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화 (4/925)

2.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 (3)

그 생명체를 지탱하고 구성하는 근본, 근원을 의미하는 것이 ‘계’.

그리고 에너미의 종류를 나타내는 게 ‘종’.

리노세론은 완벽하게 조련된 애완 상태를 의미하는 ‘애완계’, 마(魔)에 물든 짐승이기에 ‘마수종’이었다.

그 애완계 마수종 에너미.

리노세론의 종합 능력치의 레벨은 38 .

우리 넷의 평균 종합 능력치의 레벨은 10 정도.

리노세론의 스킬 몇 번이면 이 체육관 안은 우리를 포함해 믹서에 갈린 꼴이 될 거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장남욱, 던져!”

“간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장남욱이 기합 소리를 내며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을 결계를 향해 던졌다.

쨍그랑!

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 후, 풀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마수의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던 실내의 공기가 한순간 청량해졌다.

우워어어······ 우워어어어어!

리노세론은 스킬을 발동하는 것을 멈추고 비척거리며 깨진 병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병이 깨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용물을 향해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쾅, 쾅쾅쾅, 쾅쾅!

결계 위에 병이 깨진 탓에 박치기를 할 때마다 우직우직하고 스파크가 일어났다.

마수는 개의치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장남욱의 탄성이 들렸다.

“됐다······!”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교 서비스가 개시된 초반.

‘수험용 랜덤 아이템 박스’에서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을 얻은 유저들이 버그를 의심하며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데미지를 입었지만 죽지는 않아 아이템을 사용해 생명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회복한 직후 갑자기 미쳐 날뛰는 리노세론에게 순삭당하고 부관참시급의 시체 훼손까지 당했다고.

물론 수없이 많은 버그 중 하나로 취급당해 묻혔다.

당시 수능이 끝나 한가한 고3이었고 플마고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즉시 새 계정을 파서 시험해 봤다.

그러자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이템이 원인이라고 판단한 나는 버리기 액션을 시도해 봤다.

곧바로 버려진 아이템을 향해 리노세론이 뛰어갔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캐릭터를 노리긴 했지만 어떤 효과가 있는 건 확실했다.

‘그때는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설정집을 읽고 이해했지.’

리노세론은 코뿔소 마수와 사자 마수를 합성한 결과물이다.

이 마수는 육식 동물의 몸체에 초식 동물의 머리를 가졌다.

완전히 세뇌당했다고 해도 본능이 강화됐다면 농축된 풀 냄새에 반응할 것이다.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의 휘발성이 강한 탓에 금방 통상 상태로 돌아가게 되지만 타이밍을 잘 잡는다면 시간을 벌 수 있다.

만약 게임의 자유도가 높고, NPC를 조작할 수 있다면 시간을 더 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고찰해 봤지만 망겜으로 이름난 스마트폰 게임, 그것도 클리어하지 않아도 무방한 튜토리얼 이벤트에서 그걸 시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할 수 있어. 나는 게임의 캐릭터 그 자체고, 장남욱, 손민기, 유상훈과 의사소통도 가능해.’

나는 셋에게 제안했다.

첫째, 정해진 위치로 이동하여 리노세론이 날뛰기 시작할 때까지 대기할 것.

둘째, 리노세론이 날뛰기 시작하면 장남욱, 유상훈, 손민기, 나. 이 순서로 각각 결계의 정해 둔 포인트를 향해 ‘귀리꽃 엑기스’를 던질 것.

셋째, 귀리꽃 엑기스를 모두 소모하면 손민기의 ‘거미줄 그물 덫 (5초 간 대상을 묶을 수 있다)’으로 발을 묶을 것.

넷째, 발이 묶인 리노세론에게 내가······.

“아······ 으아아!”

내 역할을 되새기고 있을 때 손민기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바로 옆에 엎질러진 병이 있었다.

내용물을 뒤집어쓰진 않았지만 지금 당장 일어나서 도망가지 않으면 바닥과 함께 산산조각이 날 게 뻔했다.

“손민기!”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하는 손민기에게 달려가긴 했지만 이미 리노세론이 손민기의 코앞에 있었다.

리노세론의 뿔이 손민기를 들이박으려 하고 있었다.

지이익, 쾅!

“으악······!”

박살 난 바닥 위로 촥, 하고 피가 길게 뿌려졌다.

유상훈이 손민기를 감싸고 옆으로 뛰었는지 리노세론의 뿔에 등이 파였다.

유상훈의 등에 붉은 선이 굵고 짙게 새겨져 있었다.

“유상훈!”

“미친 마수 새끼, 개 아프네······.”

“미······ 미안해!”

“됐다. 빨리 튀자.”

유상훈이 태연한 척 말했지만 서 있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손민기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놀랐네. 아, 다행이다······.”

어느새 달려온 건지 장남욱이 바로 옆에서 안도한 얼굴을 했다.

부상자가 나오고 계획보다 리노세론이 결계에 접촉하는 횟수가 줄게 되었다.

그래도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설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 최악의 악수(惡手)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피가 멈추질 않는 유상훈의 등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    *    *

몇 분간의 대치가 이어졌다.

나는 다시 내 포인트로 돌아가 리노세론이 스킬을 시전하기 직전에 주의를 끄는 것에 성공했다.

리노세론이 결계에 코를 처박았다.

쾅, 쾅쾅. 우직, 쾅!

결계와 리노세론의 뿔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결계는 멀쩡하네. 희귀도 R+ 주제에 그것도 못 부수냐.”

피를 지나치게 쏟은 탓에 얼굴이 시허옇게 변한 유상훈이 너스레를 떨었다.

내 눈엔 다른 애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부리는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좋은 녀석이었다.

“결계는 안 깨질 거야. 떨어져 있어.”

나도 유상훈과 같은 발상을 한 적이 있었지만, 결계는 15분간 진족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해당 진족의 권속은 15분간 결계를 부수지 못했다.

“손민기, 네 차례다. 준비해!”

장남욱이 외쳤다.

내 지시대로 가장 정확히 움직이던 장남욱이다.

이젠 리노세론의 스킬 발동 타이밍도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

손민기가 조용히 ‘거미줄 그물 덫’을 꺼내 들었다.

손민기가 손에 든 아이템 카드의 수는 총 3장이었다.

아이템 개당 경직 가능 시간은 5초.

따라서 앞으로 리노세론을 경직시킬 수 있는 시간은 15초.

조건이 갖춰진 지금이라면 승산이 있었다.

리노세론이 스킬을 발동하기 직전에 다시 시간을 끈다면······.

“손민기?”

손민기가 아이템 카드를 겨눈 것은 리노세론이 아닌 유상훈 쪽이었다.

“뭐야, 지금 장난할 때냐······?”

“손민기?”

장남욱은 어리둥절해하고 유상훈은 비틀거리며 손민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손민기는 그 시선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여전히 벌벌 떨면서 긴장하고 있었지만 아이템 카드를 겨눈 손을 내리지 않았다.

“나, 난, 안전한 게 좋아.”

“뭐?”

“4분 좀 넘게만 버티면 결계가 풀리잖아.”

튜토리얼에서 끔살당해서 빛을 보지 못한 악역이 여기에 있었다.

장남욱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 질렀다.

“너 미쳤냐! R+ 마수면 1,2분이면 반경 50m는 초토화시킨다고. 얼마 안 남은 게 아냐!”

장남욱은 아직 손민기의 의중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듯했다.

결계에서 나는 스파크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리노세론이 곧 스킬을 사용할 거다.

“살아서 움직이는 미끼가 있으면 다르지.”

손민기는 주머니에서 반 정도 내용물이 남아 있는 병을 들어 올렸다.

내용물을 전부 쏟은 척하고 남겨 둔 것이다.

굳어 버린 둘을 보고 손민기가 히죽히죽 웃었다.

“진족도, 그 권속도 세 명 죽으면 만족하지 않을까. 미끼들아.”

손민기는 아이템으로 우리를 묶고 귀리꽃 엑기스를 뿌려 마수를 피하는 미끼, 고기 방패로 쓸 생각이다.

병의 내용물을 남기는 것을 보고 일을 저지를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저를 감싸다 다친 유상훈을 보고 멈출 거라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윽······!”

유상훈은 손민기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상처가 벌어진 듯 신음을 내며 비틀거리다 풀썩 주저앉았다.

손민기의 배신에 정신적 압박도 겹쳐진 탓도 있을 거다.

“유상훈!”

장남욱이 유상훈을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손민기가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이 담긴 병을 인질인 것처럼 들어 올려 보였다.

“먼저 죽고 싶으면 오든가.”

“유상훈을 미끼로 쓸 생각이냐? 유상훈은 너 구하겠다고 다쳤는데. 은혜도 모르는 새끼야!”

“은혜? 까고 있네. 중학교 때 놀았냐? 너도 딴 놈 성적 밟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게다가 지금은 성적이 아닌 목숨이 걸려 있다고!”

“무슨 소리야. 정당한 경쟁이랑 뒤통수치기가 비교가 되냐!”

손민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장남욱이 제대로 받아쳐 할 말이 없어지자 아이템 카드와 병을 고쳐 잡으며 코웃음만 치다 입을 다물었다.

본색을 드러내자 더 이상 떨지도 않고 말도 더듬지 않는 모습이 역겨웠다.

“손민기, 여기서 그만둬라. 아직 안 늦었다.”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말했다.

“말을 꼰대같이 하고 있네. 지금 나한테 뭐라 할 입장이냐?”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손민기의 비웃음만이 되돌아왔다.

한 손에는 병을, 다른 한 손에는 아이템 카드를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데자뷰가 느껴졌다.

플마고에도 비슷한 장면이 몇 번이나 있었다.

장남욱처럼 꼬장꼬장하게 굴지만 성실하고 남을 챙겨 주는 캐릭터.

유상훈처럼 평소엔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여차하면 몸을 날려 자신을 희생하는 캐릭터.

어쨌든 나쁘진 않은 놈들, 선역에 해당하는 캐릭터들은 악랄한 시나리오 속에서 죽어 나갔다.

‘너 같은 놈한테 뒤통수 맞아서 죽은 적도 많았지.’

죽어 나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호감이 가던 NPC의 얼굴이 수백 개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대치 상황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던진 아이템의 시간 끌기의 효과가 끝난 듯, 리노세론이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우워어어어어어!

〈경고, 에너미 ‘리노세론’이 스킬 ‘무거운 돌진’을 사용하려 합니다.〉

나에게도 아이템 카드를 겨누어 보이던 손민기는 결국 부상을 입어 가장 만만한 유상훈에게 아이템을 사용했다.

휙!

아이템 카드에서 뻗어 나온 거미줄 그물 덫이 유상훈을 그 자리에 묶었다.

“손민기!”

장남욱의 절규를 무시하고 손민기는 유상훈에게 병의 내용물을 뿌려 버렸다.

치익!

소량이었지만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의 효과가 나타났다.

“젠장······!”

조금 회복한 유상훈이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뒤늦게 버둥거렸지만 덫은 풀리지 않았다.

마수는 스킬 발동을 취소하고 유상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민기는 움직이지 못하는 유상훈을 내버려두고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5초가 지나고, 유상훈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리노세론은 정확히 유상훈을 향해 접근해 왔다.

“유상훈, 도망쳐!”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장남욱이 유상훈에게 외쳤다.

손민기는 히죽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이때를 기다렸어.’

나는 손에 숨기고 있던 아이템 카드를 들어 실체화한 후, 손민기를 향해 정확히 꽂아 넣었다.

퍽, 와장창!

“끄악!”

타격음과 함께 손민기의 비명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막은 건지, 박살 난 아이템의 내용물이 손민기의 오른팔을 적시고 있었다.

내가 던진 아이템은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의 병이었다.

*    *    *

내 작전에 모두 납득하고 장남욱이 아이템 카드를 분배한 후의 일이었다.

아이템 카드를 각각 한 장씩 나눠받고 정해진 자리로 이동할 때, 시스템 알람음이 삣 하고 울렸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운명력?

나는 스킬의 내용을 떠올렸다.

[스킬명] 운명력

[희귀도] EX (측정 불가)

[스킬 레벨] 3

[효과] 초현실적인 간섭을 일으킨다.

[설명]

경험, 기대, 사상, 목표, 신념 등에 근거하여 스킬 사용자의 운명을 인도한다.

스킬 사용자가 걸어온 인생, 걸어갈 인생에 따라 운명력은 저하되기도, 상승되기도 한다.

랜덤하게 발생한다.

내용을 요약하면 초현실적인 간섭을 랜덤하게 일으켜 운명을 인도한다는 것.

‘뭐냐, 뭐가 일어난 거지?’

나는 달라진 점을 찾지 못했다.

리노세론은 여전히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남은 셋도 긴장했지만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손민기를 본 순간 손끝에 정전기가 올라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손끝을 내려다보니 분명 한 장이었던 아이템 카드 밑에 또 한 장이 더 겹쳐져 있는 게 보였다.

*    *    *

깨진 병 탓에 손민기의 팔이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회복약의 효과로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뒤집어쓴 것인지 안 손민기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나는 한마디 덧붙여 줬다.

“죽기 싫으면 열심히 도망 다녀. 미끼야.”

리노세론은 유상훈보다 더 강렬한 풀 향을 내고 있는 손민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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