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플레이어의 궤적 (4)
진족(眞族)에게도 여러 근원, 근본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근원에 따라 칭호의 ‘계’가 결정되었다.
‘계’에 상하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예외도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신화계, 전설계, 민담계였다.
근원이 신화로 기록된 것, 전설로 남은 것, 민담에 떠도는 것에 따라 그 격이 갈렸다.
‘이 세계의 대한민국의 건국신화는 ‘단군신화’가 아닌 ‘개천신화’였지.’
단군신화와 달리 개천신화에서 곰은 등장하지 않았다.
개천신화는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한 호족, 신성한 범들이 천신의 은총을 받고 신인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이야기다.
그래서 웅족은 호족과 달리 신화계가 아닌 전설계로 존재했다.
나는 그 전설계 웅족의 진웅팔선(眞熊八仙)의 일각인 비탄의 웅녀와 접촉했다.
환몽 경매에서 그녀를 발견한 나는 비탄의 웅녀에게 메모를 건넸다.
이 시간에 이곳 안산의 정상 무악동 봉수대로 와 달라는 내용의 메모였다.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분한 연회에서 흥을 돋우어 준 대가다. 말해 보아라.”
검은 드레스에 황금색의 숄을 걸친 여인은 어둠 속에서 그림처럼 미소 지었다.
‘침착하자······.’
지금부터 내가 할 말에 비탄의 웅녀는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신화계······ 아니, 전설계로 격하된 전설계 호족의 적호(赤虎)는 1년 내로 죽습니다.”
파아앗!
비탄의 웅녀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뿜어져 나왔다.
염준열의 모습으로 홍룡을 감고 있는데도 머리카락이 충격파에 밀려 정신없이 흩날렸다.
‘방어하지 않았다면 몸 어딘가가 잘려 나갔을 거야.’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봉수대에 남은 실금을 보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진족 중에서도 호족과 웅족의 반목은 이 한반도의 모든 인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네가 적호의 죽음을 알았다 한들 내게 알릴 이유가 있느냐?”
대답하지 않았다.
‘계’가 격하되었다는 건 그 근원이 바뀔 만한 대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그 사실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적호의 격하의 비밀에 비탄의 웅녀가 어떻게 관여했는지 알고 있었다.
호족은 한반도의 패권을 얻고 천신의 은총을 받았다.
호족들은 패권을 다퉜던 웅족을 받아들여 공존하고자 했다.
그러나 웅족은 야심을 버리지 않았고 비탄의 웅녀는 적호를 속여 천신의 은총을 저버리게 한다.
‘천신의 은총이 사라져야 호족과 웅족이 공평하게 한반도에서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감언이설로.
적호를 속여 죄를 짓게 한 후 웅족은 반란을 일으켰다.
호족은 웅족의 제압에 성공했으나 적호의 배신으로 천신이 한반도에 내린 은총은 대부분 사라졌고 많은 동족을 잃었다.
천신과 신인, 호족은 이 치욕적인 역사를 지우기 위해 신화 속에서 적호와 웅족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신화의 시대가 끝난 이후로도 불가시적인 세계선 속에서 호족과 웅족의 반목이 이어졌다.
이계 충돌이 일어나 그들이 다시 현계한 지금도.
하지만 현재 현세에 전해지는 사실이라곤,
‘호족과 웅족은 반목하고 있다. 개천신화 시절부터 반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라는 것뿐이었다.
적호와 비탄의 웅녀의 이야기는 지워져 버렸으니까.
‘그걸 말하면 반쯤 죽여 놓거나 진짜로 죽이려 들겠지.’
아픈 건 싫고 죽는 건 더더욱 싫다.
나는 사실을 숨기고 비탄의 웅녀의 주의를 돌렸다.
“비탄의 웅녀께서는 ‘세 눈을 가진 진실의 청려장(靑藜杖)’을 가지고 계십니다. 청려장의 눈으로 저를 비춰 주십시오.”
“······나의 청려장 앞에서는 그 어떤 거짓도 고할 수 없다. 알고 있는 것이냐.”
“네.”
비탄의 웅녀가 허공에 손을 젓자 붉은 눈이 세 개 박혀 있는 명아주 지팡이가 나타났다.
세 눈을 가진 진실의 청려장.
상대의 동의가 있다면 세 번에 한해 말의 진위를 판별해 주는 아이템으로 비탄의 웅녀가 제작한 SSR급 아이템 중 가장 유명했다.
청려장을 겨누는 비탄의 웅녀를 보며 각오를 굳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려장의 붉은 눈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네가 적호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사실인가.”
“네.”
청려장의 붉은 눈이 하나 감겼다.
진실이라고 판명되었다.
거짓을 고하는 순간 저 붉은 눈이 감기는 대신 저주를 뿜어내 안구를 꿰뚫을 것이다.
“1년 내로 적호는 죽게 되는가.”
“네.”
청려장의 두 번째 눈이 감겼다.
비탄의 웅녀도 한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간 아무 반응도 하지 않던 그녀가 조금 쉰 목소리로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너는 적호를 구할 수 있는가.”
그건 아직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구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100% 구할 수 있게 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확실한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렇다’라고 말하면 거짓이 될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본 그녀가 다시 물었다.
“질문을 바꾸지. 적호의 죽음을 막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이 질문에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네.”
청려장의 모든 눈이 감겼다.
비탄의 웅녀는 우아하게 팔을 저어 청려장을 사라지게 했다.
“말하라. 무엇을 원하는가.”
비탄의 웅녀의 눈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5000년에 걸친 회한과 분노, 미련이 사무치는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곧게 응시하며 답했다.
“진웅팔선이 천신과 신인을 해하기 위해 만드셨던 비보 세 개가 필요합니다.”
“뭐라고!”
사아아ㅡ
웅녀의 반경 10m 정도에 있던 수목이 한순간에 말라 비틀어졌다.
진족의 분노를 뒤집어쓴 땅이 생기를 잃고 죽어 버려 색이 변해 있었다.
“인간의 아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그게 실패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느냐.”
“네.”
그 아이템은 게임상으로는 나오지는 않고 설정집에서만 등장했다.
내 목표 중 하나는 이 아이템이 없다면 이룰 수 없었다.
이계 충돌이 일어나기 전.
아직 진족이 불가시적이며 인간계에 대한 간섭이 제한된 존재로 현세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다.
진웅팔선은 천신과 신인을 소멸시키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둘이 실성하고 셋이 긴 잠에 빠지게 되어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 잔해인 실패작들뿐이었다.
비탄의 웅녀는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손 위에 빛나는 카드가 세 장 놓여 있었다.
“명심하여라. 네 짧은 생명이 끝나기 전에 적호의 숨이 먼저 멎는다면, 이 비탄의 웅녀가 진웅팔선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너를 파멸시키리라는 것을.”
〈‘비탄의 웅녀’로부터 ‘부(富)와 생명의 무게’의 소유권을 양도받았습니다.〉
빛나는 아이템 카드들이 비탄의 웅녀에게서 내게로 날아왔다.
아이템 카드를 손에 쥐자 카드들은 아이템창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은광고 개학까지 해결해야 했던 가장 큰 숙제가 끝났어······.’
아이템을 건넨 비탄의 웅녀는 여전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속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해 왔다.
“다음에는 네 참된 모습으로 만나자구나. 그 실패작을 네가 소유하고 있는 한, 내가 너를 못 알아볼 일은 없다.”
그녀는 내가 염준열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건 꿰뚫어 본 듯하였다.
‘설마 진족은 플레이어의 궤적을 꿰뚫어 보나?’
긴장한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경계했다.
그러자 비탄의 웅녀가 여태까지 보였던 분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장난기를 담아 짓궂게 미소 지었다.
“용족이 아끼는 소홍룡이라면 나도 몇 번 보았지. 네가 그 미숙한 아이일 리가 없단다.”
비탄의 웅녀는 달빛 아래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는 염준열의 안에 들어 있는 나, 조의신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살짝 내게 몸을 기울였다.
‘······적호를 홀린 진족답다.’
비탄의 웅녀는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안의 내용물과 심연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공포를 자극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너는 지금의 그 아이로선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득하고도 머나먼 미래의 모습과도 같구나.”
후후후, 하고 비탄의 웅녀가 작게 웃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등을 돌려 한 걸음 내딛자 순식간에 어둠 속에 파묻히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새해 첫날부터 긴 낮잠을 자고 정신을 차린 건 저녁이었다.
그사이 여의도에 있었던 의문의 대화재는 거대 범죄 게이트로 바뀌어 있었다.
‘고작 하루 만에 여기까지 파헤칠 줄이야.’
내 생각보다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홀로그램창을 여러 개 열어 관련 기사들을 동시에 전개해 읽었다.
[실종된 희귀 이능 플레이어, 인신매매된 기록 남은 장부 발견되어, 충격.]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나, 환몽(幻夢) 게이트. 조사 대상자만 수백 명.]
[환몽(幻夢) 게이트, 주범 ‘변순회’ 인신매매, 폭행, 상해, 납치, 감금, 탈세, 건축법 위반 등 걸려 있는 혐의 끝이 없어······.]
[서울경찰청, 환몽(幻夢) 게이트 봐주기 논란 관할 경찰서 제대로 턴다. ‘특별 감찰, 감사’]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환몽(幻夢) 경매 참가 플레이어의 영구 제명 예고]
‘이게 무쇠팔의 대영웅 송만석의 힘인가······.’
그날 내가 노린 것은 소방 병력과 소방청과 사전에 계약을 체결한 프로 플레이어 팀을 부르는 것만은 아니었다.
진짜 노림수는 ‘한강 싸이클링 팀’을 부르는 것이었다.
한강 싸이클링 팀.
약 20년 전에 발족한 이 프로 플레이어 팀의 마스터는 올해 72세가 되는 ‘무쇠팔 송만석’이었다.
50년 전에 프로 플레이어가 된 송만석은 제대로 된 플레이어 지원 체계도 공략 정보도 아이템도 없이 맨몸으로 에너미와 맞서 살아남았다.
수많은 전우를 잃은 그였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 왔었다.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은 플레이어 세계의 여명기를 이끌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대영웅도 40세를 넘고 50세에 이르니 젊은 시절에 비해 기력은 줄고 몸은 노쇠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잊혀 조용히 은퇴하였다.
그 후 은퇴한 플레이어 동료들을 모아 만든 것이 한강 싸이클링 팀의 전신이 되는 ‘한강 싸이클링 동호회’였다.
동호회의 시작은 매주 주말 한강 주변의 자전거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주행하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강 싸이클링 동호회원들은 양화대교 위에서 환혹계 악마종 에너미에 홀린 100명의 소년, 소녀들이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걸 목격했다.
이후 ‘양화대교 집단 자살 미수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사건에서 사망자는 0명.
당시 평균 연령 54세의 은퇴 플레이어의 모임인 한강 싸이클링 동호회원 15명이 몸을 날린 결과였다.
‘그리고 한강 싸이클링 팀이 탄생했었어.’
그 이후 송만석은 동호회원들과 뜻을 모아 ‘한강 싸이클링 팀’을 결성하였다.
가입 조건은 30년 이상 프로 플레이어로 활약한 경력이 있을 것.
팀 결성 후 20년에 걸쳐 그들은 음지에서 언론과의 접촉도 피하며 무쇠팔의 대영웅이 해 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한강 위에서 자살을 고민하는 이들은 매년 약 1000여 명.
실제로 뛰어내리는 이들은 약 400여 명.
그런 약해진 이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자살을 유도하는 환혹계 무형종, 악마종 에너미들은 넘쳐 났다.
그러나 형태가 없는 환혹계 에너미를 퇴치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한강 싸이클링 팀은 그런 약해진 이들을 발견해 내어 돕고 설득하고 지원하고 구했다.
‘한강 싸이클링 팀은 연말연시에도 한강 주변을 순찰하지.’
마침 환몽 경매가 진행된 여의도의 컨벤션 홀은 한강을 등지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대형 화재를 발견했다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팀 전체에 소집령을 내려 즉시 현장으로 향했을 거다.
염방열이 이끄는 붉은 사자와 용족들이 국회 의사당을 습격했을 때 일반인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것도 그들의 활약 덕분이었으니까.
‘기사에도 한강 싸이클링 팀이 이 자리에 있었다고 언급은 되어 있어.’
나는 홀로그램에 한 줄로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팀명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추측했다.
노련한 송만석이라면 변순회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거다.
정의로운 송만석이 수년간 반복되어 온 더러운 환몽 경매를 못 본 척할 리도 없었다.
‘변순회는 관할서에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다고 했어. 하지만 긴급 체포도 되고 특별 감찰 얘기가 나온 걸 보면······ 송만석이 최소 서장급 인사를 불러낸 모양이네.’
대부분의 대중에게는 잊혔지만 50대 이상의 고위직 인사들은 아직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전화 한 통이면 10분 내로 플레이어 협회의 한국 지부장도 날아왔을 거다.
그리고 환몽 경매를 부순 내게 무명의 초신성에 이어 또 하나의 칭호가 붙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4)