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 (4)
“오, 오지 마······ 오지 마!”
손민기는 다시 말을 더듬으며 뒤로 도망갔다.
아직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지 곧장 거미줄 그물 덫을 던졌다.
귀리꽃 엑기스 회복약의 잔향이 남는 건 대충 1분 이상이다.
3개밖에 없는 아이템을 유상훈에게 써 버렸으니 남은 아이템은 2개에 불과하다.
거미줄 그물 덫의 묶기 효과는 5초이므로, 10초 뒤부터 손민기는 마수와 목숨을 걸고 술래잡기를 하게 될 거다.
‘결계가 풀릴 때까지 남은 시간은 4분, 손민기가 그 시간을 버틸 리가 없어.’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때였다.
지금 리노세론의 스테이터스는 어떻지?
〈에너미의 상태 창을 열람합니다.〉
[에너미명] 리노세론 13호
[희귀도] R+
[칭호] 애완계 마수종, 웅족의 종속
[가호] 너의 주인 되는 이가 명하니, '전부 파괴하라'
[상태] 완전 복종(해제 불가), 인지 능력 저하, 감각 능력 저하, 본능 강화, 체력 감소 12, 힘 감소 15, 방어력 감소 8, 마력 감소 6, 항마력 감소 9, 민첩 감소 6, 특수 공격 내성 저하 13 .
[종합 능력치] Lv.19
[스킬]
무거운 돌진 Lv.3
······.
······.
······.
명문 은광고의 교사진이 만들고 웅족이 강화한 결계다웠다.
예상대로 결계의 상태이상 효과가 약 70개가량 중복되어 적용되어 있었다.
‘수험용 장외판정 결계’는 닿아도 데미지는 없지만 상태이상효과를 중복으로 일으켰다.
‘그래도 여기에 있는 중학생들을 전멸시킬 정도로 강해.’
절반으로 깎이긴 했지만 리노세론의 종합 능력치는 Lv.19
나의 종합 능력치는 Lv.10
전법이나 스킬 종류에 따라 전투의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지니 종합 능력치 레벨은 큰 의미가 없긴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닌 마수에 높은 레벨의 전투 스킬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카드를 실체화한 ‘견습 암살자의 폴딩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접혀져 있는 칼날을 펴 보니 6c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상대는 4족 보행 상태에서 어깨 높이만 2m가 넘는 마수다.
겁이 안 날 리가 없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던 내가 마수를 향해 달려든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나이프를 꺼내 들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프를 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수 싸움, 화면 너머로 진행되는 게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 아아아······ 사, 살려 줘, 싫어!”
내가 움직이지 못하던 사이.
손민기에게 주어진 10초가 끝났다.
내게 있어서도 천금 같은 10초가 지나가 버렸다.
리노세론은 덫에서 풀려나 손민기에게 돌진했다.
손민기는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금세 마수에게 따라잡혔다.
쾅! 우직, 우직······.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무언가가 부서지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리노세론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 거대한 뿔을 손민기에게 박아댔다.
쾅, 쾅, 콰쾅!
어느 순간부터 손민기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 탓에 더 공포감이 커졌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음에 저 꼴이 나는 건 나다.’
심호흡을 반복해 봤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리노세론은 발이 묶여 있는 게 아니다.
내 공격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손민기 대신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움직여라, 가야 돼······!’
죽 굳어 있다가 비명 소리를 듣고 도망가기 시작한 유상훈과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장남욱이 보였다.
아직 여력이 있는 장남욱은 운 좋게 빈사 상태로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신체의 대부분이 없어지겠지만.
‘유상훈은 확실히 죽을 거다.’
튜토리얼이 끝난 후 화면에 보였던 조각조각 난 폴리곤 덩어리들, 죽어 버린 NPC들은 저 둘이 될 거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이미 마수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망치라도 든 것처럼 쥐고 있던 칼을 자연스럽게 비스듬히 고쳐 쥔 나는 손민기를 공격 중인 마수를 찔렀다.
마수에게 공격을 시도하자 몸체 위로 붉은 생명력 게이지가 보였다.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찌르고 베고, 손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자세로 능숙하게 마수를 공격하지만 마치 유리칼로 돌을 베는 기분이었다.
강철로 짠 망토라도 두르고 있는 듯한 마수에게 털끝 하나 상처 입힐 수 없었다.
나이프의 성능도, 나의 능력치도 에너미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낮은 탓이었다.
수십 번을 반복해도 리노세론의 생명력 게이지는 1%도 줄어들지 않았다.
“조의신······!”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장남욱이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통찰계 스킬을 가진 장남욱이라면 지금 에너미에게 가하는 데미지가 0에 가깝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그래도 여기서 멈추면 끝이다.
마수가 손민기를 공격하는 동안 끝내야 했다.
하지만······.
귀리꽃 향이 완전히 날아가고 썩은 고기에서 나는 냄새가 비강을 채우기 시작했다.
피 칠갑을 한 마수는 더 이상 꼼짝도 하지 않는 손민기를 내버려두고 나를 노려보았다.
‘도망치고 싶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보는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압박감이다.
곧 나도 손민기 꼴이 될지 모른다.
우어어어어······!
그러나 마수는 한 번 울부짖더니 나를 그대로 방치했다.
누적 데미지가 거의 0에 가까웠던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해하다고 판단한 듯 진족의 권속은 직접 나를 공격하는 대신, 현재 가호로 주어진 명령, ‘모든 것을 파괴하라’를 시행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경고, 에너미 ‘리노세론’이 스킬 ‘무거운 돌진’을 사용하려 합니다.〉
리노세론의 몸에서 에너미가 스킬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이펙트 중 하나인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몇 초 뒤에는 리노세론이 사용하는 스킬의 충격파에 내 몸이 가루가 될 것이다.
빨리.
조금 더 빨리!
나는 일심불란 나이프를 움직였다.
“안 돼······! 그만하고 도망쳐, 조의신!”
멀리서 장남욱이 소리 질렀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붉은 증기 너머로 보이는 몸체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삣.
〈무기의 숙련도가 100%가 되었습니다.〉
시스템 안내음이 들렸다.
됐다!
나는 빛나기 시작한 나이프를 높이 들어 올려 리노세론에게 꽂아 넣었다.
〈무기의 희귀도가 N-에서 N으로 상승합니다.〉
희귀도 변화 이펙트를 두른 나이프.
내 손에 쥐여진 나이프는 리노세론이 내뿜는 증기를 가르고 마수의 몸체를 깊게 꿰뚫었다.
그동안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던 게 거짓말처럼, 나이프의 날은 마수의 급소를 향해 파고들었다.
파아아앗!
〈특수 공격 ‘즉사’가 발동합니다.〉
우워어어어······.
리노세론은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최후의 단말마를 지르고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이후에도 한참을 나이프로 겨누고 서 있었지만, 마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쓰러뜨렸다······!’
움직이지 않게 된 마수를 내려다보며 숨을 헉헉거리며 몰아쉬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손민기와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은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지만, 아찔한 감각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조의신!”
장남욱과 유상훈이 내 이름을 부르며 구를 듯이 달려왔다.
도망갈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그 모습에 긴장이 풀려 웃음이 나왔다.
“쓰러뜨렸어······ 잘했다. 조의신!”
“아슬아슬하네, 노리고 한 거냐.”
장남욱은 울기 직전의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고, 유상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서 통증을 잊고 있는 것인지 파리한 얼굴의 유상훈에게는 농담을 할 여유가 돌아온 듯했다.
“노렸겠냐. 고생했다, 얘들아.”
나는 울먹거리는 장남욱의 어깨를 퍽퍽 두드려 눈물을 들어가게 했다.
중학생 꼬마라고는 해도 사람 앞에서 울면 나중에 본인에게도 부끄러운 역사가 될 거다.
조금 세게 두드렸더니 아파하면서도 밝게 웃었다.
“유상훈, 피는 멈췄어?”
“손민기 그 새끼가 뿌린 회복약 덕에 좀 괜찮아졌다.”
지금 피가 멎었다고는 해도 움직이면 다시 상처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유상훈은 죽기 직전에도 약한 소리 하나 안 하던 놈이다.
‘상처가 덧나도 입을 다물고 있을 것 같은데.’
만일을 대비해 넝마가 된 유상훈의 교복 재킷을 벗게 해 폴딩 나이프로 잘라 임시 붕대를 만들었다.
유상훈의 가슴께에 임시 붕대를 감기 전에 폴딩 나이프를 카드화하였다.
카드화하기 직전, 아이템 정보가 업데이트된 것이 보였다.
〈갱신된 아이템 정보를 열람합니다.〉
[아이템명] 견습 암살자의 폴딩 나이프
[형식] 무기
[희귀도] N
[숙련도] 102%
[효과] 숙련도 경험치 획득 보너스 10%, 민첩+2 .5, 힘+0 .5 .
[추가 효과] 극히 낮은 확률로 상대가 즉사
[설명]
일반 마켓에서도 구매 가능한 조악한 무기.
사용자였던 복수귀의 원념이 담겨 있다.
원수의 목을 꿰뚫기 위해 복수귀는 쉼 없이 자신의 기술을 닦았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의 일격은 분명······.
레벨 차이가 큰 에너미를 상대할 때에는 리스크도 크지만 얻는 것도 많다.
‘그 얻는 것 중 하나가 무기의 경험치인 숙련도지.’
이 나이프는 가장 낮은 희귀도에 숙련도 획득 보너스가 붙어 있었다.
따라서 희귀도 상승에 요구되는 숙련도는 그리 크지 않으니 이 나이프로 높은 레벨의 에너미를 공격하면 금방 레벨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무기는 레벨업 시 특수한 효과가 추가되었다.
그게 특수 공격 중 하나인 즉사였다.
‘즉사 확률도 낮고 무기 능력치랑 레어도가 너무 낮아서 결국 게임에서는 쓸 일 없는 잡템이었지만.’
무려 그 진족이 강도를 강화한, 상태이상 효과를 부여하는 결계가 눈앞에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리노세론의 상태창으로 확인한 결계가 일으키는 상태이상 효과 중에는 특수 공격 내성 저하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운이 좋았어.’
아이템 뽑기 운은 최악이었지만.
레어도가 좀 더 높거나 더 쓸 만한 아이템들을 뽑았다면 15분을 버티는 건 쉬웠을 테니까.
그래도 운명력의 스킬이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손민기의 계략에 한 명 정도는 죽었을 거다.
“조의신, 너무 꽉 감는 거 아니냐?”
“참아. 원래 지혈은 상처가 압박될 정도로 해야 돼.”
유상훈은 인상을 쓰면서도 아프다는 소리는 안 했다.
허세를 부리는 유상훈 옆에서 장남욱은 이래저래 잔소리를 해댔다.
죽어 가는 순간에도 바라던 이 게임의 해피엔딩의 편린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미래 따위는 없었던 시한부 삶이다.
이 세계의 해피엔딩을 보기 위해 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거다.
내가 처한 상황에 의문점은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튜토리얼 퀘스트를 클리어하여 살아남은 기쁨을 동료와 나눌 때였다.
이 게임의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건 우리가 최초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 * *
“왜 저 새끼한테 저걸 줬어.”
유상훈의 시선 끝에 피떡이 되어 누워 있는 손민기가 있었다.
그럭저럭 형체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몸 곳곳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죽었는지 기절했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살아 있을 확률이 커.’
손민기의 근처에는 유상훈이 나에게 소유권을 넘긴 ‘솜 허수아비의 헌신’의 잔해가 4개 남아 있었으니까.
“데미지를 감소시키는 아이템이네.”
장남욱이 통찰계 스킬로 파악한 듯했다.
나는 ‘거미줄 그물 덫’이 해제된 순간, 손민기에게 ‘솜 허수아비의 헌신’을 사용했다.
“살리려고 줬어. 리노세론은 능력치도 저하되었으니까 데미지를 줄이면 불구가 되더라도 살아남을 것 같아서.”
이능을 가진 플레이어는 보통사람보다 훨씬 튼튼해서 쉽게 죽지 않는다.
플레이어와 일반인을 레벨로 따지면 중3 예비 플레이어인 내 종합 능력치가 레벨 10에 해당한다.
일반인은 개인차가 있지만 레벨 1에서 5정도로 알고 있다.
보통의 인간은 팔다리가 동시에 박살 나면 금방 쇼크사 하겠지만, 손민기는 국내 최고 명문을 지원하는 예비 플레이어다.
쉽게 죽을 리가 없었다.
“저건 위험한 역할을 맡은 너한테 준 거야. 사람을 팔아먹는 새끼 쓰라고 준 게 아닌데.”
“알아.”
“너도 죽이려고 한 새끼를 봐준다고?”
“아니.”
유상훈은 상한 귤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성하면 별일 없겠지만, 저놈은 안 그럴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나도 저 쓰레기를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손민기를 죽게 할 수는 없어.’
대한민국 최고 명문, 은광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등학교에서 진족의 권속에 의해 죽은 수험생 하나 있고 셋이 살아남는다고 치자.
모든 화살이 학교와 살아남은 셋을 향할 가능성이 컸다.
직접 실행한 건 나지만 이 두 명도 말려들게 될 거다.
나야 괜찮지만 이 중학생 꼬마들이 일상이 무너지는 걸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손민기가 살아남아도 얌전히 반성하진 않을 거야.’
죽음의 위기는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본 그게 손민기의 본질이다.
“알았다.”
결국 먼저 꺾인 건 유상훈 쪽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장남욱이 나와 유상훈의 눈치를 보다 겨우 한마디 꺼냈다.
“어······ 야, 그런데 내가 너한테 아이템 카드 2장 줬었어? 전부 4장인 줄 알고 실수한 거 같은데, 결과적으로 다행······.”
콰쾅!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장남욱의 노력이 무의미해졌다.
장남욱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체육관의 문이 쩍, 하고 갈라졌다.
‘결계가 풀리려면 아직 1분 정도 남아 있는데.’
진족의 결계를 부술 수 있는 것은 진족 수준의 실력을 가진 자뿐인데.
나도, 장남욱과 유상훈도 긴장한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눈에 들어온 것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박살 난 체육관 문 앞에는 눈이 아릴 정도로 새하얀 대검을 쥔 자가 서 있었다.
그 대검의 정체는 잘 알고 있었다.
파운참뢰(破雲斬雷)의 백아(白牙).
하늘을 향해 휘두르면 구름을 부수고 번개를 베어 낸다는 백호의 이빨이다.
‘백호군이다······!’
그의 애검 백아를 보지 않고 실루엣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백호군은 최종장 중 마지막 전투에 홀로 남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내가 가장 열심히 키우고 오래 사용한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하지만······.
‘백호군은 이 이벤트에 등장하지 않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임과 이 세계 사이에서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