정보 열람을 선택해 봤다.
〈아이템 정보를 열람합니다.〉
[아이템명] 견습 암살자의 폴딩 나이프
[형식] 무기
[희귀도] N-
[숙련도] 0%
[효과] 숙련도 경험치 획득 보너스 20% 민첩+2 힘+0 .5
[설명]
일반 마켓에서도 구매 가능한 조악한 무기.
사용자였던 복수귀, 견습 암살자의 원념이 담겨 있다.
원수의 목을 꿰뚫기 위해 복수귀는 쉼 없이 자신의 기술을 닦는다.
희망과 행복 회로가 붕괴했다.
내가 아는 그 잡템이었다.
게임이었다면 즉시 홈 버튼을 눌러 강제 종료 후 게임 삭제, 리셋 마라톤을 시작할 잡템 중 잡템이었다.
망연자실해하는 나를 두고 상황은 계속 흘러갔다.
체육관의 희미한 조명이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저편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도망······ 쳐라······.”
꺼져 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템 박스를 연 내게 한마디 하려 하던 녀석들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 저거 감독관 아냐? 야, 피, 피투성이야······.”
“저 모자 감독관이 쓰는 모잔데.”
“조의신, 너 방금 에너미가 온다고······.”
장남욱이 내게 건 말은 사이렌 소리에 묻혀 버렸다.
웨에에에에에엥!
끼이이이이이익!
사이렌과 함께 스피커를 찢는 듯한 고음이 울려 퍼졌다.
소음이 멎자 괴상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들리는가, 수험생 제군!
실제 음성은 이랬나.
플마고는 망겜답게 음성 지원 따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언젠가 더빙되길 바라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저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실기 시험장 중 한곳에 내 애완동물을 풀어놨다! ‘갖고 놀다 죽여라’라는 명령······ 아니, 가호를 내려 줬지!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교의 오프닝은 다음과 같다.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는 조연이 은광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치르러 간다.
시험장에 입실하기 전.
실기 시험에서 발생 가능한 부상 등에 학교의 책임이 일절 없음을 고지받고 수험생 서약서에 사인을 한다.
그리고 이름 없는 조연이 배정받은 수험 조는 13조였다.
―은광고는 현재 통신 기능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다, 거기에 더해 애완동물을 풀어 둔 시험장소의 수험용 장외판정 결계는 15분 동안 해제할 수 없도록 특별히 힘을 썼다!
그리고 어두운 체육관에 피투성이의 감독관이 도착한다.
―대한민국 명문 이능술사, 엘리트 플레이어의 싹들아, 인생은 언제나 부조리한 것!
그것을 가르쳐 주려······ 하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이고도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지리멸렬하고 정신 나간 내용의 방송이 끝난 후······.
―제군들 중 몇 명을 골라 죽이려 한다. 구조하고 싶으면 힘내서 찾아봐. 이상!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교 300만 사전 등록 유저를 하루 만에 반 이상을 증발시켰다는 전설의 이벤트.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이 시작된다.
〈경고, 에너미가 접근 중입니다.〉
우워어어어!
코뿔소의 머리와 사자의 몸통을 합친 듯한 기괴한 형태의 에너미가 피투성이의 감독관을 한 발에 찍어 누르고 울부짖었다.
스피커의 고음보다 강렬한 괴성이 고막을 찢을 기세였다.
폐를 옥죄는 긴장감.
전신을 압도하는 살기.
코를 찌르는 피 냄새.
짐승의 사체가 썩을 때 날 법한 악취.
나는 이 상황이 내게 있어 현실임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내 생존 본능이 지금 이게 현실이라고, 대처하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 외치고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마수종? 자, 잠깐, 현상금도 걸려 있어. 아······ 아아아······ 웅족의 권속이다!”
통찰계 스킬을 갖고 있는 듯한 장남욱이 소리 질렀다.
‘에너미의 정보부터 다시 확인하자.’
설정집을 읽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움직이기 전에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리노세론’의 에너미 정보를 열람합니다.〉
[에너미명] 리노세론 13호
[희귀도] R+
[칭호] 애완계 마수종, 웅족의 권속
[가호] 너의 주인 되는 이가 명하니, '갖고 놀다 죽여라'
[상태] 완전 복종(해제 불가), 인지 능력 저하, 감각 능력 저하, 본능 강화
[종합 능력치] Lv.38
[스킬]
무거운 돌진 Lv.5
[설명]
어느 웅족의 취미 생활의 산물.
13회의 합성과 개조를 거쳐 완성되었다.
코뿔소의 마물도, 사자의 마물도 아니게 된 마수.
남아 있는 본능과 주인의 명에 충실히 따른다.
주인의 산책에 동행하던 중 단독으로 한 마을을 괴멸시켰다.
현재 현상금이 걸려 있다.
‘이계 충돌’로 인해 불가시적 존재는 가시적 존재로, 허구는 실재로 변하였다.
신화나 전설로, 자연 현상으로, 종교로, 픽션으로 존재했던 것들은 현실이 되었다.
그때 새로이 등장한 존재 중 하나가 진족(眞族)이다.
진족(眞族)이란 인간도 에너미도 아닌 이종족(異種族)을 칭하는 말이었다.
긴 시간 이세계에 존재했으나 간섭이 제한되어 있던 이들은 이계 충돌을 계기로 완전한 모습으로 현계에 강림하였다.
허구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믿었던 마족, 천족, 용족 등이 실재하게 된 것이다.
그 진족은 개체별로 성향이 다양하여 인류의 아군이기도, 적이기도 했다.
‘이놈을 보낸 웅족은 적이야.’
웅족은 호전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애완계 마수종 R+ 리노세론은 그 웅족의 애완동물로 개조되고 조련된 에너미였다.
‘이놈한테 몰살당했었어.’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튜토리얼부터 부조리한 이유로 강력한 에너미에게 끔살당하는 게 참으로 국민 망겜다운 게임 구성이었다.
‘그래도 클리어하고 싶었는데.’
결국 클리어하지 못했다.
내가 조작하는 이름 없는 조연과 NPC들은 무슨 짓을 해도 각각 조각나서 죽어 버렸다.
결계가 풀린 후, 교사진과 교내 상위권 성적의 플레이어가 체육관으로 급히 뛰어 든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하는 건 시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살덩어리와 핏자국뿐.
섬세한 그래픽으로 표현된 절망에 찬 얼굴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 최대로 버틴 게 9분이었는데.’
리노세론의 특성을 이용해서 5분.
아이템을 사용해 버텨서 4분.
간신히 합쳐서 9분이었다.
하지만 결계가 풀릴 때까지 앞으로 15분.
“움직이지 마!”
내 말에 도망치려던 손민기가 멈춰 섰다.
“리노세론은 큰 움직임에 민감하지만 귀도 눈도 어두워!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 잠깐 동안은 괜찮아!”
그렇다면 다른 공략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15분간 살아남는다.
길어 보이는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레벨 차이가 역력한 마수를 상대로 15분을 버티는 일이다.
‘무너지려 하는 고층 빌딩 안에서 15분을 버티는 것과 난이도가 비슷할 거야.’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건 중학생 꼬마 셋과 내가 뽑은 최하위 레어도의 잡템.
사용할 수 있는 피스를 더 늘려야 했다.
“아이템 박스 열어.”
완전히 얼어 있던 녀석들이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내 경우 전용 메뉴 아이템창에서 소환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듯했다.
곧 장남욱, 손민기, 유상훈 모두 수험용 랜덤 아이템 박스를 열어 아이템 카드를 얻었다.
그러나 안도한 표정을 짓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장남욱이 뽑은 아이템은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 4장.
손민기가 뽑은 아이템은 [거미줄 그물 덫] 3장.
유상훈이 뽑은 아이템은 [솜 허수아비의 헌신] 4장.
전원 망했다.
나를 포함한 이 넷은 절대로 복권을 사면 안 될 거다.
‘아니, 그나마 장남욱은 잘 뽑은 편인가? 적어도 이 넷 중에서는······.’
희귀도도 최악이지만 셋 다 소모품을 뽑아 버렸다.
무기를 뽑은 것은 그나마 나 하나뿐이었다.
‘생각해 내야 해.’
나를 포함한 넷의 신체 능력.
아이템.
마수 리노세론.
15분.
다음 수가 떠올랐다.
“스킬로 봤는데 저거 애완계 마수종 R+ 리노세론이야. 웅족의 권속인 데다 가호까지 붙어 있어.”
최대한 담담히 상태 창으로 확인한 정보 중 일부를 말했다.
손민기는 발에 힘이 풀린 듯 휘청했지만 장남욱이 반사적으로 받아 넘어지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 입결 수준의 은광고를 지망하는 녀석들이다.
이론은 철저히 익혔을 테니, 이 정보만으로도 리노세론의 파괴력을 짐작할 거다.
“눈과 귀가 없어도 2분 만에 실내를 가루로 만드는 레벨이야.”
나는 결정타를 찍어 줬다.
“지금은 ‘갖고 놀다 죽여라’라는 명령을 따르고 있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걸 파괴하라’라는 명령으로 바뀔지도 몰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뀔지도 몰라.’가 아니라 ‘바뀔 것이다.’였다.
여러 패턴으로 시험해 봐도 5분 이상 버텼을 때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졌으니까.
“지금부터 내 생각을 말할게. 다른 의견이 있으면 바로 말해. 4분 이내로 결정하자.”
결계 해제까지 남은 시간, 14분.
방금 전까지 멍 때리던 놈이 나대는 걸 보고 미심쩍어하는 눈치였지만 별다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녀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난 한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유상훈이 내게 아이템을 넘겼다.
유상훈의 [솜 허수아비의 헌신] 4개의 소유권이 나로 바뀌었다.
〈‘유상훈’으로부터 ‘솜 허수아비의 헌신’의 소유권을 양도받았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소지한 아이템을 넘기다니, 담이 큰 놈이었다.
〈아이템 정보를 열람합니다.〉
[아이템명] 솜 허수아비의 헌신
[형식] 소모품
[희귀도] N-
[효과] 15초간 데미지를 30% 감소시킨 후 파괴된다.
[설명]
낡은 천에 솜으로 몸체를 채운 허수아비.
약 1세기 전에는 옥수수 밭에서 새 떼를 쫓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이제는 전자동 레이저 허수아비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
부피가 커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다.
“나, 나도.”
손민기는 벌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장남욱만 동의하면 된다.
가장 허우대가 좋은 놈이 뭔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잘 되더라도 부상자는 나올 것 같은 계획이네.”
장남욱은 아이템 카드를 꺼내 들며 말했다.
“조심해라, 조의신······!”
장남욱은 나를 걱정해서 망설였던 것 같다.
* * *
움직이지 않게 된 감독관을 버려두고 다음 사냥감을 찾아 리노세론이 체육관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했다.
리노세론의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건 알아도 우리들은 숨을 죽이고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이대로 제한 시간이 끝나 결계가 풀려서 도망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 기대는 금방 무너졌다.
리노세론이 괴성을 질러댔다.
우워어어어어어!
움직임이 눈에 띄게 공격적으로 변했다.
리노세론의 상태 창을 다시 확인하자 [가호] 부분이 업데이트 되어 있었다.
[가호] 너의 주인 되는 이가 명하니, ‘전부 파괴하라’
예상은 했지만 이 장소를 포함해 전부 가루로 만들 생각인 듯했다.
〈경고, 에너미 ‘리노세론’이 스킬 ‘무거운 돌진’을 사용하려 합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