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플레이어의 궤적 (2)
누구나 부러워하는 특권 계층에 속하더라도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 특권 계층에서도 B, C급에 속하는 이들 중에 그러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크고 작은 열등감과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를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약자를 희롱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마련된 게 이 파티의 메인이벤트인 ‘환몽(幻夢) 경매’였다.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 직접 맵을 작성하면서 공략했으니까, 비밀 통로는 대충은 기억하고 있지.’
기억을 더듬어 가니 비밀 통로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목표로 한 장소, 연회장의 백 스테이지에 도착했다.
백 스테이지에는 각종 아이템 카드가 금박 상자에 하나하나 포장되어 무대에 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템 수준은 나쁘지 않네.’
SR 이상의 아이템은 보이지 않지만 SR---급, R+++급들도 있었다.
충분히 희귀한 축에 속하는 아이템들이었다.
조금 큰 상자들도 있는 걸 보니 카드화가 불가능한 아이템도 환몽 경매에 내놓는 듯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전부 수천만 원, 수억 원을 호가하는 아이템들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금으로 도금된 거대한 새장이었다.
‘악취미다······.’
파티의 드레스 코드인 베가스 골드.
그 색을 띈 금사로 짠 날개옷을 입은 소년이 새장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소년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사월세음이었다.
〈‘사월세음’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사월세음
[칭호] 마지막 왕조의 전령의 후계자
[가호] 없음
[광림] (봉인중)
[상태] 판매용 봉인술 적용 중 ― 스킬 봉인 및 모든 레벨 1로 변화
[종합 능력치] Lv.1
[스킬]
전령 Lv.1
비행 Lv.1
바람술 Lv.1
[설명]
왕의 전령의 후계자.
마지막 왕조의 왕 가라사대 “아무리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있다고들 하나 과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백성들이다.”
왕은 6만 6천의 공노비를 혁파하고, 성도 이름도 신분도 존재하지 않던 왕의 전령도 해방하였다.
당시 그 전령이 태어난 달이 4월이라, ‘사월’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사월 일족은 성도 이름도 신분도 없이 그늘에서 ‘역사에 남지 말아야 할 왕의 말’을 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사월 일족은 이계 충돌 이후 전설로만 여겨지던 옛 전령이 지닌 기술들을 이능으로 재현해 냈다.
전령의 시조가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 옛 기술, ‘전령’, ‘비행’ 그리고 ‘바람술’.
이 세 스킬을 동시에 가진 사월 일족은 사월세음이 유일했다.
그 사월세음이 지금 거대한 새장 속에 눈에는 안대를, 손에는 족쇄를 착용하고 갇혀 있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그가 기척을 느낀 듯 더듬더듬 물어 왔다.
“누구세요······?”
사월세음은 귀중한 상품이다.
가치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폭력도 쓰지 않았을 거고, 굶기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사월세음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고 뺨도 홀쭉했다.
자칫 초등학생으로도 보일 만큼 심하게 쇠약해져 있었다.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됐어?”
“일주일······ 한 달······?”
시간 감각이 사라진 듯했다.
‘게임 속에서 사월세음이 납치된 건 은광고 실기 시험 직후였는데.’
경찰에 알리긴 했지만 은광고는 당시 실기 시험장에서 교사 한 명, 중학생 네 명이 죽어 나간 탓에 사월세음 실종 건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손미끼 사건이 크게 번진 탓에 다시 한번 묻혔고.
‘사월 일족도 적극적으로 사월세음을 찾아다닐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왕의 전령 일족은 오랜 세월 폐쇄적으로 살아왔다.
100년에 걸친 숙고 끝에 그들은 그늘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하였다.
그 첫 걸음이 사월세음의 은광고 진학이었다.
‘사월 일족은 성인이 될 때까지 사월세음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교육 과정은 검정고시로 마친 사월세음은 고등학교를 은광고로 가고 싶어 했다.
사월세음의 굳은 의지에 사월 일족은 그가 은광고 입학시험을 치르는 걸 허락했다.
‘하지만 왕의 외척의 후손에게 발견되는 바람에······.’
서류 심사를 담당한 교사는 외척의 후손이었다.
그 교사는 ‘사월’이라는 성을 본 순간 사월세음의 이력을 바로 알아챘다.
그는 덫을 놓아 사월세음을 납치하여 환몽 경매에 팔아넘겼다.
‘스토리상 사월세음이 구출되는 건 앞으로 2년 후야.’
도난당한 문화재 회수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공 일행이 환몽 경매에 잠입했을 때였다.
첫 매물은 2년 만에 환몽 경매에 올라온 사월세음이었다.
‘전령이라면 새죠.’라며 껄껄 웃는 사월세음의 주인이 새장을 가리던 장막을 벗겨 낸다.
그리고 주인공 일행은 보게 된다.
사월세음의 너덜너덜한 등에 억지로 이어 붙여져 있는 ‘비행계 야수종 그리파그나’의 날개를.
그런 미래는 보고 싶지 않았다.
“구하러 왔다. 탈출하자.”
“저기, 저······ 세민 삼촌이 잡혀서······.”
사월세음의 삼촌 사월세민이라면······.
사월세음을 찾아 헤매다 실종된 후 농락계 사령종에 의해 에너미화되어 발견되는 그 사람이잖아.
이 시점에 잡혔었나.
“오늘 환몽 경매의 오프닝 쇼에 본보기로 제물로 삼을 거라고······.”
사월세음은 결국 오열했다.
사람이 오면 곤란하다는 건 알고 있는지 입술을 자신의 어깨에 묻어 소리를 억누르고 안대를 적셨다.
“족쇄는 풀어놓는다. 묶여 있는 척해. 네 삼촌도 구할게.”
사월세민의 존재로 변수가 생겼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거다.
“네, 네······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으니까 세민 삼촌을, 제발······.”
“그래. 울면 체력 떨어진다. 참아.”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사월세음을 혼자 두고 가는 건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방금 스테이터스 창을 전부 올려 뒀던 탓에 두통으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파티 참가자를 전부 파악해 보려고 몇십 초 정도 시도해 봤지만 결국 포기했다.
‘원하는 캐릭터도 찾았으니까 됐나.’
나는 파티에 있는 이들과 차근차근 인사를 나눴다.
적극적으로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다들 내가 염준열의 얼굴로 근처에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말을 걸어왔다.
염준열은 붉은 사자의 팀 마스터 염방열의 외동아들에 본인도 스타 플레이어다.
B급, C급 인생들에게는 탐나는 연줄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이 자리는 처음입니다. 다들 동전은 받으셨나요? 저도 처음 보는 아이템이네요.”
“그렇지. 무려 진족 님이 특별히 내려 준 SR+++아이템인데!”
그들은 손에 땀이 나도록 순은 동전을 쥐고 있다가 대화 중에 언급하면서 자랑스럽게 내게 보여 줬다.
SR+++ 정도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쥐어 볼 일이 없는 희귀도의 아이템이니까.
‘소모품이라 곧 사라질 예정이니 조금이라도 그 감촉을 맛보고 싶은 모양이군.’
나를 경계하며 다가오지 않는 이들도 몇 있었지만 순은 동전에 관한 사항은 한결같았다.
인사를 하지 않아도 동전을 손에 쥐고 있는 건 뻔히 보였다.
파티회장을 한 바퀴 돈 이후에야 겨우 여유가 생겼다.
나는 피곤하니 잠시 쉬고 싶다고 말한 후 인파에서 멀어져 창가로 다가갔다.
‘개 같은 곳이다.’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는 금박 벨벳 커튼이 눈에 거슬렸다.
손에 들고 있는 무알콜 샴페인을 커튼에 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인상을 쓰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염준열 선배님. 올해 은광고에 들어가게 된 이레나입니다.”
“그래, 안녕.”
베가스 골드의 리본을 맨 이레나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리본으로 반 정도 묶어 정리한 머리카락과 시퀸 자수가 들어간 칵테일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이레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였었지. 내년에 악역으로 나왔다가 결국 타이틀 히어로에게 회유돼서 이쪽으로······.’
메뉴 스킬로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보려 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려 멈췄다.
오늘은 아직 광림도 스킬도 잔뜩 사용해야 했다.
정신력을 더 이상 소모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 이레나의 위험도는 낮으니 일단 두고 보자.’
여기에서 기운이 빠져 사월세음과 사월세민의 구출에 실패하고 나까지 잡히면 정말로 끝이다.
“저, 염준열 선배님을 TV에서 본 적 있어요.”
“그렇구나.”
“염준열 선배님 정도 되는 급이면······ 이런 곳에 안 와도 될 텐데.”
“이런 곳?”
떠보는 말에 이레나가 입을 벙긋거렸다.
유난히 동그랗게 보이는 눈을 깜빡거리다 이레나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건 특정 주제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정보 전달도 불가능해지는 침묵 맹세의 효과다.
‘벌써 침묵 맹세를 한 건가? 아직 경매는 시작 안 했는데.’
이레나는 말을 하려다 포기하고 가슴에 손을 모아 쥐었다.
손가락 틈으로 ‘침묵 맹세의 순은 동전 복제판’이 보였다.
‘이미 침묵 맹세를 했는데 동전이 남아 있어. 그렇다면······.’
침묵 맹세의 순은 동전은 소모품이다.
맹세를 하는 순간 사용자를 구속하고 동전 자체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레나를 구속하는 건 ‘작년의 맹세’일 것이다.
‘이레나의 부모는 16세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이런 곳에 데려왔었다는 건가.’
이레나는 이 세계의 나, 조의신과 동갑이다.
작년에 왔다면 16세에 끌려온 셈이다.
아니, 더 어릴 때부터 데려왔었을 가능성도 있다.
“저는 그러니까, 여기에서 얼굴을 익히면 앞으로도 도움이 될 거라고.”
이레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레나의 사정도 속마음도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온 힘을 다해 내게 충고해 주려 하고 있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귀가하시는 게 어떠세요? 선배님 부모님은 안 오신 거 같은데, 걱정하시지 않을까요?”
“그래. 부모님이 걱정하시겠지.”
“네. ‘붉은 사자’의 팀 마스터님은 아들 바보······ 아니, 하나뿐인 아드님을 무척 아끼신다고 들었어요.”
그건 안다.
염준열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홍염의 제왕 염방열이 붉은 사자와 그 동맹 팀들, 염준열을 아꼈던 진족의 용족들을 모두 이끌고 국회 의사당을 습격하는 바람에 여의도가 불바다가 됐었으니까.
‘너무 비교되는데.’
아들의 죽은 넋을 위해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을 건 아버지, 염방열 같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레나의 부모처럼 사리사욕을 위해 어린 딸을 지옥에 처넣으려는 개자식들도 있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네?”
이레나는 염준열보다 자기 자신을 걱정해 줬으면 한다.
“개학하기 전에 은광고 기숙사에 지원해.”
이레나는 부모와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기 위해선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나을 거다.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오면 그 동전 버려. 그럼 난 가볼게.”
이레나가 내게 해 준 것처럼 나도 지금 이레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충고를 했다.
나는 놀란 눈을 하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두고 돌아서서 다시 파티에 섞였다.
* * *
“신사 숙녀 여러분들. 주목해 주십시오! 이 꿈의 파티의 주최자이자 사회자인 저 변순회가 2시를 알립니다. 모두가 기다리던 새해의 첫 환상, 첫 꿈! 환몽(幻夢) 경매가 시작됩니다!”
과장된 어조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곧 연회장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무대 위로 드라이아이스가 흘렀다.
“와아!”
“오오오!”
그리고 무대 위로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한 스포트라이트에 맞춰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금빛 스포트라이트가 금테를 두른 아크릴 케이스에 담긴 아이템 카드를 하나하나 비췄다.
‘사월세음······.’
마지막으로는 비춘 것은 무대 정중앙의 새장에 갇힌 사월세음이었다.
안대를 푼 사월세음의 눈은 피눈물을 머금은 듯 새빨갰다.
“후후, 들었어요. 마지막 왕조의 유물이라구요. 정말 드무네요.”
“어머나, 추해라. 집으로 데려가 엄격하게 몸가짐을 가르치고 싶네요.”
“내가 아는 진족에게 부탁해서 ‘가든’에 풀어놓고 며칠이나 살아남는지 지켜보고 싶은데.”
파티객들의 소곤거리는 말에 사월세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사월세음은 입술을 꼭 다물고 두리번거렸다.
아마 나를 찾고 있는 걸 거다.
아까 안대를 착용해서 알아볼 수 없겠지만.
“환몽 경매를 시작하기 전에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짝.
변순회가 박수를 한 번 가볍게 쳤다.
“잡혀 있는 새를 노리고 온 겁 없는 부나방과 나방을 꼬아 낸 더러운 쥐새끼를 소개합니다!”
잡힌 건 사월세민만이 아닌 듯했다.
생각해 보면 외부에 거의 연줄이 없는 사월세민이 어떻게 여길 알고 왔겠는가.
‘이 파티에 있는 누군가, 정확히는 주최 측에 관련된 누군가가 사월세민에게 알렸었던 거야.’
경비원들이 엉망이 된 남녀를 끌고 와 무대 한가운데에 던져 넣었다.
남자, 사월세민으로 추측되는 인물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해 있었다.
경비원과 같은 디자인의 정장을 입은 여자 역시 이곳저곳 부상을 입었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녀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변순회를 노려봤다.
“자,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순은 동전에 침묵 맹세를 하고, 다시 돌아오는 건······.”
“지랄.”
여자가 단호하게 변순회의 말을 끊었다.
끌려오는 동안 얻어맞은 듯 귀에 착용한 검은 이어링은 박살 나 있었고 얼굴 곳곳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일갈했다.
“이런 개 같은 직장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백수로 살았다. 에너미만도 못한 짐승 새끼들아!”
“어쩜!”
“하.”
“상스러워라!”
“이래서 가정 교육이 안 된 쥐새끼들은.”
퍽!
변순회가 직접 여자 경비원의 배를 걷어찼다.
여자 경비원은 고통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사월세음은 견디지 못하고 눈을 녹일 기세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배신자의 말로를 결정짓는 것도 여러분에게 맡기도록 하죠. 오늘 환몽 경매 첫 매물은 이 쥐새끼입니다.”
변순회는 순은 동전을 들어 올렸다.
“자, 침묵 맹세의 순은 동전을 쥐여 주시겠습니까?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침묵하고 방관할 것을 맹세해 주십시오. 맹세한 자만이 여기 환몽 경매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파티장에 있는 이들이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순은 동전을 움켜쥐었다.
나는 손도 들지 않고 변순회의 말을 잘라 버렸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소······ 아니, 홍룡 염준열 님.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결정적인 순간 흐름이 끊겨 당황한 듯했지만 변순회는 감히 염준열에게 뭐라 할 깜냥이 되지 못했다.
나는 최대한 그럴 듯하게 염준열의 분위기가 나는 말투로 말했다.
“은의 열전도율이 구리보다 높은 거 알고 있어?”
“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원격 점화’를 사용합니다.〉
얼빠진 말로 모두의 넋을 빼놓은 한순간.
잠복 불씨를 심어 둔 수백 개의 순은 동전들이 일시에 타올랐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